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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포레스트 Apr 06. 2022

영화_ 스펜서

"I'm SPENC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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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틴 스튜어트. 한 명의 배우이기 전에 나에게는 하나의 장르이다. 

크리스틴만이 소화할 수 있는 느낌의 영화들이 있다. 예로 드는 게 퍼스널 쇼퍼. 

영화 자체는 약간의 기괴함과 스산함. 거기에 더해진 크리스틴은 그 자체로 영화였다. 

사실 재밌거나 인생영화로 꼽힐만한 영화는 아니다. 그럼에도 문득 퍼스널 쇼퍼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영화 속의 크리스틴이 보고 싶다. 


이 영화 또한 스틸샷을 보고 기대를 많이 했다. 

크리스틴을 위한 영화구나. 근데 실화를 곁들인.


원래 영화를 알아보고 보는 것을 싫어해서 아무것도 검색하지 않은 채로 봤다.

영국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실화를 담았다는 사실밖에 알지 못하고 그녀의 실제 

비극에 대해서도 찾아보지 않고 보러 갔다. 


처음 보고 나왔을 때의 느낌은 오묘함, 그리고 충격. 

스포가 될 수 있지만 매기의 전하를 사랑해요. 가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이것 또한 실화였을까?

매기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는 한다. 다이애나는 사랑이 필요하다. 

자해를 하는 자신을, 기삿거리로 내던지는 몸을 커튼으로 막을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필요한 건 진실된 대화, 그리고 소통. 

다이애나의 곁에는 사람이 많음에도 그녀는 외로움에 몸부림을 쳤다. 

괴로워하며 아무것도 먹지 못하며 수척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일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어떠냐고 물어봤다. 돌아오는 대답은 "아주 멋있어요!"

미쳐가는 다이애나를 보는 사람은 있어도, 스펜서 집안의 다이애나를 봐줄 사람은 없었다.

그렇기에 매기의 말에 동의는 하지만, 내가 던지는 물음표는 우정도 아닌 본인을 돌봐주는 보모 같은 

존재의 사람이 성애적으로 내비치는 사랑을 그린 의도가 궁금했다. 


나는 원래 무서운 장르의 영화들을 잘 보지 못한다. 공포, 기괴, 귀신, 좀비 등 나를 압박해오는 

장르를 기피하는 편인데, 스펜서를 보고 무서움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렇다고 다른 생각이 들 정도라는

생각을 못하고, 나는 결말에 대한 궁금증으로 친구를 데려가서 영화를 보여줬다. 


친구는 영화를 보는 도중에 귀를 연신 막았으며 지루해 보였다. 그 당시에는 음악이 시끄럽구나,

지루하구나. 하면서 도덕 시간에 지식 e채널같이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는 선생님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끝나고 물어봤을 때의 평은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기괴하고, 스산해.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 나 오늘 악몽 꿀 것 같아. 어떡해?"

그 정도였구나. 시끄러워서 귀를 틀어막은 게 아니었다. 스산한 클래식이 웅장하게 울려대는

그 소리를 참지 못해서 귀를 막은 거였다. 나는 정말로 몰랐다. 이게 그렇게까지 공포감을

주는 영화라는 것을.


사실 내가 이 영화를 퍼스널 쇼퍼와 계속 비교하는 이유가 있다.

퍼스널 쇼퍼 또한 그랬다. 살인과 귀신, 심령물을 곁들인 드라마라는 장르였다. 

스산하고 건조한 회색빛의 영화였는데, 스펜서는 그런 회색빛 바탕에 노란색을 살짝

얹는 영화였다. 


나와 친구는 공통적으로 영화의 결말에 대한 아쉬움이 많았다. 

초반부에 나오는 히스테리적, 미치광이 같은 느낌의 이야기를 풀었는데 마지막은

억지로 행복해지는 결말이라고 생각했다. 본인에게 오는 억압과 기대 그리고 왕세자비라는 호칭에서 벗어나

사랑으로 도닥여줄 사람을 만나고 진심으로 본인을 위해 줄 본인의 자식들과의 행복을 그렸다. 

사실 영화라는 아주 짧은 시간적 제한 아래에서 비극을 보여주고 진실된 행복을 그리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꼭 다이애나의 행복으로 도달했어야 했나 하는 생각도 많았다. 

실제 다이애나의 결말은 본인을 쫓는 파파라치를 피하다가 벽으로 돌진하여 죽었다고 한다.

이러한 실제 결말을 두고 약간의 억지스러운 행복을 그녀에게 가져다준 이유는 무엇일까?



 이 영화의 명장면은 꽤 많은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중에 시그니처는 '달리는' 장면이다. 

왕세자비 다이애나가 스펜서 가문의 마지막 유산인 재킷을 가지러 가는 길에,

구두를 신고 또각또각 걷듯이 뛰는 장면이 제일 처음으로 비교적 긴 시간 동안 보여주고

본인의 행복을 위한 방향을 깨달으면서 어린 시절의 다이애나부터 노란 옷을 입고

달리는 다이애나까지. 높은 구두를 신고 걷는 것이 아니다. 있는 힘껏 부딪히듯 달리는 모습이다. 


여성의 자유에 대한 심벌로 많이 넣는 것 중 하나가 달리기다.

항상 사뿐하게, 가볍게 등의 얘기를 들어오며 치마와 구두를 착용하여 달리기 어려운 상황으로

커가는 여성들이 많다. 그런 편견을 깨부수는 건 달리기이다. 

한 다큐에서 두 성별의 아이들에게 달리기를 시켜보았다. 항상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남자아이들의

경우에는 정말 힘껏 달리는 아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여자아이들 중 다수는 제대로 뛰는 것이 아니라

사뿐사뿐. 머리가 망가질까, 아니면 힘들어서. 등의 이유로 힘껏 달리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이러한 다큐가 나오기 이전에, 스포츠 브랜드인 나이키에서 여성의 자유로 달리기를 넣었다.

'있는 힘껏 달려봐!'라는 슬로건과 함께. 이제는 여성도 운동하길 원했다. 

예전에는 근육 없이 예쁘고 마른 사람들이 여성운동의 표면적인 모습을 했다. 요즘은 건장하고

근육이 많은, 남자와 다른 게 없는 여성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아니 이제야 그런 모습을 할 수 있었다.


감독은 노란색 옷과 달리는 다이애나의 모습을 통해서 자유를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왕실 혹은 귀족 문화에 대한 비판 또한 들어가 있다. 

피의 세습으로 이어지는 왕족. 그들이 희망하지 않아도 왕의 밑에서 아들로 태어나면

당연하듯 왕자로 태어난다. 그 아이는 어미의 몸속에서 수정이 된 그 순간부터 왕자로 살아간다. 

다이애나의 아들들은 왕위를 윈치 않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본인 또래 아이들이 즐기는 '자유'이다.

다이애나가 원하는 자유와는 비슷하듯 다르다. 그 나의 또래의 천진난만함을 원했다. 

내가 무엇을 사용해서 음식을 먹든, 추우면 난방을 틀지 이불을 덮을지 조차 고를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

원초적인 결정쯤은 본인이 하고 싶은 자유를 갈망한다. 이미 차려진 격식이 아니다. 개인의 상황을 원했다. 


또한 3일의 크리스마스 파티에 입장하는 그 순간부터 모든 입장객은 본인들의 몸무게를 재야 했다. 

귀족의 경우에는 장신구가 많았다. 여성의 경우에는 장신구가 몸무게의 절반이라는 말이 전통일 정도로

많이 꾸몄다. 그럼에도 몸무게를 재야 했다. 


다이애나가 말하길 크리스마스를 즐겁게 보냈다는 증거로 3킬로를 찌워야 한다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한다. 

귀족문화가 그렇다. 몸무게마저 본인이 원하는 대로 하지 못했다.

왕실을 벗어던진 그녀는 본인의 아이들을 안고 떠나기 전에 무게를 잰다. 

"그레고리에게 전해주세요. 110kg이라고. 충분히 즐겼다고."

그리고 홀가분한 표정으로 떠났다. 최고급 식재료로 준비한 음식들과 본인을 위해서 만들어지는

음식들을 뒤로하고 그 흔한 KFC를 먹으러 가기 위해 스펜서와 아들들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위해

차를 타고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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