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에서 혼자 깬 적이 있다.
모두 세 번이었다. 째거나 뚫어서 꿰매면 아무는 병이었다. 아킬레스건 파열과 어깨 인대 파열, 파상풍. 모두 죽을병은 아니었다. 일하다 다친 거였다. 장미 가시에 찔린 시인 릴케는 파상풍으로 죽었다. 다치면 몸으로 밥을 버는 사람에게는 고통보다 밥이 치명적이다. 예전과 달라 의료보험과 사보험의 덕을 좀 보았다. 잊어버릴 수 없을 것 같던 병실 벽의 하얀 공허도 퇴원 후 며칠 지나면 가뭇해졌다. 엉덩이를 끌며 김을 매고 목발을 짚고 가지를 쳤다.
서서히 회복하면서 두 발로 걷게 되면 겸허하게 땅을 딛고 다니리라던 마음도 덩달아 식어갔다. 다리와 어깨, 사지는 흔들며 살아야 꿀도 얻고 밥도 얻는다. 걷거나 수저로 밥을 먹는 행위는 일반인에게는 공기와도 같은 것이어서 평소엔 고마움을 모르고 산다. 무쩍무쩍 자라는 벼를 보며 탈곡할 때를 가늠하던 들판에 비바람이 쓸고 벼가 넘어지면 농부는 그때야 낙망하며 부러진 벼의 종아리를 묶어 일으켜 세운다. 누구나 불운을 미리 점 칠 순 없다. 생의 행불행은 순전히 우연이어서 예단하거나 대비할 수 없는 것이다. 닥치면 수습하거나 버티는 거다. 삶은 시련을 이겨내거나 해서 의미를 짓는 게 아니다. 자연은 이겨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버텨내는 것, 버텨내서 끝까지 가는 것이다.
개인의 불운과 국가에 속한 인민 대중의 불운을 생각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의 근현대사는 불운의 연속이었다. 굶고 매 맞고 다치고 죽는 상황은 국가의 명암과 함께 고스란히 민중의 몫이었다. 위정자, 기회주의자, 암묵적 공범자들은 약탈자들과 함께 민중의 적이었다. 저항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여서 맥없이 무너지곤 했지만 끈질기게 저항했다. 앞에서 싸운 사람과 함께 최대의 피해는 저항할 힘조차 없는 민중이었다. 징병•징용과 군 위안부로 동아시아와 중국 대륙, 남아시아에 걸쳐 한반도를 중심으로 끌려갔다. 사할린으로 징용 간 광부들 중 다수가 다시 일본 큐슈로 끌려갔다. 이중 징용이다. 오키나와로 끌려간 '군부'라 불리던 노동자 중 다수가 굶어 죽거나 미군의 총알받이로 죽었다. 본섬과 달리 오키나와는 미군이 점령하면서 한국인 위안부는 일군과 미군에게 시달리며 죽어갔다. 살아남은 일부의 군부와 위안부는 무국적자가 되어 남방의 해안을 떠돌며 풀뿌리를 캐먹었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남북 분단이 되자 오키나와의 한인은 불가시화의 존재로 떨어지고 말았다. 사할린의 한인들은 오도 가도 못하고 북방의 섬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그뿐 아니다. 나라 안에서 벌어진 잔혹한 제노사이드. 제주 4•3과 여수 사태, 보도연맹원 학살과 전쟁 중 터진 국민방위군 사건은 인민의 생명권을 똥 친 막대기쯤으로 보는 위정자의 생리를 역겨울 정도로 똑똑히 보여주었다. 사백 만의 사망자를 낸 동족 간의 전쟁으로 냉전의 패권국가는 힘의 균형을 이루고 한반도는 쪼개졌다. 수많은 인명을 파리처럼 때려죽인 건 아이러니하게도 물성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였다. 흑과 백의 이분법으로 이편에 서지 못하면 죽어나갔다. 전장이 뒤바뀌며 내편 네 편이었던 사람들이 서로 죽이고 죽었다. 신이 보았다면 두 눈을 찌르고 통곡했으리라.
진보나 보수나 도덕을 기준으로 양심을 재단하는 게 옳은 일은 아닐 수도 있다. 진영의 구성원은 개인이고 개인은 인간의 속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실은 진보도 보수도 색이 바랜 옷을 입어서 구별이 난감하다. 역사 이래로 인간은 이념과 제도 아래 자신의 삶을 구현했다. 인간의 능력으로 궁구 할 수 있는 사상이란 상상 이상으로 위험했고 도전이었다. 지배자는 단단한 성을 쌓고 불순분자를 제거했지만 성벽은 무너지고 공동체는 이상을 향해 피 흘리며 나아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의 가치 지향과는 별개로 '수신제가'의 가족 근친애적 결속은 신념과 가치를 초월하기도 한다. 공정을 내세운 합목적의 신념도 근친 앞에서는 모래처럼 쓸려간다. 문제는 진영 안팎에서 그것을 눈감아준다는 것이다. 모르고 한 일이든 범죄임에도.
검찰 사태를 보면서 느낀 건 조직폭력 단체와 별반 차이가 없는 검찰 조직의 생리와 여야가 다를 게 없는 근친 공생애의 관계에선 멀미를 넘어 인간 환멸에 다다른다. 입장 차이인가. 입장에 따라서 어제와 오늘의 신념이 바뀐다면 인간은 무엇을 신뢰할 수 있는가. 자연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 숲의 모습, 산과 강, 하늘과 바다의 모습으로서의 자연 말이다. 근대로부터 산업이 발전하면서 우리를 둘러싼 자연은 탈취의 대상이었다. 오죽하면 '처녀지'란 말 생겼겠나. 순수함 그대로의 처녀를 상징하는 자연을 파헤치고 깎아내 자원을 약탈했다. 심지어 산악인은 고봉을 정복 대상으로 삼았다. 개척정신은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쟁탈의 철학이었다. 약수 마시러 오르는 동네 뒷산마저 사람의 발길에 신음한다.
자식들 중 하나는 그런대로 밥벌이하고 하나는 아직도 원조 중이다. 무탈하게 제 앞가림하길 바랄 뿐이다. 나아가 사회가 노소를 막론하고 제가끔의 밥벌이에 인간다움을 잃지 않길 기대하는 것이다. 불합리한 구조가 깨지고 벗겨져 삶의 고통이 덜어지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세상은 가뭇한 안개 속이다. 제도와 욕망이 한쪽으로 기울어 인간 소외의 사나운 바람이 몰아치는 느낌이다. 정치, 경제, 사회가 인간 소외로 표류하고 있다. 군사독재에 저항한 민주 세력의 기류는 시대를 넘어 분배와 노동의 가치에 몰입하다 길을 잃고 갈팡질팡이다. 양심과 신념의 난기류에서 헤매는 중이다. 옳고 그름의 시비 이후의 몰가치가 가치로 격상된다. 능력과 효율을 강조한 결과 성과 이외의 가치는 무의미로 전락했다.
우리는 일상 속에 있다.
불가해한 현대의 상황도 과거엔 가늠할 수 없던 미래였다. 머리에 전쟁의 공포를 이고 사는 일상은 반평화의 일상이지만 실은 사는 게 매일 치르는 전쟁이다. 돈과 치르는 전투. 만족을 모르는 눈먼 욕망의 노예가 되어 서로를 질투하고 감시하는 무한 전장이다. 그럼에도 개인은 살아간다. 공동체의 지향이 전면적으로 무너지거나 하루아침에 사람이 하이에나의 본색을 드러내지 않는 까닭이다. 부러 꾸밈으로 자신을 숨기고 인간은 웃고 떠들며 밥을 먹고 술을 마신다. 만일 미래를 본다거나 본심을 알아채는 투시경이 있다면. 광장에 모여든 사람들이 바라는 건 양심의 복원일까. 한편에선 죽기까지 감춘다. 인류 역사에 법이 만들어진 건 고대 부족국가부터지만, 법을 만든 원리는 인간 양심이었다. 지역과 풍습에 따라 관습법이 차차 성문법으로 발전했지만 원리는 양심이었다. 물론 그때도 계급의 차별은 엄존했다. 여성, 흑인이 투표에 참여한 건 불과 백 년 전 일이다.
배추밭에 갔다.
밭을 빌려준 주인과 배추를 나누기로 했다. 작은 무씨에서 싹이 돋고 잎을 키우는 광경은 언제 봐도 신비롭다. 비가 잦은 올 가을, 두 번의 태풍에도 내륙의 마을은 평온했다. 들판의 벼가 전장의 병사처럼 우수수 쓰러지긴 했다. 쪽파가 굵어지자 파김치를 담았다. 질긴 갈볕 탓인지 유난히 맵다. 겉절이 담으려 뽑은 배추 속에서 진딧물이 나왔다. 혹시나 해서 바로 옆의 포기를 뽑았다. 역시 진딧물은 없다. 고온다습이 진딧물 발생의 적정 환경이다. 해도 대발생은 하지 않았다. 배추밭 전체에서 서너 포기 나올까. 운이 나빴을 뿐이다. 지금은 결구가 되어 약을 쳐도 소용없다. 푸른 치마로 감싸고 노란 금빛 속곳으로 꽁꽁 싸맨 속으로 약물이 침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이 들수록 운은 나빠진다. 건강해지거나 부자가 되거나 이름을 날릴 수도 없다. 우연으로 태어나서 희로애락 애오욕을 경험하고 별 바람 햇볕과 도시의 먼지와 숲의 정기를 흠뻑 마시고 살았던 건 수억 분의 일의 행운이다. 재수 없는 소리라도 고통은 존재의 현현이다. 요즘 사람은 거의 병원에서 죽음을 겪고 삶과 이별한다. 죽음을 체험한 사람은 없다. 죽는 순간 모든 것의 절멸이다.
난 어디쯤 가고 있는가.
포르투갈 해안에 둥지 튼 송두율 교수의 칼럼을 오랜만에 읽는다. 자연 회복의 논조였지만 많이 지친 듯 보였다. 받아주지 않는 나라를 마음에서 접은 걸까. 그렇진 않다. 안에서 밖을 떠도는 그를 보는 나의 시선이 너무 감상적이다. 그는 여전히 서늘한 각성의 청년이다. 분단에의 뜨거운 고찰이 속으로 타들어가 파랗게 끓는 지중해에서 다리 쉼을 할 뿐이다. 내 길은 게으르고 둔한 먼지만 폴폴 피어나는 황톳길이다. 그럼에도 나의 현재를 아끼고 보듬는다. 진영으로 갈려 존재론적 관계에 몰입하는 길에서 관계론적 존재를 생각한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존재다. 분단된 나라의 현실도, 더럽혀진 산하도, 인간이 소외된 노동으로 죽어나가는 노동자도 따로가 아닌 각성. 사람의 길에서 사람 아닌 것들과의 관계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