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워하다
매년 특별하지 않은 해는 없지만 2022년은 특별히 더 나에게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새로운 동네로 집을 이사를 하고,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한다.
새로운 페이지가 시작된다는 것은 이전 페이지는 덮인다는 말과 같다. 단지 종이 한 장 차이지만 영원할 듯 닫힌 곡면의 지평선 너머로 공기는 차폐되고, 과거는 잠이 든다. 항상 그렇지만 모든 현재는 곧 그런 과거가 된다. 모든 게 찰나의 일이다. 찰나는 영원이 된다.
5년이나 정이 들었던 동네도 곧 떠나게 된다. 생각해보면 서울에서 참 많은 곳을 옮겨 다녔는데 이렇게나 꽤나 안정적으로 머물렀던 곳도 별로 없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정말 오래 지냈지만 이제는 발걸음을 거의 갖지 않는 연희동과 연남동처럼, 특별한 일이 없으면 굳이 찾지 않을 그런 추억의 공간으로만 남을 것이다.
매일 마주 보는 햇살의 각도, 동네의 분위기, 노을의 물감들이 어쩐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되새겨보면 아쉽지 않은 순간이 없고, 많은 순간이 후회로 남기도 한다. 미련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그렇게 모든 과거의 페이지는 아름다우면서 아쉽다.
2003년 뜨거웠던 여름날에 자주 들었던 임창정의 노래를 다시금, 자주 듣게 되는 그런 날.
오늘은 이제 멀리 가는구나
1분 1초가 야속 하구나
원래 그런가 보다
왜 시간은 항상 아쉬울때
끝나는 걸까 오 나만 그런걸까
왜 시간은 항상 행복할때
끝나는 걸까 나에게만 그런걸까
오늘이 아쉬워 잠 못들고
한숨만 쉬다 잠이들고 오
미련한 사람아
내일 아침에도 또 해가 뜰거야
현재는 찰나의 순간에 과거가 된다. 과거는 아름답다. 그 말을 다시 하면, 모든 현재의 순간은, 어쩔 땐 괴로워 보일지라도, 언젠가는 아름다워진다는 말이 된다.
브런치 La Francia 작가님의 글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남자 친구와 만나서 뭘 먹을지, 주말에 친구들이랑 놀러 갈 때 무엇을 입을지를 고민했다. 과외 아르바이트가 연속으로 있던 날은 너무 고단해서 그만두고 싶었고, 시험기간이면 학점을 잘 받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대학원 때는 잘 안 써지는 논문을 붙잡고 괴로워했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은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가 그립다.
학교 앞 라이브 재즈 클럽에 앉아서 혼자서 몇시간이고 음악을 듣다가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오던 그 밤이 사무치게 그립다. 과에서 단체 엠티를 가서 밤새도록 게임하며 과음하고 다음날 뻗었던 그때를 추억한다.
요즘 내 일상은 한없이 버거운데 자유는 점차 축소되고, 의무는 다방면으로 확장되는 삶의 무게에 때때로 숨이 막히는데, 훗날의 나는 지금 이 시점을 그리워하게 될까.
시간이란 무릇, 힘든 기억은 흐릿하게 만들고, 좋은 기억은 한층 미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모든 과거는 추억의 대상이 되는가.
일상을 잘 관찰하면 좋은 일들과 감사한 일들이 가득하다. 육아라는 일은 고된 노동이지만, 그 세계에는 달콤한 찰나들이 가득하다. 시간이 지나면 나는 분명 지금을 그리워할 것임을 안다.
'다시없을 지금, 여기. 다시없을 내가 있다.'
-La Francia 작가님의 지하철 1호선을 탔다 중에서
어떤 현재를 보내든지 간에, 모든 순간은 아쉬움으로 남을 것이다. 너무나 힘들었던 순간도 결국엔 아름다움으로 미화될 것이다. 앞으로의 미래도 결코 다르지 않음을, 우리 모두가 이미 안다.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다. 과거는 멀리 있기에 희극으로 미화된다. 현재도 곧 과거가 되고, 다시 아름다워질 것이다. 조금 더 미리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부기.
1. 지금은 이사를 모두 마치고 이미 새로운 동네에서 잘 지내고 있다. 낯섬도 언젠가는 익숙함으로 채워지고, 또다시 과거로 미화되겠지. 늘 그래 왔듯이.
2. 지금도 가끔씩 예전 동네의 단골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다. 여전히 날 한눈에 알아보시는 주인아주머니가 반가워하며 매번 서비스를 주시곤 한다. 거절하지 않고 남기지 않고 맛있게 다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