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by 소인

杂文 (258)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자주 내린다.
실은 계절을 끌어당기는 건 무한한 시간의 반복이지 누가 무엇을 이유를 가지고 하는 행위는 아니다. 북반구 중 사계절이 뚜렷한 곳에 사는 사람이 느끼는 자연의 변화일 뿐이다. 건기와 우기를 제외하고 지루한 계절이 반복되는 대륙의 사람들도 건기와 우기, 햇볕의 강도와 바람의 세기에 따라 자연의 변화를 느끼며 살아왔을 것이다. 자연의 변화는 무한한 영속성을 띤다는 면에서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시선에서 본다면 거대 담론의 충분한 질료가 되고도 남겠다. 우주와 자연. 그 안에서 인류는 과거 수만 년의 DNA를 기억하고 이어 붙이며 오늘에 이른 것이다. 거창할 것도 사소할 것도 없이 지나치기 쉬운 이런 생각은 잠시 멈춰 서서 곱씹을 만한 사유의 재료이기도 하다.

빗소리에 깨어 연사흘 마신 숙취로 머리가 조금 아팠으며 오늘부터 오후 출근(遲番)이라 야간 근무조인 다음 주까지 이 주간 술을 마실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밤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마당에 나가 그제 손봐두었던 빗물 홈통을 관찰했다. 양철 지붕에서 모인 빗물이 홈통 따라 찔끔대며 아래로 흐르고 있다. 이만하면 성공이다. 담배를 물고 수리업자에게 재작업을 지시했던 대문 밖 지붕 근처를 올려다봤다. 역시 뚫린 구멍으로 빗물이 스며 담장이 젖어 있었다. 책장의 모서리 접듯 투명 라이트를 잘라 구멍을 막는 작업을 하리라 맘먹는다. 비가 머춤해지면 출근 전에 끝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아침 먹고 도서관에 갔다.
희망도서 다케다 다이준의「반짝이끼」를 포함해 네 권을 반납하고 세 권을 빌렸다. 야간 근무까지의 읽을거리를 장만한 셈이다. 겨울날 땔감을 쌓아놓은 기분이지만 실제로 다음 주엔 보일러 기름도 일 년 치 도지를 내야 한다. 자잘한 일상을 그때그때 미루지 않고 해치우는 게 다음 일의 순서에도 좋다. 고약한 성벽이라 할 일을 두곤 맘이 편치 않다. 그래서 늘 마무리가 서툴고 거칠다. 그건 글쓰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급하게 쓰고 서둘러 퇴고하는 통에 나중에 보면 설익은 문장 투성이다. 간혹 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오해 살 만한 문장도 꽤나 생산되는 법이다. 요컨대 문장의 오류는 사유의 미혹함이기도 한데 사유의 미숙함을 문장으로 덮어씌우려한 데서 파생되는 얕은 수작이라는 걸 단박에 알아차릴 뿐이다.

위로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동안 쌓아놓은 척독(尺牘)을 천천히 읽는 일이다. '짧은 편지'라는 척독은 독서일기의 일종인데 읽은 책에서 옮겨올 만한 문장을 발췌한 거다. 절망을 숨기고 희망의 전언만을 능사로 여기는 처세의 달콤한 노력을 중시하는 진부한 아포리즘과는 다른 질감이 느껴진다. 좋은 작가의 잘 쓴 문장은 시대를 뛰어넘어 묵직한 울림을 준다. 구조적인 현실의 절망을 인식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의식은 청동 기와의 서슬 퍼런 녹처럼 빛난다. 짧은 인용은 독서의 맥락을 따라 이해하지 않으면 자칫 난해할 수도 있지만, 만약 출처의 책을 찾아 읽는 독자가 있다면 소중한 노고에 고개를 숙일 일이다. 유교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젖어 인간에 위계를 매긴 세상의 가치와는 뿌리부터 다른 고결한 성품임을 믿기 때문이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인터넷 쇼핑을 살핀다.
두 달여 전동 킥보드와 전기자전거 사이를 헤맨다. 주행거리와 등판능력 등을 비교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뒤바뀐다. 재작년처럼 다리의 근육으로 자전거 여행을 하기엔 한계에 달했다. 그래서 차로 이동해서 지역을 전동 킥보드로 돌아보는 것과 아예 처음부터 전기자전거로 여행을 나서는 걸 비교하며 머리를 쥐어짠다. 걷기와 자전거가 힘들어지니 여행조차 탈것에 의존하게 되었다. 동계 침낭을 마련해 일인용 텐트로 비박하는 여행은 무리일까. 끼니와 목욕, 핸드폰 충전과 탈것의 충전... 이런 것들에서 자유롭지 못한 여행을 꿈꾼다는 건 얼마나 우스운 상황일까. 괴나리봇짐에 죽장을 들고 떠나는 여행은 과거의 모습일까. 기차를 타고 금강산 여행을 갔던 선대의 추억이 부럽긴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역사의 상황은 녹록지 않다. 스무 살 무렵 자전거를 타고 포항에서 영월까지 올라갔다. 남한 땅을 무른 메주 밟듯 돌아다닐 때는 농가에서 밥을 얻어먹기도 했고 나뭇가지 주워 불 피워 강물에 국수를 씻어 먹기도 했다. 집과 학교, 어디서도 불만으로 가득했던 자의식에 떠밀려 역맛살을 무기로 돌아다녔다. 살만큼 산 뒤 세상의 풍경을 보는 일은 무엇이 다를까. 풍경의 겉과 속을 들여다보는 일은 즐겁지만 않다. 모든 것이 변했기 때문이다.

당직실에서 새벽 네 시에 깼다.
눈을 뜨니 온통 캄캄한 어둠 속에 창문 밖의 풍경이 어슴프레 비쳤다. 일이 초 동안 여기가 집인지 다른 덴 지 헛갈렸지만 이내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사무실 밖의 외등에 반사되어 거미줄처럼 앙상한 나뭇가지가 비쳤고 구부정한 소의 잔등처럼 산의 실루엣이 병풍처럼 펼쳐졌다. 도로 자도 되련만 자칫 꿈속에서 개라도 만나면 교대자가 문을 두드려 깨우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엎드려 폰을 열어 보다 얼굴을 씻고 이불을 개어놓고 당직실을 나왔다. 싸늘한 새벽 공기의 어둠이 얼굴을 감싼다. 계곡으로 오르는 길은 어둠에 묻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무실 포트의 스위치를 켜고 TV 전원을 눌렀다. 밤새 온풍기가 데운 사무실 공기는 후텁할 정도로 훈훈하다. 어제 새벽의 기온은 영하 8도까지 떨어졌는데 오늘은 영하 삼도다. 뜨거운 물에 데어본 사람처럼 오늘 새벽의 공기는 섬뜩한 느낌이 한결 덜했다.

커피를 타고 폰의 앱을 열어 일본어 공부를 한다. 지난 이월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했지만 앞줄로 나아갈수록 까먹는 뒷줄은 매일같이 산처럼 쌓일 뿐이다. 그래도 알게 모르게 남는 흔적이라도 기대할 요량을 바라는 것 밖에. 예전엔 암기라면 뒤지지 않았는데 나이 들수록 기억력도 감퇴된다. 간밤에 본 드라마 장면도 제목도 정전된 것처럼 까먹을 때가 많다. 암전 된 방에 불이 켜지고 사물이 환하게 눈 안에 들어오는 것처럼 다시 보아야 비로소 전날의 줄거리가 조금씩 떠오르는 거다. 기억과 망각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면 인간은 뇌는 터지거나 활동을 멈출 것이다. 하지만 끝내 되살아나는 기억은 자극과 충격의 크기와 비례하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다.

지금에야 곰곰 되새기며 생각하게 되는 건 좌절이나 실패, 절망의 기억보다 타인에게 입힌 상처나 고통의 기억으로 괴로울 때가 많다. 현재에서는 도저히 상상하거나 실행에 옮기지 못했을 행위나 언설을 과도하고 유치한 열정에 들떠 천둥벌거숭이처럼 남발하고 다녔던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가족에게조차 발설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과거는 실은 지금의 존재 증명이다. 살을 비비고 사는 아내에게도 희미한 기억의 부스러기만을 조금 흘렸을 뿐 인간의 근원적인 부끄러움을 무릅쓰지 못한 건 무덤까지 끌고 갈 내밀한 고백이다. 신의 판결과 천국과 지옥의 실재를 사는 동안 믿지 않게 되었는데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죽음 이후 무덤 속의 판관에게 가서야 토설할 일이다. 그만큼 난 태생으로나 삶에 있어서 늘 떳떳지 못하다.

눈빛이 형형하던 시절에는 남 앞에 나서기 좋아하고 유명해지고 싶은 충동이 있었으나 지금은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고 싶다. 타인의 시선을 받는 것과 삶의 의미를 깨닫는 일은 먼 관계의 일이었다. 세상의 기준을 따라 산다는 건 속화된 욕망을 좇는 일일 뿐이란 걸 나이 들면서 깨달았다. '아 Q'의 정신 승리와도 닮은 의식은 실은 세상의 기준에서 뒤처진 루저가 아니라 자신을 초월하는 행위라고 믿는다. 현실인식이란 현실의 속내를 간파하고자 하는 초월 의식에 다름 아니고 수십 억 지구 상의 인간은 숫자만큼이나 행복의 종류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구조를 혁파하거나 인류애의 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위대한 사상의 소유자는 못 될지언정 시류를 따라 부나방처럼 살다 가기엔 하나뿐인 생명을 지닌 존재의 허망과 진중함에 부끄러움이 앞선다. 그래서 책을 읽고 척독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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