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

by 소인


회사를 제외하고 어느 조직에서 일하든 중간은 갔다.
일의 숙련도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나이를 말함이다. 산에서 일할 때는 막내 아니면 끝에서 두 번째였는데 선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바다에서 그물을 당길 때도 그랬다. 선배들은 후배들을 생각해주고 배려했다. 닮고 싶은 선배가 있는가 하면 꼴도 보기 싫은 선배도 있었다. 해가 갈수록 나이는 절로 먹고 자꾸 위로 올라갔다. 내가 선참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자연스레 말이나 행동거지를 삼가게 되고 신참들을 바라보았다.

어쩌다 계곡에서 일하게 됐는데 내가 좌상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 선참들은 일에서 물러났거나 세상을 떴다. 좌상이라고 해서 나이대접을 받는다든가 하는 건 아니다. 일에서 만큼은 젊은 사람에 뒤지지 않고 늙은 티를 낼 것도 없고 그렇다고 알아주지 않는다. 나이를 떠나 같은 동료일 뿐이다. 다만 쉬는 시간에 나누는 대화에서 그들의 입장을 헤아려 말하는 버릇이 생겼다. 열정이 앞서던 시절엔 주의 주장을 꼿꼿이 세웠지만 나이 드니 반드시 옳은 방법이 아니란 걸 깨달은 거다. 설혹 실패가 보여도 나서지 말고 바라보는 거다. 젊은 나이엔 실패에서 배우는 것이 있고 실패를 되돌릴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선 얕은 개울을 건너 속리(俗理)를 넘어선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겠으나, 살아온 경험이 다르니 매번 같은 항수로 대입할 순 없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내가 저들보다 뛰어난 면이 있는 것도 아니니 나도 저들의 말을 들으며 같이 생각하는 것뿐이다. 많은 경험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성찰과 깨달음에 이르는 건 아니다. 미욱하게도 나는 아직도 자잘한 일상에서조차 갈등과 번민을 되풀이한다. 인간 존재로서 '지식의 습득이 아닌' 앎의 온도를 재는 저울이 있다면 타인과 나의 차이는 백지장만큼도 못 될 것이다.

사람마다 사고의 폭이 다르고 상황에 대한 지각의 인식체계가 다르니 그것을 인정하는 선에서 대화가 가능할 거다. 말은 사람의 생각과 가치이고 대화의 요체는 주고받음이다. 자기의 생각에 몰입해 자기 말만 던지고 상대의 반응이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을 본다. 들리지 않는 게 아니라 독해가 불가능한 경우를 주로 본다. 그럴 땐 벽을 보고 얘기하는 느낌을 받는다. 대화는 단절되고 각자의 생각에서 머문다. 가십거리를 얘기하다가도 사안에 대한 상대의 생각을 물으면 남도 다 아는 뻔한 얘기를 앵무새처럼 따라 하거나 입을 닫는다. 자기중심의 사고가 없는 거다. 어쩌다 태어나 밥벌이를 하면서 인간은 세상을 보는 시각을 지니고 산다. 자신의 삶을 사는 사람은 사유도 주체적이다. 그러나 세상의 습속에 머무른 사람은 남의 생각을 좇거나 흉내 낸다. 그런 사람에게 창의적인 상상력을 기대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런 사람에게 전복적인 인식의 계기는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다.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고 자신의 생을 사는 데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없다면 홀로 핀 야생화처럼 사는 것이다. (야생화를 무시하는 건 아니다) 제 얼굴에 만족하고 기꺼워 도락으로 삼는 데 무슨 간섭이냐 하겠지만 구르는 돌멩이 하나에도 사연이 있고 풀 한 포기, 나무 한그루에도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는 역사가 있다. 하물며 인간임에랴 물어 뭣 하는가.

나도 언젠가는 일에서 떠날 때가 올 거다. 프로야구를 가끔 보는 이유 중 하나도 젊은 패기와 열정으로 그라운드를 누비는 저들의 활어 같이 펄펄 뛰는 동작을 보기 위함이다. 특히 꼴찌 팀의 도약을 응원한다. 보는 것만으로도 즐기는 경지가 되었으니 나도 꼰대가 되었나. 꼰대의 책임과 의무가 있다면 그에 따른 권리 또한 있을 터. 움직일 수 있을 때 사고하고 겸허하게 즐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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