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일을 하면 존중받으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이나 한다고 더 무시해"
오랜만에 혼자 영화를 보게 되었다. 할 게 없어서 보러 갔던 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꼭 한 번씩 봐줬으면 좋겠다는 영화가 있어서 바로 보러 갔다.
그건 바로 "다음 소희".
배두나 님이 나온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고 보면 내내 화가 난다는 후기도 들었지만 줄거리는 알아보지 않고 갔다. 아예 내용을 몰라야 몰입이 잘 되는 편이라 정보 없이 영화 보는 것을 즐긴다.
영화는 소희라는 주인공이 춤을 추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영 성공을 하지 못하는 장면들이 반복되며 영화의 시작을 알린다. 아직도 춤과 소희의 연결고리를 찾진 못 했다. 그저 '가족들도 모르는 정말 좋아하는 취미가 있다.' 혹은 '소희가 정말 좋아했던 순간'으로 쓰인 요소인가 싶긴 하지만.
영화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사회적 약자 중에서도 약자들이 살아가는 방식이고 그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담긴 이야기였다. 성인이 아닌 미성년자는 약자다. 혼자서는 선택권도 없는 사회적 약자.
그런 약자들 중에서도 돈도 없고, 인프라가 없는 지방에 사는, 미성년자 학생들이 인력 대체품으로 쓰이는 걸 좋은 말로 바꿔서 현장실습 인턴이라는 말로 둔갑한 노동 착취의 현장의 실태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대기업이라고 소희를 속였지만 현실은 하청의 하청의 하청. 하청 중에서도 맨 마지막에 위치한 그곳. 바로 콜센터다. 콜센터라는 직업 자체는 정신적 노동 강도가 정말 높고, 계속 앉아서만 있는 직업이기 때문에
건강에도 안 좋다. 그런 곳들을 이루고 있는 것은 대부분 여성이다. 어린 여성.
아직 제대로 현실을 알지 못하거나 다른 선택권이 없거나 선택권이라는 것 자체가 없는 여성들이 가는 곳이다. 현장실습생이라는 명목 하에 아이들을 강제로 가두며 정직원과 같은 강도의 실적을 요구받는다.
요즘 뉴스를 틀면 이런 내용들이 자주 나왔다. 실적을 채우지 못해서 죽어나가는 고등학생 실습생들의 이야기가 자꾸만 빈번하게 나오고 있는 게 진짜 현실이다. 소희 또한 그랬다. 상고 중에서도 지방에 위치한 상고.
거기서의 선택지는 없었다. 콜센터에서 일을 해야만 학교의 취업률을 채울 수 있다고. 담임은 자꾸만 소희에게 버티기를 요구한다. 그곳이 제대로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확인하려 하지 않고 취업률을 위해 아직은 보호가 필요한 학생들을 전쟁터로 내몬다. 돌아올 수 없게, 돌아오면 실패자를 만들어버린다.
다음 소희라는 제목은 이 영화와 가장 알맞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말하는 블랙기업의 사장들이 빈번하게 하는 말이 있다.
"여기 너 말고도 일하겠다는 사람 많아." 맞다. 자르고 새로 구하면 그만이다. 우리가 말하는 그런 일이어도
그런 일자리 마저 없어서 자꾸만 자리가 생기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소희가 나간다면 그 자리에 다른 소희가 될 만한 사람을 찾는 것쯤은 쉬운 일이다. 낙오된다면 대체시키면 되는 거다.
소희의 팀장이 죽었다. 자살이었다. 어린 학생들이 고강도의 욕설과 함께 착취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본인의 목숨값으로 유서를 남기고 죽었다. 회사는 묻었고 일하는 직원들에게 유서에 나온 내용을 모른 척하라는 반 강제적 각서를 걷어갔다. 그리고 바로 다른 팀장이 왔다. 팀장 또한 언제든 대체할 수 있는 곳이다. 아이들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바로 다음 콜을 받았다. 소희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해야 한다. 미친 듯이 달려서 동료도 버리고 콜 수를 채웠지만 실습생이라는 명목하에 월급도 적고 바랐던 인센티브마저 '너희 같은 학생들은 금방 그만두기 쉬우니 인센티브는 한두 달 뒤에나 준다.'라는 말을 했다. 한두 달 뒤면 다른 이유들을 대면서 안 줄 것이다. 실습생은, 요구 같은 것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참지 못한 소희는 새로운 팀장을 때리고 무급휴가를 받았다. 정직이었다.
많은 생각을 거쳤지만 다시 출근하기 두려웠던 소희는 결국 깊은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시는 울리지 못할 전화소리와 함께, 그렇게 세상을 등졌다.
이 영화에서 참고해서 보면 좋은 점은, 출근하기 전 소희는 항상 밝고 활기찼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시원하게 욕을 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말을 할 수 있는 아이였다.
하지만 시간이 점차 지나고 죽기 직전 소희의 눈을 보면 희망이 전혀 없다. 살아있지만 죽은 눈을 하고 있는 소희였다. 안광이 사라졌다. 배우분의 연기가 돋보였던 장면이었다. 어떻게 눈동자를 연기할까.
이후의 이야기는 경찰인 유진(배두나)이 소희의 죽음을 파헤치는 장면들로 시작한다.
단순자살인 줄 알았던 사건이, 사실은 현장실습이라는 명목 하에 아이들을 착취한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어른들은 '취업률' 하나에 쉬쉬하며 묻었고 오히려 당당한 태도로 죽은 아이를 탓했다. 항상 밝았던 소희는 죽고 나서 성격이 조금 이상한 학생이 되어 있었다. '그런'학생을 보냈다면서 오히려 학교와 업체들은 서로를 탓했다. 성격이 불안정한 아이를 보내서 죽은 것이다라는 말을 하며 안타까워하기보다는 본인들의 업장에 좋지 못한 소문이 될까 봐 모든 탓을 돌렸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업체는 학교에서 아이를 잘못 보냈다고 한다. 학교는 지방에 있는 학교는 취업률을 채우기 위해 어쩔 수 없다며 시스템 탓을 한다. 취업 담당 장학사는 이 교육부 시스템을 탓한다. 아무도 책임지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 사실에 분노하는 유진에게 장학사는 한 마디 건넨다.
"그래서 이번엔 어디로 찾아가시려고요? 다음은 교육부인가요? 그다음은요?"
모두가 책임을 전가하고 전가한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답이 없다.
일개 지방에 있는 경찰에게는 그런 힘이 없다. 오히려 과한 수사라고 하며 유진을 조여 온다.
"힘든 일을 하면 존중받으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이나 한다고 더 무시해"
이 영화가 주는 많은 말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중에 가장 강력한 말은 이거지 않을까.
다른 나라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나라는 힘든 일일수록 저런 일을 한다고 말한다.
길을 지나가는데 아이의 부모가 아이에게 말한다. '너 공부 안 하면 커서 저런 일 한다.'
과연 '저런'일이 무엇인데, 그들은 본인들이 겪어보지 못한 직업을 비난하는가.
영화 속에서 해결되는 것은 사실 없다. 영화에서라도 해결되길 바라는 사람들이 많다.
남의 이야기를 저 멀리서 보는 것도 견디기 힘든데 그 현장에 있는 학생들은 얼마나 힘들까
성인조차 감내하기 힘든 고통들이다. 영화 속 판타지가 아니다. 인터넷 포털에 '현장실습 자살'
등을 치면 정말 다양한 일터에서 아이들은 죽어간다. 지켜주는 어른도 없는 그곳에서.
이 영화는 우리에게 해결책이 아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간단하게 한 사람의 자살이 아닌, 구조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다 같이 생각해보게 한다. 공권력을 가지고 있는 개인도 어떻게 할 수 없는데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나아가서 해결이 되기는 하는가? 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모은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사소한 무엇도 고쳐지지 않는다. 우리 같은 개개인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은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 개개인이 모이면 큰 파도가 될 수 있다.
다음 소희의 자리가 없어지는 그날까지, 정당한 대우를 받는 그날까지 함께 이야기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