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orest Writer Nov 12. 2022

여사친, H


슈퍼 남초 집단, 남고-공대-군대-IT연구소 코스를 정석(?)으로 밟아온 필자에겐 3명의 여사친이 있다. 나보다 한 살 많은 J, 나랑 동갑인 H, 그리고 6살 연하인 K, 이렇게. 물론 평범한 남자들보다 매우 적은 숫자이지만 친밀도는 누구 못지않게 끈끈하다. (물론 연락처에 다른 여자 지인들도 많지만, 그들은 '친구'라고 부를 정도로 친하지는 않다)


J와 H는 벌써 15년 가까이 인연을 이어오고 있고, K와는 6년째 친구 사이로 지내고 있다. 외국에 있는 게 아니라면 일 년에 적어도 1~2번은 만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틈틈이 안부를 묻는다. 한번 연락을 하면 카톡창이 가득할 정도로 말이 많은 것도 우리들의 문화이다. (물론 J, H, K 서로는 전혀 모르는 사이이다)


거의 평생을 강남에 살았던 H가 우리 동네 근처로 이사를 왔다. 원래부터 서울 사람이었으니 본가가 아예 통째로 이사를 한 것. 선선한 가을날, 동네 카페에서 H와 마주 보며 얘기할 때마다 나는 자주 15년 전으로 돌아가곤 한다.






H를 처음 만난 건 군대를 제대한 대학교 2학년의 가을이었다. 당시 친했던 친구가 H와의 소개팅을 주선했는데, 사실 그땐 나의 온갖 관심사가 학점 메꾸기, 과외 알바 구하기, 군인 냄새(?) 벗어나서 친구 사귀기, 동아리 들어가기... 이런 것들에 있었기 때문에 별로 내킨 만남은 아니었다. 카톡도 없던 시절, 나는 쿨하게 사진도 거절하고 H의 얼굴도 모른 채 소개팅에 나갔다.


그리고 H를 처음 만난 저녁. 나는 휘둥그레 한 눈빛으로 H의 모습을 처음으로 마주했다.


예뻤다!


정말, 진짜로 예쁜 사람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나는 H의 모습과, 목소리, 말투, 걸음걸이, 모든 것에 호감을 느꼈다. 내가 아닌 그 어떤 남자라도 똑같은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날, 가을바람은 봄바람으로 바뀌었다. 


소개팅을 마친 후, 우리는 드문드문 문자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만나서 몇 번 밥도 같이 먹었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나는 우리가 사귈 거라 생각했다. 이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가 된 사이에선 한 번도 실패를 해본 적이 없던, 근자감이 하늘을 찌르던 나의 시절이었다.






대학교 2학년이 마쳐가던 어느 추운 날이었다. 과외 알바를 끝낸 밤, 지친 귀갓길에서 나는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H와의 소개팅을 주선했던 나의 친구. H가 술자리에서 많이 취했으니 와서 좀 데려다 달라고. 자기도 몸을 가누기 힘드니, 멀쩡한 네가 와서 얘 좀 데려가라.


버스에서 내려 다시 반대편 버스를 타고 술자리에 도착했다. 무슨 회식을 한 건지 H는 술이 떡이 되어 있었다. 나는 친구와 함께 H를 업고 택시에 태웠다. H의 동네가 OO빌딩 근처인 것만 알지, 그 이상은 전혀 몰랐다. 일단 기사님께 빨리 거기로 가자고 재촉했다. 오전 3시가 가까워갔다.


친구는 H의 폰을 뒤져 부모님 전화번호를 어찌어찌 알아냈고, 나는 술이 떡이 된 H를 그대로 업고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내 코트 안쪽이 땀으로 바다가 되어 있는 줄도 모른 채, H는 온몸에 힘을 풀고 내 등에 업혀 자고 있었다. 제발, 실수(?)만 하지 마라, 그것 하나만 진심을 다해 기도했다. (다행히 실수는 없었다)


한참이 지나 나는 H의 부모님과 조우했다. 내 얼굴엔 땀범벅에, 몰골이 그냥 물벼락 맞은 사람과 다름없었다. H는 여전히 내 등에서 편안히 쿨쿨 자고 있었다. 세상에, 아무리 그래도 친구 부모님과의 첫 만남을 이 시간에 하다니. 나도 H의 부모님도 서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흔히 친구들 부모님이 하는 말씀, 밥 먹고 갈래?라고 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겨우겨우 다시 집에 들어오고 나서야 동이 트기 시작했으니깐.






사실, H는 잊을만하면 술자리에서 필름이 끊어지곤 했고, 그럴 때마다 주변에서 챙겨줘야 했다. 그러다 통금이 생기고, 풀리면 다시 끊어지고. 한 번은 아침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아서 경찰에 신고까지 하는 흑역사도 생겼다. 물론 다행히 해프닝으로 끝났다.


술병이 난 건지 H는 자주 아팠고, 이상하게 자주 사고가 났고, 자주 입원을 했다. 그러면서도 같이 밥을 먹을 때면 천진난만해지는 H의 얼굴을 보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이 아이의 남자친구가 있다면 그는 이럴 때마다 얼마나 걱정스럽고 불안할까?"


H를 좋아했지만 그녀의 남자친구가 될 수는 없었다. 이 모든 것을 온전히 받아줄 수 있을 정도로 너그럽고 사려깊은 사람이 나는 절대 아니다. 나도 H도 서로 고백하지 않았다.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15년이 흘렀다.






친구로서의 H는 배려심 많고, 성격도 좋고, 참 재밌는 사람이다. 집돌이인 나와는 달리 세상 경험도 많고, 여행을 좋아해서 여행기를 들으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른다. 그 어떤 얘기도 웃으며 추억으로 넘길 수 있다. 그녀의 남자친구가 아니라서 가능한 일이다.


우리 둘 사이엔 단단한 나무 막대기가 있다. 그래서 일정 거리 이하로 좁아들 수 없고, 가까워질 수 없다. 서로의 행동에 대해, 가치관에 대해, 신념에 대해 참견하지 않는다. 간섭하지 않는다. 충고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냥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 (물론 H가 아플 때면 약간의 걱정을 하긴 하지만) 그래서 15년이라는 인연이 이렇게나 오랫동안 이어질 수 있었다. 앞으로도 H와 교제할 일은 절대 없다. 어쩌면 평생토록 친구일 수 있을 것이다.


H가 만났던 남자친구 얘기, 내가 만났던 여자친구 얘기를 하다 보면 커피 한잔으론 부족하다. 그래서 우리는 만나면 수다로 몇 시간 이상은 족히 걸린다.






H를 버스 정류장까지 바래다주면서 뒤돌아서기 전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왼손을 크게 흔들었다. 기분 좋은 H의 미소, 분명히 15년 전 그대로다. 네 얼굴은 나이를 먹지도 않는구나. 여전히 예쁘다.


남사친, 여사친이란 어떤 관계인가, 인터넷과 유튜브에 이런 논쟁이 많다. 잠재적 애인 아닌가? 분명 적어도 한쪽이 호감이 있는 거 아냐? 하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남사친, 여사친은 사귈 수 없는 남녀관계라고. 호감이 있지만 연인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친구로 유지된다. 남은 선택지는 이것밖에 없다.


응답하라 1994의 나정이를 바라보는 해태처럼, 나는 언제나 H를 응원할 것이다. 항상 건강하길. 새해에는 술 좀 줄이길. (하긴, 술을 안 마셨으면 애초에 이런 친구사이도 안 되었겠지만)




-부기.

물론 H도, 내가 브런치를 하는 걸 절대 모른다. 아마도 언젠가 우연히 이 글을 보더라도, 자기 얘긴지 모를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