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브런치를 들어오는 기분입니다.
원래 글은 브런치에만 끄적이는게 전부였는데 새로 준비하는 기획도 있고 노션 쓰는 법에 재미를 깨닫고 뉴스레터도 매주 끄적이며 블로그챌린지도 하고 여러가지를 해본 시간들이었습니다.
이번에 SNS를 뜨겁게 달군 영화가 있다. 바로 박찬욱 감독의 신작인 '헤어질 결심'.
개인적으로 봤던 평들은 굉장히 호평이었다. 절절하면서 감성적인 대사들이 굉장히 인상깊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개봉과 동시에 영화티켓값은 전부 올랐고, 영화관보다는 OTT서비스를 이용해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난 시점이었다. (물론 요즘은 OTT로도 안 보고 유튜브로 20분 요약만 본다고 해서 너무 충격적이었다. 세밀한 감정선과 연출들은 싸그리 무시되고 단순 내용 요약을 보는 것 자체를 이해를 하지 못 한다.) 생각한거 보다는 흥행을 못 했지만 각종 SNS에서 입소문을 탄 덕에 막판 스피드로 최저로 잡았던 80만을 돌파했다. 영화 리뷰를 보면 인터넷 속 80% 이상의 사람들은 호평을, 20% 사람들은 혹평을 주었고 현실에서 주변인들에게 물어보면 80%는 혹평을, 20%는 호평을 했다. 나는 이 괴리가 너무 이상했다.
그럼 나는 호평일까? 아니면 혹평일까?
나는 혹평이다. 따로 들어가기에 앞서 한 마디로 요약을 하자면 "절절한 불륜미화"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리 좋게 쳐도 결국엔 박해일과 탕웨이가 한 것은 바람이었고 불륜이었다. 그것만큼은 지울 수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한 명은 직업의식을 버렸고 남은 한 명은 살인을 쉽게 저질렀다.
나아가 요즘은 자극적이고 부적격적인 소재를 아름답게만 꾸민다면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 한다.
다른 예로는 근래에 가장 핫했던 스물다섯 스물하나 라는 드라마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성인과 미자의 관계에 사랑이라는 말은 붙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미성년자가 성인의 성숙함에 사랑에 빠져서 좋아한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이성적인 생각을 가진 성인이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둘 사이에 '서사'가 붙으면 사람들은 아무래도 좋아한다. 그것이 어긋난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지지하고 열광한다.
이번 헤어질 결심 또한 똑같다. 박해일은 굉장히 본인 직업에 빳빳하게 예외를 두지 않고 해결할 때까지 놓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말하는 형사 중 형사다. 그런 박해일이 초반부에 단순히 "예쁘고 젊은" 여자에게 눈길이 가기 시작하면서 본인의 형사적 판단이 흐트러진다. 수사라는 핑계거리로 하루종일 탕웨이를 감시한다. 탕웨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 하고 계속 쳐다보며 상상한다. 그 여자의 곁에 있는 모든 순간을 상상하고 숨결을 느끼고자 한다. 사실 이 부분에서의 연출은 정말 변태같지만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스토리는 정말 쓰레기 중 최악이라고 생각했지만 대사나 연출에서는 깔 수 없는 이유였다.
탕웨이는 젊고 예쁘지만 어찌되었든 외국인이라는 국적 하나가 달라서 박해일이 늘 말하는 "왜 그런 남자들"과 결혼하고 사랑한다. 그게 다른 나라의 국적을 가진 외국인이 한국에서 사는 법이었으니까.
개인적으로 탕웨이가 어쩌다?왜? 박해일에게 빠졌는지는 모르겠다. 고급진 초밥을 시켜주고, 본인에게 예의를 갖춰서 이야기를 할 때 빠진건가? 제법 그럴듯한 남자에 박해일이 속해있다.
박해일과 탕웨이에게는 각자 가정이 있었다. 아이만 없었지 박해일은 주말부부로 살았고, 탕웨이도 남편은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떠밀어 죽은 남편이.
둘 다 피의자와 경찰이라는 핑계 속에서 교감을 나눈다. 피의자를 감시한다는 목적으로 그녀의 집을 바라본다. 확인한다. 기록한다. 그녀가 저녁을 밥 대신 아이스크림을 먹고, 식후에 담배를 핀다는 아주 사적인 부분까지 확인하듯이. 범죄적인 부분이 사랑의 시선으로 교묘하게 감춰진다. 스토킹이다.
탕웨이는 죽음의 약을 핑계로 박해일을 집에 들인다. 저녁이라는 좋은 핑계로 집에 머물 시간이 생기고, 잠이 오지 않는다는 핑계로 두 사람은 숨을 공유한다. 은유적으로 사랑을 나눈 것에 대한 증표였다.
만년 불면증에 시달리던 박해일은 탕웨이의 숨 속에서 잠이 든다. 그녀의 숨결 안에서만 잠들 수 있다.
각자에게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었지만, 둘은 서로가 없으면 살지 못 하는 관계까지 와버렸다. 사랑하기에 조금 더 배려하고 돕고싶어 하는 존재가 되었을 때, 박해일은 알았다. 탕웨이가 진짜 진범이었던 것을.
판단력이 흐려졌다. 138층의 높이의 증거까지 모든 것을 확인했음에도, 탕웨이를 잡는 것이 아닌 탕웨이를 놓아줬다. 본인이 자부하던, 또는 탕웨이가 좋아하던 자신의 모습 중 형사다운 그 모습이 무너졌다.
사랑때문에 판단이 흐려졌고 다 잡은 진범을 놓아줬다. 도망갈 수 있게 문을 열어주고 떠났다. 사랑헸기에.
그렇게 그가 놓아준 그녀는 반성을 했을까? 전혀 아니다. 그를 보겠다는 명목 하에 새로운 남편을 죽였다.
당신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다는 이유에서 또 다른 사람이 죽었다. 이 둘만 피해자인가?
아니다. 탕웨이는 총 4명의 사람을 죽였다. 본인이 원해서 죽음을 택했던 그녀의 엄마와 두번째 남편을 죽인 가해자의 어머니, 그리고 본인들의 원치 않았던 죽음을 맞이한 두 남편. 박해일이 탕웨이가 진범임을 알았을 때 잡았다면 가해자의 어머니와 두번째 남편은 죽음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사람을 죽였다. 또 다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며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그 사랑들이 아름다운가?
심지어 가해자 본인마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고 '아름다운' 자살로 끝을 내렸다.
영원히 그의 머릿 속에서 살고싶은 그녀의 이기적인 자살이었다.
본인을 "깊은 바다에 던졌다. 아무도 찾지 못 하게."
이 영화에 대해 궁금한 점이 정말 많다.
가장 명대사로 꼽히는 것 중 하나가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이 말에 열광한다. 나는 왜 열광하는지 모르겠다.
가정이 있는 남자를 사랑하고 그 가정을 결국엔 파괴시키고 그의 커리어와 자존감을 붕괴시켰다.
물론 상대방도 마음이 있었기에 같이 만든 합작이었지만, 결국엔 같이 가해자였다.
실제로 나쁜 사람인데, 사람들은 저 말이 로맨틱한 명대사라고 칭송한다. 이게 맞는걸까?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살인을 저지르는 영화들은 괜찮냐고 묻는다. 살인이 쉬운거니까.
이 영화는 청소년이 볼 수 있는 15세 관람가의 영화다. 성인이 아닌 아직 미숙한 중고등학생들도
영화관에서 접할 수 있다. 불륜을 또는 금기된 사랑을, 부적합한 수사를.
컨텐츠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예술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가져야 할 경각심이 있다.
그것을 보고 영향을 받는 미숙한 자들이다. 또는 후속 컨텐츠들이다.
아까 예시로 들었던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있다. 여기서는 성인미자 커플을 아름답게 풀어내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고 현실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대놓고 성인과 미자를 소개팅하는 컨텐츠들이 유행하기 시작하고 에타에서는 미자를 만나고 싶다는 글들이 폭주했다. 만들어놓고 해석하기 나름이라며 발을 빼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성인마저도 그런 생각들이 스며들면 판단하기가 어렵다. 극 속 박해일처럼 말이다.
영화를 보는 사람이 아직 성인도 아닌 학생들이라면? 그 학생들이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느낀다면?
영화를,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최소한의 경각심은 가지고 만들길 바란다.
더더욱 이름나고 영향력이 큰 감독이라면.
한줄평 : 부도덕한 관계를, 부적절한 관계를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라고 예쁜 포장지에 감싸서 내놓으면 그게 가슴 아픈 사랑인걸까? 아니다. 범죄미화다.
개인적인 견해이며 사람마다 평은 다를 수 있습니다. 이 영화를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좋은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하나의 해석으로 읽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