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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orest Green Dec 07. 2019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여자는....

앞집 여자


하늘 높이 떨어지는 바람의 자락으로 다가오는  
또 다른 느낌의 햇살.
이젠 떠나가는 여름의 등을 인사도 없이 밀어내며
기척도 없이 다가선 또 다른 세상의 체온에
익숙해져야 할  때다.


저녁을 준비하였다. 깨끗이 재료도 씻고

모양도 신경 써서 썰고 조미료는 절대 넣지 않고.
가족들의 건강이 모두 내 손안에 만 있는 듯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정성과 마음을 다해 저녁을 만들었다.
나에게 요리란 정말로 어려운 숙제다. 그러나 결혼 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하는 일이 되었다. 재능이나 미각이 뛰어나진 않지만

여태껏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왔다.

저녁 후 먹을 과일도 접시에 담아 따로 준비해 놓았다.

내가 만든 음식에 좋고 나쁨의 어떤 평가도 없는 남편의 무뚝뚝함은

음식은 주부가 해야 하는 당연한 임무라고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한때는 표현 없는 그의 태도가 영 맘에 들지 않았지만

서로 마음 의지하고, 아이들 키우며, 정답게 살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의 불만은 이렇게 항상 내가 그를 이해하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고

내 불만은 나로 인해 해소되어야 했다.

내 생각을 이야기하지 않고 평생 그렇게 감당할 거란 각오는

시간이 더해 감에 따라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인지하지 못했다.

내가 나를 너무 과대평가했었다. 함께 살아감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서로의 생각이 같아야 한다는 것을 난 간과 하였다.


내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그는 신문을 뒤적였다.

부엌에 있는 내 귀에 숙제는 하였냐는 남편이 아이들에게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 칭얼대다 티브이를 끄고 각자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아이들의 발소리는 안 들렸지만

난 안 봐도, 들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애들과 남편이 먹다 남긴 과일을 입에 넣고 나도 신문을 뒤적거렸다.

미국판과 한국판이 나뉘어 있는 신문의 삼분의 이 정도는 모두 광고였다.

기사를 읽기보다는 광고를 보다 신문을 접었다.

퇴근 후 마켓 안에 있는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려온 테이프가 생각났다.

재미있다며 비디오 가게 사모님이 적극 추천해 주었다.


티브이를 켜서 보니 '앞집 여자'라는 미니시리즈였다.
등장인물들 모두 낯익고 내 또래 아줌마들에 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전개되어서 난 금세 그 드라마에 빠졌다.

그러다 나의 몰입을 깨뜨린 건 갑작스러운 남편의 따가운 꿀밤이었다.
아프지는 안았지만 영문을 몰라 난 고개를 돌려 화난 얼굴로 남편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가 더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혹시 내가 드라마를 보고 있을 때 내가 모르는 다른 일이 있었나를 잠시 생각했다.

남편의 말인 즉, 저런 드라마가 순진한 사람들을 물들이고  
가정을 망치고, 사회를 멍들게 한단다. 저런 드라마들 때문에

아줌마들은 이혼 후에 멋진 사람과 재혼해서 행복하게 살게 될 거란 환상을 갖게 된단다.

그래서 한국의 이혼율이 급속으로 상승하고 있다고 했다.

그보다도 그  드라마에 빠져서 보고 있는 내가 드라마 제작한 사람보다 더 한심하다고 했다.

아이들을 의식한 낮고 작은 목소리였지만 농담으로 하는 말은 분명 아니었다.

난 그런 말을 하는 그가 더 한심했고 그에 대응하는 어떤 말도 못 하고 멍하니

남편 입만 보고 있는 나는 더 바보 같았다.

저 사람이 진짜 내 남편인가를 의심하기도 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하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즐거워서 웃는 웃음이 아니라 너무 기가 막히면 나오는 헛움음이.


그가 말했다.
저 이야기가 말이 되니?  말이 된다 생각하고 보는 거야?
남자는 그렇다 치고 여자가 저러면 안 되지.
세상이 아무리 바뀌었다 해도
여잔 엄연히 여잔데.......
남편의 단순함을 내가 좋아한 것은 사실이지만

픽션인 드라마를 보며 흥분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남자는 어떤 특권을 갖고 태어났기에 남자의 바람은 그렇다고 칠 수 있는 것인가.

어이없이 가만히 듣고 있던 나의 순발력이 아쉬웠다.

남편은 어떻게 저런 구식의 생각으로 이 모던한 사회를 살아가고 있을까 궁금했다.

십 년 이상을 살았지만 알고도 모를 남편의, 또 아내의 마음이라서

부부의 다툼은 안녕할 때까지 계속되는 것일까?

언쟁을 피하기 위해  나는 잘 모르겠다는  말을 하고 이층으로 올라왔지만

내 마음은 한참 동안 그의 견해와 싸우고 있었다.



하나님은 왜 여자를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었을까.

그냥 남자와 똑같이 흙으로 만들었다면

남녀평등 운운할 일이 인류 시초 이래로 없었을 텐데.

누군가 그랬다.

여자가
목뼈로 만들어졌다면  거만했을 것이고
어깨뼈로 만들어졌다면 거들먹거렸을 거라고
턱뼈로 만들어졌다면 말이 너무 많았을 것이고
발의 뼈로 만들어졌다면 밟으려고 했을 것이고
머리뼈로 만들어졌다면 군림하려 했을 것이고
......
그래서 중요한 심장을 보호하는 갈비뼈처럼 가정을 지키고
가지런한 모습처럼 서로 사이좋게 살라고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고.
그의 갈비뼈 일부가 오늘은 편치 않다.


맛있게 차렸던 저녁상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대강 만들 걸, 대강 썰고, 대강 넣고, 대강 섞어서

조미료 팍팍 뿌려 휘 저어 줄 걸.

설거지도 고단한데 종이 접시에 담을 걸.

아니 그냥 햄버거나 사오라 할 걸
정성과 시간까지 들인 흰 접시 위의 색색의 과일도 억울했다.
난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오늘은 확실하게 남편이 틀렸다.


내일 저녁은 알아서 잡수라 해야겠다.

그의 논리라면 어찌 흉하게 여자가 칼을 휘두를 수 있을까.

우아하게 독서나 해야겠다.  

가을 밤바람이 꽤 차갑다.         

 2003-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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