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Forest Green
Jun 21. 2024
오랜만에 휴식을 갖습니다.
정리되지 않고 머릿속에서 부유하고 있는 많은 것들을
늦게까지 이불속에서 뒤척이며 하나둘씩 짚어보았습니다.
이해한다고, 맞는다고, 그렇지! 하면서 체득한 것들 모두
그저 지적 풍만함에 위안을 둔 위선이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오래전부터 갖고 있던 질문이 있었습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예수님은 내 안에 계시고
사단은 인간처럼 피조물이며
그분은 죄를 조장하지 않으시는 공의로운 분.
그런데
왜 내 안의 그분의 ‘의’는
실존을 위한 나의 ‘죄’에 더 많이
아니 거의 매 순간 왜 그토록 넉 다운되는지?
내 안에 그가 없는 것인지,
있다면 왜 항상 이기지 못하는지.
간간이 책들도 뒤척이고
말씀을 반복해 읽기도 했지만 풀리지 않던
그것이 아주 우문임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왜 지금 이대로 살아있어야 하는지
왜 자신의 노력이 허무한 의인지
왜 자기 부인을 통한 그분의 은혜를 깨달아야 하는지
다말이란 여자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묵시의 완성을 위한 과정.
불의한 창녀로 내려감으로
예수님과 십자가로 향한
하나님의 묵시의 완성을 위한 이야기
창녀가 된 다말?!
분명 그녀에게도 제한적 자유의지가 있었으니
창녀가 된 것도 그녀의 선택이었을 것이고,
만약 그 일이
의로운 그분의 작정 혹은 율법이란 명분을 앞세운
일이었다 한들
그녀의 한평생은
과연 평탄하였을까?
괴롭든 즐겁든, 잘났든 못났든
하나님이 만드신 그릇에 무엇을 담 든
수치를 폭로함으로도 역사할 수 있고
일생 가슴 칠 한을 조장하신다 한들
그분이 만들어주신 인생이란 유기물에
순응하며 항상 감사하게 하는 백성을 만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가 처음엔 좀 너무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순종을 통한 겸손.
나를 낮추고 진정으로
나의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는 그 수치스러운 굴복이 복임을.
그의 백성을 위한 그분의 방편임을.
그리고 그건 피할 수 없는 연단을 위항 고난임을
빈 가방이 가볍고
별 방법 없어 포기한 의지가
복잡한 안생을 평화롭게 하 듯
그로 인해 나를 온전히 그분께 맡김이
평안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날 위해서 꼭 좋은 방법만 쓰시지 않음도 깨닫습니다.
우리가 그의 자녀 됨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
아픈 인생 실족과 실수나 수치를 통해서도라도
그분 백성으로 만들어가시는
사랑과 인내 아픔과 집요함.
그분의 나를 향한 작정을
감히 다 알 순 없지만
한 가지
태어난 이상
이대로의 나로 감사하고
하늘 소망을 바라라는 것.
전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뭔가를 한다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인데
난 제발 예수라는 돌부리에 실족하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서 그저 불편 없이 성공한 사람으로
내 부끄러움 타인에게 들키지 않고 고고하게
살다 가길 바랐었는데.
자석에 달라붙는 철가루처럼
왜 자꾸 저의 영혼이 온통 그분에게만 골똘해하는지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은 나의 어떤 물리적인 완전한 변형이 아니라
질기디 질긴 나의 내적 분열로 인해
그 분과 만날 수 있는 특권을 갖는 은혜를 안 순간
제 머릿속에서는
겨울바람이 불었습니다.
11-01-11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