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사람들과 다큐멘터리 얘기를 하면 눈이 반짝 떠진다. 하루의 마무리를 매번 새로운 다큐 한편과 함께 하는 사람으로서 지극히 당연하다.
이렇듯 KBS, MBC 안 나오는 건 괜찮아도 NGC, EBS 안 나오는 건 정말 괴로운 필자와 같은 다큐 매니아들에게 침팬지와 고릴라의 차이에 대해 얘기를 시작한다면, 반색을 하며 당장 이런 말이 먼저 나오게 된다.
"침팬지는 성생활이 자유롭고, 고릴라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인간은 고릴라보다 침팬지에 더 가깝다."
침팬지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암컷이 여러 수컷들과 교미를 하기 때문에 수컷 침팬지의 고환은 매우 크다. 암컷의 몸안에서조차 수컷들의 정자들끼리 경쟁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진화를 한 것. 이 경우 수컷 침팬지 입장에서는 하나의 암컷 하고만 관계를 맺는 것은 유전자를 이어나갈 확률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암컷과 관계를 한다. 이것을 난혼이라고 한다.
일부일처(또는 일부다처) 제의 고릴라는 조금 다른데, 혼외 성관계가 거의 없다 보니 수컷 고릴라 입장에서는 자신과 관계하는 암컷이 (다른 수컷과 관계를 갖지 않고) 자신의 새끼를 낳아줄 거라는 확신을 할 수 있고, 따라서 고환이 커질 필요가 없게 된다. 경쟁을 하지 않으니 평소에 정자를 많이 만들어 둘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인간은 유전학적으로 고릴라보다 침팬지에 훨씬 가깝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다부다처, 즉 바람기를 모두 타고나며, 단지 마음속에 있는 것을 행동으로 실행하느냐 마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남성의 바람기는 너무나 흔하기 때문에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다. 많은 자원을 가지고 권력과 힘의 최정점에 오른 남성들은 우선적으로 많은 부인 집단을 거느리게 된다. 전 세계의 왕, 황제, 재벌들의 가족 관계도를 보면 (심지어 현재에도) 자연스럽게 일부다처제를 따른다. 그들에게 혼외자식은 이상한 일이 아니며, 매너 있고 지고지순한 사랑을 바라는 건 헛된 기대라는 것을 알면서도 부인들은 불평을 한다.
어찌 보면 사랑, 지고지순함, 변치 않는 마음 등의 이상적 감정은 열등한 수컷의 전유물일지도 모른다. 더욱 과장해서, 바람 안 피우는 남자는 무능력하다는 평가도 종종 있다.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라면서.
남성의 바람기는 여성들을 힘들게 하지만 여성 입장에서 그나마 다행인 건 어찌 되었든 자신의 낳은 아이가 자신의 유전자를 갖는 것은 맞고, 자신은 높은 생활적 안정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높은 권력 남성에 의한 일부다처제가 전 세계적으로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가 된다.
여기서 더욱 나아가서, 자신이 따로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가진채, 높은 서열의 남자를 속이고 결혼하여 유전자와 현생의 삶 모두의 평안을 추구하는 방법도 있다. 정자를 받는 남자 따로, 헌신을 받는 남자 따로, 일명 뻐꾸기 전략이다. (유전자 검사가 없던 시절, 혈액형만 맞으면 절대 들킬 일이 없던 기술이다)
이러한 여성의 바람기를 남성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평생 육체적, 물질적인 헌신들 들여서 키운 자식이 자신의 친자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며, 그러면 적어도 유전자 관점에서 그 남성의 삶은 실패한 것이 된다. 모든 인간 남성이 갖는 이러한 유전적 도태에 관한 공포감은 생각보다 굉장히 크기 때문에, 자연스레 여성의 순결에 대한 열망, 그것을 권장하는 문화가 발달했다. (여성들은 이 점을 활용하여, 남성들에게 자신의 순결성을 은근히 어필한다)
결국 이 모든 게 다 인간이 고릴라보다 침팬지에 더 가깝다는 과학적 사실에서 비롯된 문화양식이다.
남성의 바람기가 가져오는 결과에 비해 여성의 바람기가 가져오는 개족보(?)문제는 단 한 번의 외도만으로도 너무나 치명적인 결과를 야기했기 때문에, 인류사에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억압이 수없이 많이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남편이 전쟁터에 나간 사이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강제로 채우는 유럽의 정조대, 우리나라의 엄격한 유교이념 등등이 있다. 물론 모조리 다 실패했고, 여성들은 개의치 않고 바람을 피웠다. (애초에 정조대를 제작할 때부터 예비 열쇠도 같이 만들었다고 한다. 대장장이 개이득.)
현대사회에 와서도 이별의 가장 큰 이유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바로 배우자의 바람기. 인간은 본능적으로 다부다처, 즉, 하나의 배우자에 만족하지 못하는 유전적 성향을 타고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배우자의 바람기에 실망을 하고 이별한다. (물론 직접 물어보면 전부 '성격차이'라고 대답한다. 다 거짓말. 애초에 성격이 같은 사람은 없다.)
바람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만나야 피울 수 있기 때문에, (바람피우는 남자의 수) x (남자 한 명당 바람 횟수)는 마찬가지로 (바람피우는 여자의 수) x (여자 한 명당 바람 횟수)와 같다는 공식이 성립할 것이다. 애초에 남자와 여자 중에서 누가 더 바람을 많이 피우는가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전체 바람 횟수는 같다.
이것은 여러 사회문제를 낳기도 하는데, 특히 유전적 도태가 두려운 남성들이 가장 폭력적으로 변하는 시기는 바로 자신의 여자의 바람기를 알게 되었을 때이다. 자신도 모르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자신의 유전자로 착각하고 평생 헌신하며 키운다는 공포감은 잠재적 폭력성을 끄집어낼 수 있고, 실제로 아무 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오해'를 줬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여성들이 폭력으로 희생된다.
남자의 바람은 생물학적으로는 티가 나지 않지만, 보통 여자의 '촉'으로 적발되게 된다. 여자의 바람은 남자의 촉으로 알기 어렵지만 아이를 낳았을 때 문제가 드러나게 된다. 혈액형이 다르다던가, 아니면 외모가 하나도 닮지 않았다던가, 최종적으로는 유전자 검사 결과가 다르다던가.
특히, 이 부분은 얼마 전 유명 연애 프로그램에 나왔던 어떤 남자의 이혼 사유 때문에 큰 화제가 되었었다. 또한 중국에선 자신의 세 딸이 모두 혼외 자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남자가 절규했다는 기사도 있었다.
출산과 동시에 의무친자확인을 하면 해결되지 않겠냐고 하지만, 그리 쉽지 않다. 개인정보 문제도 있고, 정치인 입장에서 많은 여성들의 표를 잃게 되는 것 역시 자명한데, 추진한다고 해서 정치적인 이득도 별로 없다.
아마도 "남자는 원래 바람피워도 티 안 나는데, 여자도 그래야 되지 않겠느냐" "어느 정도의 생물학적인 바람 본능은 인정해주자, 그래야 유전적으로 다양해질 수 있지" 라는 대의명분도 있을 것이다. 뻐꾸기에 희생된 남자는 소수이고, 사회 전체적으로는 유전학적으로 이득이니깐.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입장, 공리주의의 힘은 여전히 강하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다부다처를 추구하며, 누구나 바람기를 마음속에 품고 있으며, 그것을 실행하는 의지가 있냐 없냐로만 구별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게 참 어려울 때가 있다. 인간은 유전자 덩어리가 아니고, 상상보다 위대하며, 고결한 사랑은 꼭 존재한다고 아직도 철없이 믿는 필자와 같은 사람들에게 더욱더 그렇다.
사랑은 미래 세대의 태어나고픈 강렬한 의지일 뿐이며, 현생 사람들에게 사랑이란 모두 착각이라고 쇼펜하우어가 말했다. 과학적 관점에서 모두 맞는 말이다.
쇼펜하우어를 존경하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그가 틀렸으면 좋겠다. 물론 근거는 없고 단지 희망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