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이기적인 존재다.
타자성이 들끓는 세계에 우연히 내던져진 존재는 낯선 환경에서 생존을 위한 기술을 익혀야 한다. 거기엔 동물적 생존 본능이 앞서기 마련이다. 공동체의 연대와 공감은 이후 사회화 과정을 거치며 습득되는 바, 개인의 성정과 가치관에 따라 다양한 갈래로 나뉘기 마련이다. 어떤 이는 입신양명을 위해, 가문의 영광을 위해 애쓰기도 하고 타인과의 공존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기도 한다. 사회적 존재인 개인은 역사의 흐름에 휩쓸리기도,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이끌기도 한다.
미망과 미욱함은 스스로 택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지각적 판단력이 언제나 옳은 건 아니다. '옳음'에 대한 정의조차 시대와 환경, 개인이 처한 사회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종교적 가치를 세계관으로 삼고자 하는 이는 현실의 가치와 갈등하기도 한다. 지구는 둥글지만 모난 인간 군상은 다양한 얼굴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으로 생존을 도모한다. 길을 모색하는 사람들의 세계관은 충돌하는 국면에서 선악의 이분법에 가까울 정도로 적의와 화해를 드러낸다.
가치관은 보는 것을 믿는 것처럼 즉물적이며 경험적이기도 하지만 보이는 게 언제나 진실은 아니다. 경험도 다 믿을 건 못된다. 진실처럼 보이는 것과 가려진 진실이 틈입할 수 있다. 수전 손택이 말한 것처럼 이미지가 전하는 상상력은 폭발적이라 위험할 수도 있다. 아동 구호 광고에서 재연배우를 쓰는 경우다. 그렇다고 반공이 옳고 태극기가 진리며, 독재자의 향수와 그의 딸을 추종하는 이들의 이상과 가치를 함부로 깎아내리려는 건 아니다. 그들 또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지난한 운명공동체의 역사를 함께 건너온 이들이다. 가난 탈출을 위해 손이 갈퀴가 되도록, 발등이 거북이 등짝이 되도록 주린 배를 붙안고 생존의 격랑을 헤쳐온 이들이다. 우리의 부모 세대가 그랬고, 할머니의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가 그랬다. 상상의 진수성찬보다 눈앞의 한 덩어리 보리밥으로 배를 채웠고, 손에 쥔 죽창이 정의보다 먼저였다.
사상과 이념을 초월한 생존의 갈림에서 살아남으려는 본능은 인간적 욕구다. 욕구 이후의 욕망이 꿈틀거릴 때 이들을 이용한 건 속악한 정권이었다. 공산주의와 빨갱이를 양산하며 반공, 기독, 자유민주를 외치는 정권의 대물림은 폭력의 다른 얼굴이었다. 잘 살아보세와 출세의 욕망은 당위로 자리 잡으며 다른 편을 깔아뭉갰다. 더러운 정권의 염불에 길들여진 축들은 과거를 향수하며 잃어버린 권력을 돌려달라고 핏발 선 눈으로 발광한다. 말 그대로 축생에 다름 아니다. 거짓 선동과 가짜 뉴스는 삶의 양식이며 존재의 생명줄이다. 썩은 동아줄에 불과하지만.
진부한 표현이 되었다 싶을 정도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란 말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결론을 끌어내는 공정한 게임의 기반을 뜻했다. 하지만 선두에서 부추기는 사람은 한쪽이 지는 걸 택한다. 나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핏대 올리며 주장한다. 적의와 혐오, 분노와 증오를 확산한다. 합리적 논증과 이성에 기반한 지각적 판단은 배제되고 더러운 물결과 물결이 섞인다. 그게 큰 강을 이루며 흘러간다. 온갖 잡동사니가 떠가는 장마 통의 붉덩물이다. 집으로 돌아간 그들은 마음을 추스르며 가화만사성과 애국애족을 되뇐다. 근친애적 공생에 몰두한다. 그래서 그들의 국가와 민족은 때론 공허하다.
신종 코로나를 겪으며 바이러스를 차단하기 위한 사회적 거리가 대세다.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거리는 늘 있어 왔다. 자본과 욕망의 바이러스는 이미 모세혈관을 타고 몸과 정신에 두루 퍼졌다. 다행히도 몸과 정신은 면역력을 타고났다. 그러나 정상과 비정상, 장애와 비장애, 다수와 약자의 이분법은 면역으로도 쉬이 고쳐지지 않는 심리적, 실제적 차별이다. 차별적 시선은 물리적인 힘으로 작동해 서로를 갈라놓기에 이른다. 말은 폭력을 내포하기도 한다. '다문화'란 말은 다양한 문화를 포용하기보다 피부색이 검은 동남아인을 뜻하는 차별적 언어가 되었다. 피부색이 흰 서양인을 다문화라고 하진 않는다. 외부의 충격으로도 인간의 정신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이 말은 강인함을 뜻하는 것 같지만 실은 나약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는 것만 믿고 싶은 사람은 모르는 걸 두려워하고 배제한다. 그만큼 변화는 어렵다. 변화가 어려울수록 성장은 동떨어진다. 인문학이 대세라며 전통과 교양으로 뒤발한 지식을 주입한다. 인문학은 전통과 교양과 가까울 수 있으나 등가는 아니다. 우주와 삶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출발하는 게 인문학의 첫걸음이다. 불온한 상상력이 문화와 역사를 이끌었다.
주변의 마을과 자연을 돌아보면 우울하다. 어쩔 수 없이 소 돼지를 키우고 거름을 쏟으며 농사를 짓는다.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산을 갂고 숲을 베어 집과 건물을 짓는다.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에. 은모래가 흐르던 하천엔 껍질만 남은 우렁이가 뒹굴고 시름시름 앓는 물고기는 밑동만 남은 버드나무 그루터기의 그늘을 찾아 숨어든다. 만장처럼 휘날리는 검은 비닐, 농약 냄새와 똥내가 진동하는 들과 강이 현재의 모습이다. 뉴질랜드의 그랜드 워크(Grand walk)를 걷던 청년 '깨끗한 자연을 최대한 즐기려고 노력해요. 그렇지 않은 곳이 어떤지 아니까요'라고 한다. 작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는 「인간의 회복」에서 조심스레 말한다. "‘회복’은 단순히 사고나 질병 이전의 건강한 상태로 되돌아감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지적 장애를 지닌 아들이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괴로운 분’이라고 느끼는 것에서 그는 ‘회복’을 감지한다. 회복할 수 없는 병과 죽음을 향한 노쇠 속에서 “이른 봄의 햇살처럼 짧지만 따스한 회복이 있기에 가족에게 활력이 샘솟는 것이다.”라고. 삶이란 지병처럼 어느 순간 다 나았다고 할 순 없는 것이어서, 늘 짧고 따스한 회복을 바라는 건지도 모른다. 삶도 자연도 그렇다.
바라는 소망이지만, 코로나가 숙지고 일상이 회복된다면 사람들은 집집마다 마스크와 소독제를 박스로 사다 놓고 잠을 잘 거다. 하지만 바이러스는 상존하는 생명 체고 언제든 다른 얼굴로 스며들어 인간을 숙주로 삼을 것이다. 가능하다면 우리 내부의 면역을 키워 이미 침투한 바이러스를 몰아내는 일이 필요하다.
현실주의자란 말의 속내는 이기적이거나 속물적임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허위의 현실을 간파한 인간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역사인식이 현실인식이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사고로 현재를 함부로 재단할 수는 없다. 평론가 김병익은 '아름다움이란 그 대상의 아름다움보다 대상에 대한 인식의 아름다움에서 피어난다'라고 했다. 죽이 되든 고슬고슬한 밥이 되든 함께 머리를 맞대고 두레 밥상에 앉는 게 공통의 길이기 때문이다. 잘 익은 고봉밥이 아니고 선 밥이라도 골고루 나눠먹는 밥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