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파괴적이며 또한 생산적인 동물이다. 봄날 장에 나온 묘목들이 그걸 알려준다. 한쪽에선 숲을 허물고 산을 깎아 인간의 영토를 넓힌다. 수백 년 영화를 누리던 숲은 짧은 신음과 함께 사라진다. 메두사의 머리처럼 끊어지면 살아나는 뱀이 아니라 생명감각을 잃어버린 뿌리가 후줄근히 드러난 채 마지막 숨을 할딱인다. 한 쪽에선 나무 상인이 내다논 묘목을 고르느라 바쁘다. 이름표를 단 가느단 묘목은 싼값이거나 바가지를 쓰고 집 주변의 땅에 심는다. 나무는 땅에 뿌리를 내리면서 환경과 보이지 않는 갈등을 겪는다. 나중에 보면 몇 나무는 살아남고 몇은 뿌리째 말라죽는다. 땅에 물기가 없어서가 아니다. 외려 습기가 너무 많거나 아니면 나무 스스로 삶을 포기한 거다.
인간은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조정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건 아마도 자연과학의 발달이 부추긴 바 크다. 엄혹하고 냉정한, 때로는 무한한 자애를 지닌 신과의 거리는 그렇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기계와 시장을 믿고 물질을 숭배하더니 인간의 이성도 주파수를 맞추면 깨끗한 음질로 변하는 낡은 라디오처럼 인간의 이성도 조율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자연과학은 물론 여타 인문과학의 영역에서도 인간의 무지는 태어날 때와 비슷한 상태의 황무지란 사실이다. 유한한 시간의 삶에서 평생 동안 하나의 깨달음을 남기고 간 선인의 흔적을 줍더라도 자신의 바구니에 다 담아내진 못할 거다. 이럴 때면 "아르스 롱가, 비타 브레비스.(Ars longa, vita brevis.)"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는 말이 실감난다.
예술 창작을 배우고 철학서를 탐독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한 편의 창작물로 내밀하고 높은 반열에 올리고픈 욕망을 지녔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시는 그의 현생애를 관통하는 질료요, 무기이며 휴식이고 안식이다. 내가 보기에 그는 머뭇거리는 중이다. 터져나올 듯한 고백의 영감을 애써 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직도 명확하게 정립된 것이 없다고 믿는 탓이다. 그건 지나친 겸손이거나 완전한 창작에의 집착이다. 미완성의 틈새가 숭숭 드러나 소문과 공기와 원성과 비난이 통하는 창작물인들 자신과 동떨어진 객체일 순 없다. 살아온 것처럼 완벽함에 대한 칭송과 기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외려 더 탄탄한 창작의 길을 걸을 수 있다. 화살나무는 화살의 모양을 띄었으되 한 치도 날아가지 못한다. 다만 매년 한 뼘씩 공중으로 화살의 키를 세울 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나무를 화살이라고 부르는 데 망설이지 않는다. 그는 푸른 열매다. 완전히 익지 않은 채 가지에 붙어 있는. 병이 든 반점이 있거나 벌레나 새가 쫀 흔적이 보일 수도 있다. 주변이 꽉 막힌 골짜기라면 태풍에 버틸 힘 있는 열매일 수도 있고 성부르게 떨어져 풀 위에서 시간과 습기의 발효로 인해 서서히 썩어갈 수도 있다. 변화와 변형은 운명의 본질이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의 정물화 주제는 인생의 덧없음이었다. 당시의 네덜란드는 상선으로 중국을 비롯한 세계 각처의 부를 끌어모으던 시기였다. 썩어가는 사과, 떠 있는 비누방울 조차 무의미한 삶의 순간을 암시한다. 사과에 앉은 파리는 썩을 과일의 운명을 예고한다. 멈춘 비누방울과 이슬, 사과와 위에 앉은 파리는 사백 년이 지난 지금도 순간에 멈춰 있다. 그렇게 보일 뿐이다.
나무 또한 생산적이며 파괴적이다. 산불은 나무를 매개로 확대되며 번진다. 산불 발생의 구 할은 인간의 실수지만 거기에도 파괴와 생산이 반복된다. 마치 불이 난 검은 산에 새로 나무를 심는 것처럼 인간은 전쟁으로 파괴된 문명의 폐허에 집을 짓고 샘을 판다. 수목은 고정된 장소에서 생을 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도 부단히 움직이고 이동한다. 인간의 시계와 인식체계가 다른 때문이다. 나무는 종자를 바람에 날려 영토를 확장하고 끝없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실은 나무나 인간이나 생물학적인 자아에서 멀리 벗어나진 못한다. 불타버린 폐허에 양치식물이 돋아나고 도토리가 떨어져 상수리숲을 이룬다. 숲의 천이다. 성급한 인간만이 산에 올라 자신들이 원하는 숲을 그리며 어린 나무를 여기저기 꽂는다.
인간이 지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시기로 들어섰다는 뜻에서 현세를 ‘인류세’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지구의 관점으로 볼 때, 인간을 다른 종보다 우위에 두어야 할 이유는 없다. 노자는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는 섬뜩한 말을 남겼다. 자연에는 인간적인 어짊이 없다는 뜻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악의를 품지 않는다. 스스로 그런한 것처럼 자연은 생성과 사멸을 반복한다. 인간은 자연을 재단하고 정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화석연료의 사용과 문명의 발전은 기후변동과 자연재해를 불렀다. 바이러스와 가축병의 창궐에도 인간은 허둥대며 대책을 양산한다. 인간의 오만은 끝을 모르고 앞만 보고 내달린다. 나무와 공생하려는 자세는 나무를 대상으로 보지 않고 동등한 반열의 생물종으로 인식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