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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orest Writer Apr 25. 2022

식당 아주머니는 이미 인공지능을 다 알고 있다


유난히 밥이 맛있는 식당이 있다. 그래서 내가 아주머니에게 혹시 곱빼기 메뉴가 있냐고 물어보니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냥 나오는 대로 먹는다.


하긴, 하루에 수백 명이 이용하는 식당에서 곱빼기 메뉴를 만들어놓으면 매번 꼼꼼히 정량을 해야 하는데 (일반과 곱빼기의 차이를 일정하게 둬야 하니깐), 한 번에 여러 개의 요리를 만들면서 일일이 그걸 어떻게 다 하고 있나... 식당은 역시 느낌과 감각의 눈대중이지. 어떤 날은 많이 나왔다가, 또 다른 날은 조금 아쉬웠다가.


그렇게 그릇까지 씹어 삼킬 기세로 모든 걸 깨끗이 비우고 일어선다. 그렇게 몇 번 방문하면 저번보다 양이 조금씩 더 늘어있다. 


어떤 날은 자리에 앉아 주문을 하니, 아주머니가 내 얼굴을 쓱 보고는 주방에 얘기한다. "밥 넉넉히 줘."






밥을 먹다가 문득 옆 테이블은 뭘 시켰나 볼 때가 있다. 나랑 같은 메뉴를 시킨 여자, 그녀가 받은 밥의 양은 나보다 적다. 확연히 차이 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슷한 것도 아니고, 정말 애매하게 양의 차이가 느껴진다. 단골 식당의 그릇 크기가 익숙한 나에겐 쉬운 구별이다.


그렇다고 필자가 많이 먹는 편이냐? 그것도 아니다. 1인 1닭을 못하는 평범한 30대 남자. 군것질도 거의 하지 않는다. 하지만 식당에 가면 아주머니들이 밥을 그렇게 많이 준다. 응답하라의 큰손 하숙집 아주머니를 바라보는 쓰레기의 눈빛을 할 때가 종종 있고, 남기기 미안해서 주는 대로 다 먹을 때도 있다.


왜 식당 아주머니들은 여자보다 남자에게 밥을 더 많이 줄까?



일단 남자의 식사 기준만큼 여자 테이블에 주면, 대부분은 남긴다. 남기면 어차피 쓰레기가 되고, 처리 비용이 발생하는 것도 당연하다. 일단 이 방법은 안 되겠군.


여자 기준으로 남자 테이블에 주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남자들은 양이 부족하다. 다음번에 왔을 때도 같은 양이면? 다신 안 온다. 음, 여긴 양이 적군. 컴플레인 따윈 없다. 다른 식당에 가면 그만이니깐. 


그럼 남녀 요금을 다르게 받으면 어떨까? 제육볶음 1인분에 여자는 6천원, 남자는 6천5백원으로 하면 안 될까? 음... 그러면 아마도 곧바로 뉴스에 나오고, 인터넷에 난리가 나겠지. 요즘 세상은 차별에 정말 민감하다. 남자보다 여자가 목욕 시간이 길다고 사우나 요금 다르게 받는다면 어떻게 될지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하면 가게 문 닫는 건 순식간이다.



그래서 식당 아주머니들이 학습한 방법은, 남자 손님에게 '은근히' 밥을 조금씩 더 주는 것이다. 가게에 들어오는 손님의 모습을 '눈으로' 스캔해서 대충 이 정도 먹을 거라는 예상으로 밥을 건넨다.


만약에 먹방 유튜버처럼 대식가인 여자가 들어오면? 그럴 땐 마법의 대사가 있다. "혹시 부족하면 말씀하세요." 양이 모자를 때 더 주는 것은 가능해도, 이미 내놓은 음식을 다시 사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방법이 음식 쓰레기도 적게 나오고, 눈대중을 유지할 수 있어서 효율적이고, 단골도 확보하고 등등 장점이 많다. (물론 매장 이용만 해당되는 얘기이다. 포장은 소비자가 직접 음식 쓰레기 처리 비용을 부담하기 때문에, 전부 같은 양으로 나간다.)



이런 식으로 '논란'이나 '문제'가 가장 적도록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바로 인공지능의 기본적인 학습 원리이다. 조금 더 정확한 표현으로 손실(loss)을 줄이는 방향으로 학습을 해 나가는 것. 여기서 '손실'은 바로 경제학에서 쓰이는 용어와 같다. 어쩐지 익숙하다 했더니.


사실 손실을 줄인다는 것이 이득을 높인다는 말도 되기 때문에, 인공지능의 판단은 보상(reward)이 가장 높은 선택을 기준으로 하기도 한다. 이것을 강화학습(reinforcement)이라고 하며, 그 유명한 알파고의 바둑 알고리즘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이겨본 한 사람과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식당에 가면 여러 가지 밑반찬이 같이 나온다. 예를 들어, 배추김치와 깍두기가 있는데, 내가 깍두기는 안 건드리고 배추김치만 싹쓸이 해버린다면? 다음번에 왔을 때 아주머니는 배추김치를 조금 더 주고, 깍두기는 덜 줄 것이다. 다른 반찬도 마찬가지의 원리가 적용된다.


이 총각, 파전은 잘 먹는데 다른 건 별로 안 좋아하네? 그러면 파전을 더 주고 다른 건 줄인다. 그렇다고 파전을 너무 많이 주면 어떻게 될까? 어쩔 수 없이 남겠지. 다음번에는 거기에 맞게 아주머니가 파전 양을 맞춰줄 것이다. 이렇게 최적화 작업이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진행된다.


매번 깍두기를 남기는 게 미안해서, 아주머니에게 그냥 배추김치랑 잡채만 먹을게요, 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이후로 한동안 아주머니는 반찬을 가져다주면서 "깍두기는 안 먹죠?" 라고 물어보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말도 안 하고 배추김치만 주신다. 이렇게 각각의 반찬 양이 개별적으로 정해지는 것을 인공지능의 시냅스 웨이트(synaptic weight) 결정이라고 한다. 


사람이 물론 입맛이 변할 때도 있다. 어느 순간부터 깍두기를 가져다 달라고 하더니, 깍두기를 싹쓸이하고, 배추김치를 남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예전에는 배추김치를 더 좋아했는데? 반찬을 어떻게 주지? 아주머니는 이런 고민을 하다가 대개는 깍두기를 더 넉넉하게 준다. 과거의 경험이라고 다 같은 게 아니라, 최근에 가까울수록 가중치가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요즘에' 좋아하는 것을 더 주자. 이것을 인공지능의 학습률 조절(optimizer)라고 한다. 따라서 시냅스 웨이트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상황 따라 조금씩 변한다.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연구직에 종사하고 있지만, 사실 일반인에 비해 대단한 지식을 갖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식당 아주머니들이 인공지능을 더 많이 알고 계실 수도 있다. 단골들의 데이터베이스, 시냅스 웨이트를 모두 기억하고 있는 대단한 사람들.


그나마 전공자로서 다른 점은 수학 공부를 많이 한다는 것. 어쨌든 사회적 현상을 수치적으로 변환시켜야 쓸만한 알고리즘을 만들 수 있으니깐. 모든 공학의 기초는 수학이고, 결국 수학을 잘해야 사람들의 생각이나 관념, 현상을 제대로 반영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저 숫자놀음으로만 끝나지 않고, 세상의 많은 일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많은 것에 관심을 두려고 하고 있다. 많이 보고,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기. 그러면 한 가지 확실한 것이 느껴진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우리 주변의 이웃들, 도시의 구성원들, 오후 4시의 햇살 아래 잔잔히 퍼지는 삶의 목소리들, 지하철 계단의 또각또각 발걸음들은 사실 모두 대단하고 위대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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