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멸망했으면 좋겠다.

조울증 아니고 그냥

by 새벽숲

약 부작용이라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나는 시간표를 짜고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오래전 책구독에서 받아놓았던 쌓여있는 책들 중에 '장하준의 경제학레시피'를 집어 들어 민생지원금으로 구매한 돋보기를 쓰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의 노안은 6년 전 시작되었다. 시력이 좋은 나는 아주 미세하지만 확실하게 흐릿해진 세상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두려웠다. 안과에 가니 노안이 시작된 건데 시력이 좋았던 사람들이 더 예민하게 받아들인다고 했다. 그 이후 책을 읽거나 컴퓨터 화면을 보거나 재봉을 하는 집중되는 일을 할 때 눈은 뿌연 사물들이 쌓인 오퍼시티 90의 세상을 보여주었다. 거기에 안구건조증이라서 안약을 계속 넣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냥 방치했다. 어제 안경을 맞추며 안경사님께 들었다. 눈을 자주 깜빡이는 이유가 안구가 건조해서 그렇다고 평소에 선글라스나 보호안경을 착용하고 지내야 한다고. 갖고 있던 안경을 밟아서 망가졌는데 그냥 그렇게 살았었다. 그런데 요즘 유독 눈이 뿌옇게 느껴져서 결국 안경집을 찾아갔다.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는 마늘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된다. 난 마늘과 쌈만 있으면 한 끼를 뚝딱하는 사람이다. 생마늘의 알싸함이 주는 자극을 좋아하는 건지 매콤함이 좋은 건지 마늘이 건강에 좋다니까 약 먹는 심정으로 먹는 건지 모르겠지만 마늘쌈을 좋아한다. 책을 집중해서 읽기는 너무 어려운데 집중력이 물론 떨어져서 일수도 있지만 한 문장에서 다양한 생각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다양한 것에서 자극을 받는 나는 드라마에서 부부가 따스하게 안아주는 장면에서 오이소박이가 떠오르고, 장하준의 마늘이야기에서 세상이 멸망했으면 좋겠다는 문장이 떠올랐다. 난 세상이 멸망했으면 좋겠다. 그럼 나의 죽음이 나의 선택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기어코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의지가 남아있는지 확인하고 싶기도 하다. 난 세상이 멸망했으면 좋겠다. 모두가 동등한 입장에 놓여 인간본성만 남아있는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 눈이 뿌연 것과 세상의 멸망을 바라는 것은 약의 부작용일까? 시간이 길어졌다가 어제부터 다시 짧아졌다. 조울증 약 중에 시력을 멀게 하는 약이 있다는데 확인을 해봐야겠다. 난 세상을 살리고 싶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던 나는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화가가 되려는 이유가 나의 그림으로 세상을 더 밝은 곳으로 바꾸고 싶었기 때문이다. 천사 같았던 어린 시절의 나는 매일매일 세상의 평화를 위해 이웃을 위해 나를 괴롭히는 아이들을 위해 기도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 가며 힘든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함을 점점 깨닫게 되어 나의 선한 기도는 점점 줄어들고 힘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정신과 선생님께서 과거를 돌아보며 기록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과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고 하였으므로 현재로 돌아오면 내가 처방받은 약은 바렙톨서방정 아빌리파이정 알프람정 명인트라조돈염산염정이다. 조금씩 양을 증량하는 건지 약이 변경되는 건지 2주마다의 진료에서 처방을 받아온 약은 그때 바로 검색을 해서 약효 및 부작용을 확인하고는 머릿속에서 지운다. 세상이 멸망하는 영화에 빠진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우울기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살인을 너무 즐거운 표정으로 하거나 너무 현실적인 암울한 내용을 담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가까운 미래나 멸망한 지구이야기를 대체로 좋아하고 빠르게 숫자나 문자가 나열되는 장면이 있는 영화도 좋아한다. 테넷이나 매트릭스 리미트리스 인셉션등, 살인하는 영화는 좋아하지 않지만 좀비영화광이다... 인간은 죽이면 안 되니까 마음껏 죽여도 되는 인간이 아닌 존재가 나와 주어서 너무 감사한 것일까. 결국 나는 폭력적인 인간인 것일까. 좀비를 죽이는 장면에서 희열을 느끼는 건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하는 것일까. 그 몸부림을 보면서 반성을 하고 내가 뉘우치기를 깨우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까. 이번 약은 맞지 않는 것 같다. 기분이 좋지 않다.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 것은 날씨의 영향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운동을 일주일간 하지 않아서 인지도 모르겠다. 기분이 좋지 않다. 집은 당장 에어비엔비라도 할 것처럼 깔끔하게 정돈해 놓았다. 근데 한편으로는 당장 죽어도 상관없을 것처럼 정리를 해놓았다. 난 소름이 끼쳤다. 살아가기 위한 정리가 아니라 마무리를 위한 정리였을까? 난 또 모든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걸까? 모두 정리하고 떠나야 할까 세상이 멸망했으면 좋겠다. 나의 사라짐이 정당화될 수 있도록. 언제부터 나는 이토록 나약해졌을까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무언갈 하고 싶다더니 세상이 멸망했으면 좋겠단다. 이거 정신병자 아니고서는 설명이 안되지 않은가? 조율증이 아니라 그냥 미친년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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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