杂文 (265)
영하 19도.
완전 무장하고 집 나섰다. 여섯 시 반을 넘어가는 시간인데 사위는 여태껏 어두컴하다. 빌라 앞 외등이 차가운 빛을 내며 얼어붙었다. 몇 발자국 걸었을 뿐인데 냉기가 걸음을 붙잡는다. 박스에서 솜바지를 찾아 입고 상의는 두툼한 솜을 넣은 파카를 입었다. 몽골 양모로 짠 비니 모자를 쓰고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비니 모자는 멀리 사는 여자가 몽골 여행을 다녀와서 선물로 주었다. 얇은 것과 두꺼운 거 두 개인데 얇은 모자는 구멍이 나 너덜 해지도록 쓴다. 파카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니 얼굴 빼고 찬기운은 차단되었다. 내복 입은 솜바지가 한기를 막기엔 역부족이다. 겨울 라이딩 용으로 산 털 벙어리장갑을 올해는 요긴하게 쓴다. 털 장화도 같이 샀다. 파카 주머니엔 스마트폰과 커피 보온병을 넣었다. 토요일이라 빌라 주차장의 차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다. 빌라 지나 골목을 내려가는데 큰길에 가기 전에 드러난 얼굴이 얼기 시작한다. 바람만 불었어도 도로 집으로 뛰어가 누빔 바지로 갈아입을 텐데 바람이 없어 내친걸음으로 큰길로 나갔다.
강추위와 얽힌 오만가지 기억이 하나둘 떠오른다. 어릴 적 강원도서 잠시 초등학교 다닐 때 친구들 몇은 한겨울에도 맨발로 뛰어다녔다. 까마귀가 형님 할 정도로 새까만 손발은 갈라 터져 피가 맺혔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무쩍무쩍 자랐다. 아버지가 부대에서 빼낸 바셀린을 밤마다 형제들이 돌아가며 손등에 문질렀다. 서울에 살 땐 얼음낚시도 많이 다녔다. 두껍게 언 저수지 위에서 구멍을 뚫고 지렁이를 단 바늘을 내렸다. 낚싯줄에 물이 얼어 얼음이 주렁주렁 달렸다. 한낮에도 떨어지는 기온에 얼음이 팽창되어 쩌렁쩌렁 금을 내며 울었다. 강릉에서 한겨울에 아파트 공사장 알바로 아침부터 쇠기둥을 날랐다. 차가운 쇠를 만지자 장갑 낀 손은 금세 마비되었다. 새벽에 먹은 밥알이 뱃속에서 곤두선 채 데굴데굴 굴렀다. 시골 내려와 간벌작업을 하느라 눈 쌓인 계곡을 허연 입김을 토하며 쏘다녔다. 숯가마에 다닐 땐 낡은 트럭의 시동이 자주 꺼졌다. 러시아 치타 같은 혹한 지역의 차들은 연료의 옥탄가도 다르지만 한파에 약한 온대의 차들은 곧잘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멈추기 일쑤였다. 절해고도(絶海孤島)나 혹한 지역은 사람이 살기 힘들다. 그래서 그런 지역은 예부터 죄수의 유형지로 이용했다. 명나라 율법의 최고형인 삼천리에 미치지 못하는 조선 땅에서는 돌고 돌아 삼천리를 채웠다. 정약용의 둘째 형 정약전은 완도의 신지도에서 다시 흑산도로 건너갔다. 거기서 자산어보를 썼다. 요즘 같으면 소가 하품할 얘기다. 또라이 트럼프가 쫓겨나면 태극기 부대는 바이든에게 충성을 맹세할 건가. 그들이 원하는 건 '미제면 똥도 좋다'니까 두고 볼 일이다.
편의점 불빛을 의지해 마스크를 꼈다. 마스크 하나 쓰는 데도 절차가 복잡했다. 파카 모자를 벗기고 비니 모자를 벗는다. 안경을 벗고야 귀에 마스크를 건다. 역순으로 한 다음에야 마스크를 쓰지만 안경알에 서리는 김은 막아낼 도리가 없다. 차라리 안경을 벗는 게 시야가 깨끗하다. 내성천 고수부지로 내려가는데 어둠 속에서 청소차가 나와 읍사무소 골목으로 들어간다. 청소부 두 사람이 꽁무니에 위태하게 매달렸다. 차가 달릴 때 잡은 난간이 미끄러우면 어쩔까 싶다. 사실 읍내 청소업체는 사장 아들의 갑질로 견디지 못해 퇴사한 청소부가 퇴사 후 일주일 만에 죽었다. 울며불며 딸이 청와대 게시판에 청원을 올리고 경찰이 수사한 끝에 악덕 사장의 갑질 아들은 구속됐다. 민주노총의 조합을 만들었단 이유로 상시 욕질에다 왕따 근무로 괴롭혔으니 당사자와 가족의 고통이 자심했을 거다. 밥벌이에 쫓겨 어용노조에 가입해 침묵했던 동료들의 고충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그런 걸로 부당노동행위를 당하고 급기야 병을 얻어 죽는다는 걸 이해해선 안 된다. 중대재해기업 처벌법의 처리를 보면서 가진 자들의 기득권의 논리가 얼마나 부당하고 공허한 지는 많은 국민이 보았을 거다. 노동자의 죽음과 자신들의 죽음을 같은 저울에 달지 않는다. 대중의 고통에 공감의 상상력이 작동하지 않는 무리에게 기댈 희망은 없다. 부딪치고 깨져서라도 대중이 만들어가는 사회가 제대로의 사회다. 읍내에서 청소차를 볼 때마다 사장 아들이 떠올라 시선이 곱지 않다. 하지만 오늘같이 추운 날 청소부의 노고가 고맙다. 코로나 이후 사회는 필수 노동자들의 노동으로 굴러간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집배원 택배노동자 돌봄 노동자 경비원 간호 인력 청소원 등 필수 노동자의 처우는 아무리 나아져도 지나침이 없다. 누군가 이불속에서 계산기 두드릴 때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얼음판을 달린다.
고수부지 공원에 가자 희붐하게 동이 튼다. 너무 추운 날은 그 많던 산책인도 보이지 않는다. 일찍 깨서 똑별나게 나온 내 행색이 유난스럽다. 다리에선 냉기가 퍼져 후둘거린다. 마트 열 시간인 여덟 시까지는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 더 걷기엔 체온 저하를 몸이 견디지 못할 것 같다. 이런 기온에 동계 캠핑을 한다고. 얼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주문한 중국산 텐트는 배를 타지도 않았다. 걸음을 돌려 집 쪽으로 걸어갔다. 읍사무소 뒷길 지나 큰길 건너려는데 길 한복판에 고양이 사체가 널브러졌다. 이런...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렸지만 재빠르게도 상태를 보고 말았다. 얼룩이는 길바닥에 피를 묻히고 엎드려 죽었다. 간밤에 등털을 곤두세우고 노려보던 그의 세상은 떠났다. 저승에서 안식하길. 아까 본 청소차가 치울까. 집으로 가는 동안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시동 건 차가 보였다. 공터 하우스에 세워둔 차의 시동을 걸었다. 옆집 아저씨가 암으로 죽고 쓰지 않는 하우스는 찢어진 비닐이 펄럭거려 흉가처럼 되었다. 빌라 옆 산 밑에 주로 대는데 요즘은 차가 늘어 빠듯해서 폐가 하우스를 자주 이용한다. 그나마 시골 읍내라 그렇지 도시 같으면 이웃과 멱살을 잡거나 돈 내고 주차장을 빌릴 판이다. 마트에 불 켜자마자 들어가 부추와 흰떡을 안고 나왔다. 소읍 거리에 그제야 사람들이 하나둘 보인다. 버스 차부 앞에 택시 기사들이 자판기에 모여 종이컵을 홀짝인다.
식탁에 부추와 흰떡을 내려놓고 이불속에 들어간다. 스위치를 켜자 침대보 아래의 전기요가 열 받기 시작한다. 뜨끈한 요에 배를 깔고 어제 도서관 달력과 함께 빌린 칼릴 지브란의 우화 시집 「어느 광인의 이야기」와 울프 스타르크의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험」, 그리고 조윤제가 쓴「다산의 마지막 습관」을 머리맡에 놓고 돌아가며 조금씩 읽는다. 마치 내가 미친 사람처럼 자유를 얻거나 축구 클럽에 다니는 손자와 몰래 병원을 탈출하여 배를 타는 괴상한 성격의 할아버지처럼 말이다. 또는 십구 년의 유배지에서 돌아와 자신의 생을 수습하는 다산의 심정이 되어 말랑한 성품이 되어보곤 한다. 한 권의 책을 읽고 나서 세상을 다 아는 게 아니라면 결코 서두를 건 없다. 병독(竝讀)은 나의 취향이긴 한데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하는 산만한 버릇이기도 하다. 문장이나 챕터를 읽고 나서 다른 일을 하면서 읽은 부분을 곱씹어 되새기는 건 책을 쓴 작가의 의도에 한 발짝 다가가는 것이기도 하다. 문장에 빠진 나머지 단숨에 읽어치운 책은 나중에 가서 아무리 기억을 되살리려고 해도 떠오르지 않을 때가 많다. 심지어 제목조차 생각나지 않아서 도서관의 서가에서 전에 빌렸던 책을 다시 뽑는 경우도 여러 번이었다. 그래서 독서일기 대신 '척독(尺牘)'을 쓰는 버릇을 들인 게 소중하게 되었다. 척독은 리뷰 대신 인상 깊은 문장을 옮겨 쓴 건데, 나중 주제별로 모아 책으로 꾸며도 좋을 거다. 흔해빠진 덕담이나 진부한 희망을 강요하는 아포리즘이 아니라 늘 떠 마시는 시원한 우물물과도 같은 맛이다. 목구멍을 타고 가슴을 적시는 물은 때론 섬뜩한 감동으로 여운을 남기고 혈관을 따라 심장으로 파고든다. 아내가 부른다. 만두 재료를 섞어 만두를 만들 차례다. 만두 빚는 속도는 현재까지 우리집에서 내가 제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