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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2

by 소인


노인은 아프다.
그리고 고독하며 가난하다. 질병과 고독, 빈곤은 노인의 삼고(三苦)다. 노인을 섬기는 동양문화권에서 한 해라도 일찍 노인이 되고 싶어 40대를 '초로'(初老), 50대를 '중로'(中老), 60대를 '기로'(耆老)라고 했다. 오늘날 수명이 길어지면서 '노인' 대신에 현대적인 표현으로 '실버'(silver)라 칭하곤 한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실버'란 표현을 쓰지 말자는 의견이 있다. 이유는 그 용어가 일본인들이 만들어 사용해오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그레이'(gray)나 '시니어'(senior)로 바꿔 쓰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의 평균수명은 해방 전후에는 사십 대 중반이었다. 1960년 이래 국민소득 수준의 향상, 의학의 발달, 보건위생의 개선 등으로 평균수명이 연장되면서 노인인구가 크게 증가하였다. 1960년 52.4세였던 평균수명은 1988년에는 66.1세에 이르렀고, 65세 이상 노인인구도 1960년 82만 5000명에서 1990년 214만 4000명으로 2.3배 증가하여 전인구의 5.0%에 이르게 되었으며 2009년에는 526만 7000명으로 전인구의 10.6%에 이르게 되었다. (네이버 백과)

기대수명이란 특정 연도에 특정 연령의 사람이 앞으로 생존할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 생존 연수를 말한다. 특히 0세 출생자가 앞으로 생존할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 생존 연수를 ‘기대수명(Life expectancy at birth)’이라고 말하는데, 2017년 현재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82.7세이다.

인구 노령화는 인구 전체에서 차지하는 노년인구(65세 이상 인구)의 비율이 높아가는 현상인데 아시아에서 일본과 한국의 노령화 속도는 증가 추세다. 농촌 인구의 고령화로 앞으로 지도에서 사라지는 마을이 증가할 전망이다.

노인의 삼고 중 하나인 건강 문제는 일반적이나 다 아픈 건 아니다. 칠십 전후로도 여전히 건강을 유지하는 노년도 얼마든지 있다. 이른 정년과 현업에서의 은퇴는 오히려 노인을 생산하고 있으며, 폭력, 성범죄 등 노인 범죄가 늘어나는 현상도 있다. 유교의 영향으로 노인을 공경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으나 계층 간 소통의 불화는 점차 경로 문화를 희박하게 만든다.

노인 세대를 인생 이모작의 기회로 선전하기도 하지만 노인은 구태의 관습을 버리지 못하는 고루한 인식의 '꼰대'라는 젊은 층의 인식도 팽배해 있다. 구부정한 허리, 추레한 입성으로 걷는 노인을 성가신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은 노인을 소외와 배제로 몰아간다. 삶의 지혜와 역사의 굴곡을 헤쳐온 어르신으로서의 대접은 점점 요원해진다. 실은 노인의 바라는 바, 그런 대접이 아니다. 인간으로서 실존에 대한 인정이다. 그러려면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의식주에 대한 기반이 우선이다. 개인이 살아온 편차는 있겠지만 노인은 가족을 이끌고 자식의 교육과 결혼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국가는 사회 복지 중 노인 복지에 대한 다각도의 서비스를 실천하고 있다. 재원 마련은 현재의 생산인구가 담당하는데 인구 감소의 추세와 맞물려 어려움이 예상된다. 노인은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했지만 이제는 짐이 되고 있다. 심리적으로야 한창이지만, 물리적 사회적으로 인식하는 나이는 다르다. 내 경우 오십 대 후반에 실업급여를 받으며 구직 활동을 했을 때 간간이 업체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나이가 6이라는 숫자로 넘어가면서 두 번째 구직 활동을 할 때 연락해온 업체는 약속한 듯이 한 군데도 없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도 같은 경력과 자격증이면 오십 대, 사십 대의 젊은 구직자를 선호하리란 거다. 매체에서 아무리 노인 취업을 선전해도 실상은 단기 계약과 낮은 급여의 열악한 일자리가 태반이다. 만 65세가 되어 노령연금을 받는 시기가 되면 거의 뒷방 신세로 물러 앉는 게 현실이다. 어떤 소설 속의 얘기지만 칠십 세 넘은 노인 중 생산 활동에 기여하지 못하고 연금을 축내는 칠십 이상의 노인을 추적, 암살하는 줄거리는 섬뜩한 느낌이었다. 인간을 생산과 비생산의 존재로 갈라 제거하는 사회 체제와 오래전 고려장의 풍습과 다른 게 무엇일까.

사회 문제에서 비판적 사고와 논리 없이 휩쓸리는 틀딱충, 꼰대, 태극기 어버이의 존재는 노인 스스로 자신을 폄하하는 기회를 만든 것이기도 하다. 자동차면허증을 반납하거나 일정 나이가 되어 스스로 집필을 접는 노인의 상황은 육체적 심리적으로 정상적 기능의 저하를 인정한 결과일 것이다. 자율신경 기능이 떨어져 밥을 흘리거나 자기도 모르게 입이 벌어져 침을 흘리는 동작은 노인에게 흔한 현상이다. 피부는 늘어지고 주름진 얼굴에 가물해진 시력과 청력, 오래된 기억은 또렷하게 남지만 그마저도 편집되고 각색되어 내 경험인지 남의 일인지 헛갈린다. 어제오늘의 일은 금세 까먹고 예전에 능숙하게 하던 일도 순서를 잊기가 일쑤다.

아프지 않고 삼시 세끼 걱정 없이 가족과 어울려 편안한 죽음을 맞을 수 있는 건 복 중의 지복이다. 그것도 자신의 의지대로 된다는 보장은 없다. 인생의 의미를 스스로 성찰하고 지혜롭게 말년을 장식하는 노년이 몇이나 될까. 울증과 조증을 오가며 아기처럼 잠만 자는 장모를 보며 존재로서의 인간을 생각한다. 내 기분에 따라 장모를 대하기도 했다. 추석인 오늘 오가며 장모와 즐거운 대화를 꿰었다. 잔디 위에 나란히 의자에 앉아서 부쩍 늘어난 가을 하늘의 촐뱅이(잠자리)를 함께 올려다본다. 장모의 추억을 들으며 땅거미 덮이는 저녁 한때를 보낸다. 노인들이여, 인생을 즐기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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