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얼굴 안에 숨은 이야기들.
'사람마다 얼굴이 왜 다 다른 줄 아니? 각자 다 다르게 살라고.' 라는 말이 있어.
영화 소울메이트에 나오는 대사야. 사람마다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이건 다른 삶 중 하나인 이야기야.
1997년 4월의 어느 날. 도시에서 여자아이 하나가 태어났어.
평범한 도시에서 흔한 이름을 가진 여자아이가, 태어난 거지.
엄마와 아빠에게 처음으로 내려진 축복인 아이. 한 가정의 맏이이자 막내로 태어난 외동딸.
양가에서도 첫 손주라 할머니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아이였어
표면적으로는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가정이야.
하지만, 진짜로 그런 가정이었을까? 나는 그 얘기를 해보려고 해.
예쁨만 받는 가정에서 자란 것 같았지만 그 뒤에서 얼마나 파괴적인 삶을 살았는지의 얘기.
1. 단편의 기억들.
(1)
이게 정말로 내 기억인지는 몰라. 나의 머릿속에서 제삼자의 시선에서 보이는 내 모습이 정말로 나의 기억일까? 하는 생각을 해. 너무나 또렷했고 너무 우리 집이었고 그날의 생생함은 아직도 시린 기억으로 남았거든.
커다란 밥상을 차려놓고 가족들은 신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면 그날도
엄마와 할머니의 싸움 속에서 큰 소리로 오가는 얘기들로 인해 집 안은 뒤숭숭했지. 밥상 위에는 소주병이 널려있었고, 안주는 아마도 엄마였겠지. 차마 옆에 있던 아이까지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다소 격분한 상태의 이야기가 들려오다 옆에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찢어지는 아이의 비명소리가 들려.
"으아아아앙~"하는 울음소리. 당황해서 두 사람은 아이에게 시선을 두는데 옆으로 흘러나오는 핏물들은
차마 막지 못했지. 점점 커지는 울음소리와 바닥을 적시는 피. 그다음 장면은 응급실이었지.
다급한 의사들의 목소리와 울고 있는 보호자들, 앓는 소리의 환자들이 어우러져 있는 그곳.
아이는 무사히 수술을 하고 나왔어. 물론 머리에는 아이 몸집에 비해 커다란 수술자국이 남겨 돌아왔지만.
아이의 엄마도 할머니도 속상해하며 서로의 탓을 해. 니 자식 니가 못 챙긴다며, 같이 있었는데 왜 본인에게만 뭐라 그러냐며 서로의 남탓하는 소리가 잠든 아이의 귀에도 들려.
(2)
쿵쿵쿵! 밤 10시에 문을 두들기는 누군가. 집에 혼자 남겨진 아이는 두려움에 떨며 작은 방에 숨어있어. "씨발년아. 안 열어?" 욕지거리와 함께 계속해서 두들기는 낯선 남자. 아이는 바닥을 기어가 인터폰을 찾아. "여기 1303호인데 모르는 사람이 자꾸 문을 두들겨요.." 겁에 질렸지만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최대한
또박또박 말을 이어가고 끊어도 문 밖의 소리는 점점 더 커져. 이제는 손이 아닌 발로 치는지 격해지는 소리.
그러다가 소리가 뚝 끊겨. '간 건가?' 하고 창문을 바라보는데 어둡지만 또렷이 낯선 자의 눈과 마주쳐.
"씨발년, 거기 있잖아. 내가 모를 것 같았어? 당장 열어. 문 따고 죽여버리기 전에." 하며 창문을 뜯을 듯이 흔드는 남자가 너무 무서워 거실로 도망가 이불속에 숨어서 우는 아이. 곧 경비원의 목소리가 복도 끝에서 들리며 남자는 도망쳤지. 하지만 아이는 한참이나 이불속에서 울고 있었어. 아이가 혼자 그런 일을 겪을 때도 아이의 할머니는 누군가와 술을 먹느라 집을 비웠고, 상황은 오롯이 아이가 견뎌야 할 시련이었지.
(3)
또다시 쿵쿵거리는 소리. 비밀번호를 틀렸을 때 나오는 소리가 집을 가득 메워.
"수민아!!! 수민아!!!! 할미다!!! 문 열어!!!!!!"
잘 아는 목소리가 문 밖에 서있다. 아이는 익숙하단 듯이 문을 열어. 문이 열리며 쏟아지듯 넘어진 사람의 몸.
아이는 능숙하게 문을 닫고 현관에 쓰러진 할머니를 온 힘을 다해 이끌어. 팔 하나를 잡고 아주 조금씩이지만
거실로 향한다. 5살 아이가 술 취한 40살의 할머니를 이끌기란 당연히 쉽지 않겠지만, 어쩔 수 없는걸.
아이에게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아. 그렇게 1시간을 할머니를 끄는 데에만 집중했어.
겨우 거실에 할머니를 눕히고 아이는 한숨을 돌려. 쉬기라도 하는 양, 티비를 틀어 좋아하는 프로그램으로 버튼을 눌러. 티비에는 <티미의 못 말리는 수호천사>가 나오고 있어. '나도 저런 수호천사가 곁에 있으면 좋을 거 같은데..'라는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곱게 눕혀뒀던 할머니는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를 잡고
방금까지 먹었던 것들을 전부 게워내. 우욱하는 소리들이 연신 들리고 쿵하는 소리와 함께 정적이 찾아와.
아이는 한숨을 쉬고 다시 화장실 문을 열면, 토하다 말고 술 취해 쓰러진 할머니가 앞에 누워있어.
또다시 익숙한 몸놀림으로 샤워기를 가져와 할머니의 입을 씻기고 다시 화장실에서 끌어내.
'나에게도 수호천사들이 있다면, 나는 다른 가정으로 보내달라고 할 거야.'라는 생각과 함께 불을 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