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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술의 섬, 나오시마

by 문현

나오시마라는 지명을 어디서 처음 보았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생각 없이 뒤적이던 책자에서 마주친 낯선 지명이 기억에 새겨진 것은 ‘예술의 섬’이라는 거창한 별칭 때문이었다. 대체 어떤 곳이길래 ‘예술의 섬’이라는가. 호기심이 보글거렸지만 일본 본토에서도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작은 섬이라는데, 저기까지 어떻게 가겠어, 라며 구체적인 위치도 경로도 알아보지 않고 나오시마라는 이름을 마음 한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그전에 쿠사마 야요이의 노란 호박이 푸른 바다를 바라보는 사진에 시선이 잠시 머무르기는 했다.


그 후로도 종종 나오시마라는 이름을 접하게 되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국내에 나와있는 관련 서적을 다 읽은 후였다. 알고 보니 다카마쓰라는 도시에서 배를 타면 한 시간 만에 도착할 수 있었고, 에어서울이 다카마쓰까지 직항 항공편을 운영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코로나 여파로 운항이 취소되었으나 2022년 겨울 재취항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재취항 광고를 보게 된 우연을 운명으로 둔갑시켜 이것은 나오시마에 가라는 하늘의 계시라고 자기 합리화를 서둘러 마쳤다.


일본 여행을 가고는 싶으나 선뜻 혼자 여행을 떠나지 못하던 친구를 꼬드겼다. 혼자 하는 여행을 선호하지만 이왕 나오시마에 갈 거라면 베네세 하우스에서 하룻밤이라도 숙박을 하고 싶고, 나는 평소 씻고 자는 시간 이외에 숙소에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1박 10만 원이 넘는 숙박비는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허용하지 않는데, 베네세 하우스는 선호 숙박비가 1박 10만 원인 사람이라면 쳐다도 보아서는 안 되는 곳이지만, 숙박비를 친구와 나눠내면 그래봤자 1박 10만 원 같은 소리는 할 수 없지만, 저 하루를 제외한 다른 날에는 바퀴벌레만 안 나오면 된다는 심정으로 호텔을 구한다면, 하루 정도는 베네세 하우스에서 묵어도 되지 않겠나, 길고 구질구질한 자기 합리화가 이어졌다.


지금이라면 내가 번 돈 내가 쓰고 싶은 데 쓰겠다는데 누가 뭐라겠냐며 망설이지 않겠지만, 저 당시 나는 건강상의 이유로 반백수에 가까운 상태였고, 반이든 완전하든 백수 신분에 베네세 하우스는, 염치는 남은 백수라면 상상도 하지 말아야 하는 곳이다. 염치없는 반백수가 되어 강행한 베네세 하우스 숙박은 염치 따위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좋았다. 그 후로 나오시마를 두 번 더 갔는데, 두 번 다 베네세 하우스를 다시 찾았다. 그중 한 번은 오벌동에 무려 혼자 묵었는데, 환갑잔치 미리 당겨한다고 생각하지 뭐,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는 걸 보니, 그 정도의 합리화가 필요한 금액이었다는 소리일 테지만, 여행이 끝난 후 비용을 차근차근 계산하는 낭만 없는 일은 좀처럼 하지 않으므로 정확한 금액은 생각도 나지 않지만, 망각 속에 묻힌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고 마냥 좋았다.


2024년 봄, 어쩌다 보니 엄마와 일본 여행을 가게 되었다. 예술에 크게 관심 없는 엄마의 의견 따위 묵살하고 여기는 가야 한다며 나오시마 여행을 계획하고, 나오시마에서는 여기에 묵어야 한다며 베네세 하우스를 예약했다. 오벌동은 왔다 갔다 하기가 너무 번거롭다며 파크동을 예약했는데(파크동이 베네세 하우스에서 그나마 싸다), 이것이 진정으로 엄마의 편의를 위해서였을지는 꽤나 의심스럽지만, 모두의 안녕을 위해 그렇다고 믿기로 하자.


시키지도 않은 베네세 하우스 홍보대사 역할은 앞으로 지나칠 정도로 하게 될 테니 지금은 이쯤에서 자제하기로 하고...


이런 분들은 고민하지 않고 나오시마로 떠나면 되겠다.


예술에 흥미가 있다. 특히, 현대 예술을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쿠사마 야요이, 안도 타다오, 니키 드 생팔, 스기모토 히로시, 데이비드 호크니, 제임스 터렐 등의 이름이 반갑다.

예술에 그럭저럭 흥미가 있는데 우동을 유난히 좋아한다. (나오시마에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다카마쓰가 우동으로 유명한 카가와 현에 위치한 ‘우동의 도시’다. 다카마쓰에 우동 먹으러 간 김에 나오시마에 들러도 좋고, 나오시마에 가는 김에 우동을 만끽하는 것도 좋다. 나는 평소에 우동을 거의 안 먹지만 다카마쓰에 가면 하루 두 끼 정도는 무조건 우동이다)

사람들로 복작대는 대도시를 벗어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어라, 마침 예술에 그럭저럭 흥미가 있다.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나오시마에는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십 대 여행자에게도 그다지 마음을 끄는 여행지는 아닐 것이다. 삶에 적당히 찌들고, 젊은 활기가 사그라들기 시작한 것을 실감하는 중년 이상 노년들이 가장 만족할 장소일 것이다. 나이에 적합한 경험이 있다고 굳게 믿는다. 나이가 들어 처음 나오시마를 접하면 그 평화로움에 젖어들었을 이들에게 너무 일찍 나오시마를 강요해 나오시마? 지루하기 짝이 없는 곳이야, 다시는 근처에도 가지 않겠어, 생각하게끔 하지 말자. (같은 이유로 아이들에게 고전 문학 좀 읽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오시마 신 미술관이라는 이름을 지닌, 말 그대로 새로운 미술관이 문을 연다는 소식을 듣고, 적당히 찌든 내 중년의 심장이 들썩이기 시작한다. 나오시마 여행을 또 한 번 계획할 때가 왔도다.


다음 이야기: 다카마쓰가 대체 어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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