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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우환미술관(1)

Lee Ufan Museum 1

by 문현

들어갔던 길을 되돌아 지추미술관을 나온다. 언제고 다시 찾게 되리라는 예감이 드는 장소를 떠날 때는 크게 아쉽지 않다. 지추미술관 매표소에 다다르면 셔틀버스 시간을 확인한다. 이우환미술관까지 걸어서 십 분이 채 되지 않으니 걸어도 좋고 셔틀버스가 몇 분 내로 도착 예정이라면 버스를 타도 좋다. 여기저기 한가롭게 어슬렁대는 고양이를 바라보며 내리막길을 걷는다.

지추미술관에서 걸어 내려오면 거의 비슷한 지점에 이우환미술관(Lee Ufan Museum)과 밸리갤러리(Valley Gallery)가 양쪽으로 자리한다. 안도 타다오 색깔이 물씬 풍기는 회색 콘크리트에 이우환미술관 이름이 살포시 새겨져 있다.

2011년 뉴욕 구겐하임 특별전으로 이우환 작가를 만났다. 전시를 다 보고 나오면서도 이우환 작가의 전시라는 사실을 몰랐는데 그것을 제대로 된 만남이었다 말해도 되는지는 모르겠다. 한국 근현대미술에 큰 관심이 없던 시기였어도 이우환이라는 이름이야 당연히 알고 있었으나 그 영어 표기가 Ufan일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저 내가 모르는 Ufan Lee라는 동양 작가가 있나 보다 생각했다. 한국어로 발음할 수 없는 자음으로 이름을 표기하는 까닭은 지금까지도 궁금하다.

대학원에 다니던 시기라 시야는 좁아질 대로 좁아졌고 뇌는 딱딱하게 굳어 퍼석했지만 자각조차 하지 못한 상태였다. 공부한답시고 협소한 특정 주제에만 매달려 있으면 공부의 의미가 퇴색되는 이런 슬픈 일이 벌어지기 쉽다. 특별전에 대한 정보도 관심도 없이 그저 습관처럼 구겐하임 미술관을 찾았다. 완만한 경사를 나선형으로 올라가며 하나하나 전시품을 보다가 문득 뇌에 전기충격이 가해진 것 같았다. 그래, 이런 자극을 받고 싶어서 미술관을 찾는 거였지, 새삼스레 생각했다. 나와 달리 훌륭한 학자들은 연구할 때 뇌가 가장 활성화될지도 모르지만, 내 뇌는 확실히 놀 때 반짝인다. 호모 루덴스들이여, 온 힘을 다하여 놀아야 하느니.

저 순간을 돌아볼 때마다 아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데, 그런 자극을 선사한 작품이 무엇이었는지, 작품의 어떤 요소에 자극을 받았던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카메라를 꺼내기 귀찮았는지 아니면 오랜만에 느끼는 자극에 정신이 팔렸는지 사진을 찍지도 작품명을 기록하지도 않았다. 저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처럼 시공간의 벽을 두드리며 “기록을 해. 사진을 찍으란 말이야.” 라며 과거의 자신을 채근하지만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루 일정을 마치고 친구와 대화하다가 비로소 내 뇌를 찔러댄 이가 이우환 작가였음을 알게 되었고, 그 후로 이름을 마주하게 되면 무심히 흘려보내지 못한다.


이우환과 일본의 인연을 알고 있고 일본의 모노하라는 예술 흐름을(예술 운동이라는 말은 무언가 삐걱이는 느낌이라 좋아하지 않는다) 주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나오시마 아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우환미술관이 설립되었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기도, 그럼에도 놀랍기도 했다. 부산시립미술관에 이우환 공간이 있지만 나오시마에 있는 미술관이 이우환이라는 이름을 내건 최초의 미술관이다. 페리를 타지 않으면 닿을 수도 없는 섬이라는 폐쇄된 공간에, (지추미술관과 마찬가지로) 미술관 대부분이 땅 속에 묻혀 있다는 나오시마의 이우환미술관은 또 어떤 기억으로 남을 것인가.


그것이 얼마나 긴밀한 우정인지, 어떤 종류의 우정인지는 모르지만 이우환 작가가 미술관을 건축한 안도 타다오와 친구 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보기도 전에 공간과 작품이 아주 잘 어울리겠구나 성급하게 짐작했다. 성급한 판단이 항상 틀리기만 하는 건 아니다.


미술관 이름이 적힌 벽 뒤로 길고 좁은 계단을 내려가면 바다에 접한 골짜기가 넓게 펼쳐지고 이우환 작가의 작품들이 풍경 속에 무심히 자리한다.

<관계항-점, 선, 면 2010/ Relatum-Point, Line, Plane>
<관계항-대화 2010/Relatum-Dialogue> <관계항-휴식 또는 거인의 지팡이 2013/Relatum-Repose of the Staff or Titan>
<관계항-대화 2010/Relatum-Dialogue>
<무한문 2019/Porte vers l'infini>

미술관 입구를 찾지 못해 콘크리트벽 근처를 오래 서성이던 여행객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뒤로 아무것도 없는 돌담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냥 벽을 따라 쭉 들어가면 된다.

계속 들어간다.

<관계항-표시 2008/Relatum-Suggestion>

더 걸어 들어가면 작은 리셉션이 나온다. 입장료를 내면 소박한 미술관 안내 종이를 주는데 뒷면에 입장 날짜 도장이 찍힌 입장권이기도 하다. 이우환미술관은 관람 당일 재입장이 가능하고, 베네세 호텔 숙박객은 이 입장권에 도장을 받으면 다음날까지 재입장이 가능하다고 하니 잘 챙기자.


(다음 이야기도 이우환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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