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상 폰지사기와 다름없는 전세제도에 대해서 구조적으로 폐지 검토를 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 지 한참이 지났지만, 아직 큰 진전은 없다. 전세사기의 폐해와 전세가 쏘아 올린 부동산 거품에 대해서 모두가 공감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매달 월세를 내는 건 아깝다.
수백, 수천조에 달하는 전세보증금을 어떻게 반환할 거냐, 이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라고 보는 입장도 있다. 그런데 무언갈 하는 것이 어렵다고 손 놓고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하면, 경찰서도, 소방서도, 보건소도 존재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매년 감기 걸리는 거 치료는 왜 받나요?
전세를 놓고 있는 무늬만 집주인들이 전세폐지를 가장 크게 반대하는 이유는 월세 폭등이다. 본인은 월세-전세-매매로 이어지는 주거사다리, 사회의 한 축을 담당하는 연결 역할을 맡고 있는 선량한 임대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공짜'로 거주하게 해주는 거지.
그러면 이렇듯 전세를 놓고 갭투자로 아파트의 소유권을 갖는 집주인은 과연 자선사업가일까? 다들 너무나 착한 사람들이라, 무주택자들이 월세 폭등에 힘들어할까 봐 걱정해서 전세 폐지를 반대하는 것일까? 높은 월세에 고통받는 대신에 본인의 집에서 (2년간 목돈만 맡겨두고) 공짜로 들어와 사세요?
사회가 선의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안다. 전세 폐지를 반대하는 진짜 이유는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 전세 집주인들이 투자에 실패하여 금전적 손해를 보기 때문이라는 것을. 주택을 구매하면 다시 비싸게 되팔아야 하는데, 전세가 없으면 그렇게 하지 못하니깐. 모두가 알지만 쉽사리 꺼내지 못하는 불편한 진실이다.
전세가 없어지면 월세가 폭등한다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미국은 전세가 없으니 월세가 비싸지 않냐? 그리고 전세가 없어지면 (선택지가) 월세로 수요가 쏠려서 월세가 올라간다는 이유이다. 둘 다 틀렸다. 우선 미국은 우리나라와 소득이 다르고 사회 구조가 다르다. 실리콘밸리 따라 한답시고 18평 아파트를 월세 300만원에 내놓으면 과연 계약이 될까? 그 가격에 들어올 임차인이 있을까?
전세가 없어지면 임차인들이 월세로 몰리게 되니 임차인들끼리 경쟁이 붙어서 월세 가격이 올라간다는 얘기는 얼핏 그럴듯하다. 그런데 전세가 폐지되면, 기존에 전세로 내놨던 주택 물건이 어디로 갈까? 전세 제도가 없어지니 아파트도 허물게 될까? 전혀 아니다. 전세'였던' 물건이 매매나 월세로 '바뀐다'.
즉, 월세 수요가 늘어나는 것은 맞지만, 월세 공급도 늘어나는 것이다. 원래 월세로 나오지 않던 매물도 월세로 나오게 되니깐. 물론 전세폐지 초기에는 '급한' 세입자들이 무모하게 높은 월세 계약을 체결할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보이지 않는 손의 원리) 월세 역시도 시장 가격으로 안정화가 된다.
지금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수요/공급 법칙에서 공급은 쏙 빼버리고, 수요만 얘기하는 집단 최면에 걸려있다.
전세는 개인 간 사금융이라서 애초에 제도가 아니고, 현상일 뿐이다,라고 하는 얘기도 있다. 현상을 어떻게 폐지하냐면서.
그런데 개인 간 사금융인 전세에서 전세대출제도는 왜 있고 전세보증보험은 왜 있는 걸까? 분명히 개인 간의 거래, 사금융인데 은행에서 저금리로 대출도 해주고, 국가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에서 보증보험까지 들어준다. 만약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돌려줄 전세반환금이 부족하면 전세퇴거자금 대출까지 해준다.
자동차를 사면 필연적으로 자동차 보험을 든다. 혹시 사고가 날 것을 대비해서 매년 보험료를 내고, 손해가 발생하면 보험사로부터 보장을 받는 것이다. 그것은 민간 보험사가 담당한다.
그런데 세입자가 전세에 들어가면서 혹시나 전세금을 되돌려 받지 못할까 봐 전세보증보험에 들 때는 민간보험사가 아니라 HUG에 간다. 그리고 HUG는 국가에서 운영한다. 그러니깐 바지사장 집주인들이 갭투자 실패하고 파산해서 전세금을 되돌려주지 못하는 상황에선 HUG 가 대신 자기돈으로 돌려줘야 하는데, 자기돈이 부족하면 세금을 써야 하는 것이다. 안 그러면 본인도 같이 파산이다. 즉, 5천만 국민이 십시일반의 자세로 갭투자자들을 보호하고 있는 셈이다. 이쯤 되면 전세 거품은 국가가 이악물고 필사적으로 지켜주는 거라고 볼 수 있다.
과연 이래도 전세가 사금융인 걸까? 실제 현실은, 모두가 전세는 '제도'라고 말하고 있다.
백번 양보해서 전세를 사금융이라고 치고, 완전히 막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사실상 전세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전세금 본연의 취지인 보증금의 개념으로, 전세금을 2년 동안 제삼자가 안전하게 보관했다가 만기에 돌려주는 에스크로 시스템이다. 하지만 전세를 놓는 집주인들은 그것조차도 반대한다. 티X프 처럼 보증금 가지고 자기가 허튼곳에 마구 써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니깐.
전세제도가 부동산 거품을 일으키고 은행과 건설사 먹여 살리는데 일조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크게 반발하지 않는 이유는 모두가 전세의 이해관계에 얽혀있기 때문이다. 세입자는 전세대출받아서 좋은 집 살고 싶고, 집주인은 세입자의 전세금이 있어야 잔금을 치를 수 있으니깐. 일단 집을 샀으면 집값이 오르길 바라기 때문에 지금의 빚더미 사회구조가 유지되길 바라게 된다. 무주택자를 폭락이라고 조롱하면서, 전세 시세 떨어져서 만기에 돌려줄 돈 없으면 배째라고 누워버린다. 전세 없애면 (무주택자 걱정하는 척) 월세 폭등한다고 거품 물고 반대한다.
그래서 요즘은 사람들이 신축 (로또)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면 전세부터 놓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자기가 집을 구매하는데 세입자에게 돈을 빌리는 게 상식이 되었다. 만기에 세입자가 돈 갚아,라고 하면, 다음 세입자 구해와, 하면서 당당하게 큰소리친다.
사회생활을 갭투자로, 전세대출로 빚을 지고 시작하는 게 언제부턴가 당연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만 뒤쳐지니깐. 나만 바보 되니깐. 나 빼고 다들 집으로 돈 버니깐. 이 정도면 사회가 갭투기를 조장하는 거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렇게 기이한 전세 제도 때문에 우리는 막대한 가계부채, 부동산 거품, 주거비 고통, 그리고 바닥을 향해 달려가는 출산율을 그저 손 놓고 지켜보고 있다. 이 모든 일들의 목적은 분명하다. 갭투자자들이 돈 벌어야 되니깐. 출산율 붕괴돼서 나라가 망하든 말든 갭투자자들이 투자 성공해야 하니깐.
만약 농산물 가격이 폭등해서, 삶에 필수적인 밥상물가가 천정부지로 오른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당연히 국가는 농산물 가격안정화 정책을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농산물 '선물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삶의 필수 요소를 가지고 투기하는 그들이 돈을 벌어야 되니깐. 국민들 다수가 고통받건 말건 가격 거품을 걷어내지 않는다. 그것과 현재의 집값 상황이 완전히 같다.
누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고 했던가. 지금 우리는 청년을 위한 나라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