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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orest Writer Mar 07. 2022

학생, 배탈 안 났어요? 지금 다른 사람들 난리 났어


2005년 3월 2일의 날씨를 아직도 기억한다. 아침에 눈이 왔다. 반지하 창문 너머로, 2미터 남짓 간격의 건너편 건물 벽면을 배경으로, 매우 고요한 눈뭉치들이 조금의 흔들림 없이 수직으로 그리고 아주 천천히. 아무런 소리 없이 쌓이는 듯하다가 다시 녹아 사라졌다. 가끔씩 방에 모든 소리를 꺼두고 혼자 누워있을 때면 그날의 고요함이 얼핏 생각날 때가 있다. 스무살의 시작. 첫학기.


개강 첫 주라서 수업은 거의 없었지만, 새로 만난 친구들 이름과 번호를 저장하고, 여기저기 불려 다니고 동아리 알아보고 여러 술자리를 가졌다. 달력에 아주 빽빽하게, 뭔가 분주하게 약속이 많은 스무살의 설레임. 


학교 앞에 하숙집을 구했지만, 도저히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없었다. 아침 일찍 나섰다가, 밤늦게 들어와서 정말 잠만 자는 방. 물론 그때의 나는, 정확히 15년 후에 코로나라는 것이 등장해서 하루 종일 집에 틀어박혀 있어야 한다는 미래를 절대로 예상할수도 상상할수도 없었다.




개강에 맞춰서 일주일 만에 잡은 방. 보증금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월세는 똑똑히 기억한다. 한 달에 30 만원. 17년 전인데, 지금 시세랑 크게 다르지 않은 그 당시에 꽤 높은 금액이었다. 건물은 층별로 몇 개의 구역으로 나눠지고, 따로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 하나의 구역은 방 2개와 화장실 한 개로 구성된 단순한 구조. 아침엔 옆방의 룸메와 눈치싸움을 하며 씻을 시간을 확보했던 기억이 있다. 


남학생 방은 반지하부터 낮은층, 여학생은 꼭대기의 주인아주머니와 가까운 고층으로 나눠져 있었고, 공용 식당은 남학생 층 거실에 있었다. 즉, 여학생은 밥 먹을 때만 남자 동으로 오고, 남학생은 평생 여자 동에 갈 일이 없다. 나름 체계적으로(?) 신경 쓴 구조. 덕분에 나는 마당의 빨랫줄을 거의 혼자 독식하다시피 했고, 방 안에서 빨래를 넌다는 상상을 군대 가기 전에는 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도 미니멀 라이프지만, 그 당시에는 훨씬 심해서 방안에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침대, 책상, 옷장 끝. 인터넷 선도 없고 티비도 당연히 없었다. 방에선 책을 보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친구들과 문자를 주고받거나. 방에 짐이 너무 없다 보니, 남자 10명이 누워도 될만한 여분 공간이 있었다. 어느 날은 학교 농구장에서 농구를 하고 친구를 우리 집에서 씻게 했는데, 한번 아주머니에게 걸려서 무진장 혼이 났고, 그 이후로는 친구들을 잘 부르지 않았다.


반지하였지만 사실상 1층과 다름없던 내방은 여름이 가까워져도 정말 시원했다. 선풍기도 에어컨도 없었는데, 특유의 건물 구조와 바람 순환 때문에 곰팡이는 구경도 못했다. 다만, 가끔씩 거미 같은 벌레가 기어다닐때도 잠시 있었는데, 어느 순간 사라져서 보지 못했다. 냉장고, 전자레인지, 주방기구, 세탁기, 신발장, 화장실이 전부다 방 밖에 있으니 벌레 입장에서도 아무것도 먹을 게 없는 것. 


냉장고를 비롯한 공용 주방기구는 거의 사용해본 적도 없고 쓸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날그날 음료수 사 온 것은 그날 다 먹기. 안 그러면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니깐.




아주머니는 하루에 두 끼씩 하숙생들에게 밥을 차려 주셨다. 일주일에 하루 정도 쉬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매일 20~30 명 분의 학생들 밥을 챙겨주는 노동이 얼마나 고되었을지 짐작이 된다. 저녁은 학생들 대부분이 약속이 있는 경우가 많아서 10명분 정도를 해 두셨는데, 그마저도 먹지 않고 반찬이 그대로 남아있는 식탁을 보는 아주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허하셨을까. 물론 우리는 그때 그런 건 생각도 안 하고 매일 저녁 놀러 다니기 바빴다.


그나마 아침은 많이들 먹었는데, 서로 눈치를 봐가며 사람이 없을만한 시간에 조용히 밥을 떠서 자리에 앉았다.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들이지만 식사를 하면서도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지만 다들 핸드폰을 옆에 끼고서 아침밥을 먹는 사람들. 나는 밥을 다 먹을 때까지도,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를 경우가 더 많았다. 고개를 들면 너무 민망한 아침의 내츄럴한 헤어(?) 풍경들. 룸메 아닌 사람을 제대로 쳐다본 적도, 대화를 나누어 본 적도 없다.


아주머니는 아침을 다 차려놓으면 출입문 근처에 앉아서 쉬면서 학생들 밥은 먹고 나가는지 확인하셨다. 그런데 밥을 먹는 모습을 직접 보는 것도 아닌데, 학생들 나가는 모습만으로 어떻게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알까?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데, 아주머니의 직감은 대부분 맞았다. 귀찮아서 아니면 빵을 먹고 싶어서 아침을 거르고 출입문을 나가려고 하면 여지없이 아주머니가 밥 먹고 가라고 기분 좋은 잔소리를 하셨다.


전날 늦게 들어와서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고 싶은 날에도 아주머니의 아침 사랑은 쉬지 않았다. 차마 문을 열고 들어오지는 못하고, 계속해서 방문을 두드리면서 아침을 먹으라고 깨우셨는데, 그럴 때면 잠은 깼지만 인기척은 없는 척을 했다. 그러면 뭐하나 신발장에 신발이 덩그러니 있는데. 오후 1시쯤, 일어나서 씻지도 않고 부엌에 어슬렁거리면 나만을 위한 계란 후라이가 포스트잇과 함께 놓여있던 고요한 오후. 그런 묘한 기분을 다시 느낄 날이 있을까.




어느 날은 수업을 듣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누구지, 하면서 쉬는 시간에 전화를 걸었더니 아주머니였다.


"학생, 괜찮아요? 배탈 안 났어요?"


철도 씹어먹을 나이에 무슨 배탈? 나는 이상없다고 괜찮다고 하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알고 보니 그날 아침인지 전날 저녁인지 아주머니가 준비했던 음식이 상했는지 학생들이 단체로 배탈이 났다고 했다. 나는 같은 음식을 다른 학생들보다 더 많이 먹었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응답하라의 쓰레기보다 더한 인간에게 배탈 따위는 사치였다.


학생들이 낮에 보통 집에 있지를 않으니, 아주머니는 한 명 한 명 전부 전화를 걸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던 거였다. 평소 살갑던 목소리와는 사뭇 다른, 미안함이 절실히 느껴졌다.


다음날부터 나는 웬만하면 끼니를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아침/저녁을 챙겨 먹었다. 약속이 있더라도 밥을 먹고 나갈 때도 있었다. 어차피 술약속이라 상관이 없었다. 그 사건 이후로, 식탁에 반찬이 많이 남아있으면 아주머니가 상처 받을까봐, 밥을 2공기씩, 3공기씩 먹었다. 


식탁은 한동안 뜸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채워지기 시작했다. 고요한 식탁에 조용히 앉아서 게걸스럽게 밥을 먹어치우던 스무살의 내 모습이 도움이 되었는지 아닌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사실, 지금 사는 곳과 그 하숙집이 그리 멀지는 않다. 차 타면 30분 정도니깐. 그때 건물이 아직 남아있을까, 가끔 로드뷰로 볼뿐, 다시 찾지는 않는다. 굳이 과거에 추억과 감상에 빠질 필요는 없으니깐. 17년 전은, 17년 전으로 남겨두기로 한다. 그 사이에 나는 키가 2 cm 정도 더 컸고,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직장인이 되어있다.


사람마다 스무살 하면 떠올리는 게 다를 것이다. 풋풋한 연애, 동아리 활동, 과활동, 엠티, 농활, 소개팅과 미팅... 등등. 그런데 나는 그때의 아주머니가 가끔 먼저 생각이 난다. 낮에 공강 시간에 잠깐 눈을 붙이러 집에 들어오던 골목길 모퉁이의 그 햇살, 바람, 새들의 지저귐, 선명한 그림자와 함께.


저녁을 준비하는 아주머니를 뒤로 하고 철없이 번화가를 돌아다니던 스무살의 내가, 아직 가끔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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