杂文 (268)
두 사람
'우리도 보다 세밀한 전략 전술로 저들에게 돈이라도 받을 건 받아내야 한다'라고 마치 한층 세련된 견해인 양 말하는 모습을 보고 가슴속이 하얗게 질렸다. '돈으로 역사를 무질러 버리는 건 안됩니다. 굽은 역사의 진실을 바로 세우는 건 보상으로써의 타협으론 결국 아무것도 얻는 게 아닙니다. 대법원의 위안부 할머니 배상 판결 역시 일본의 공식 사죄가 뒤따라야 한다는 질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일은 전후 칠십 년이 지나도록 틈만 나면 지난 과오를 사죄합니다. 다시는 인류사에 불행한 실수를 되풀이 말자는 다짐입니다.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지요'. 난 대답을 차단하기라도 하듯 물 흐르듯 지껄였다. 무슨 이따위 말을 천연덕스레 해대는 해설사라니. 대체 문화해설사 교육은 어떤 내용으로 짜여 있길래 보상 운운하는 걸 당연하단 식으로 지껄이는 걸까.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와 일본의 평화헌법 개헌의 속내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돌아서 이층 전시관으로 올라갔다.
다시 추워진다는 예보를 들으며 남쪽으로 차를 몰았다. 한낮은 봄 날씨 같았다. 질주하는 차들이 마치 나들이 가는 차로만 보인다. 목적하는 장소를 찾아가는 덴 내비게이션이 최고다. 예전엔 물어물어 길을 갔다. 요즘은 땅끝까지 네비 하나면 집 앞까지 데려다준다. 집중하고 네비 아가씨의 목소리에 따르면 만사 오케이다. 그런데 네비를 켜지 않으면 아는 길도 문제가 생긴다. 도로표지판을 독해하는 능력이 갈수록 감퇴된다. 급기야 빠지는 길을 지나쳐 돌아가는 길로 내처 달리고 만다. 어차피 하행선이니 내려가다 고속도로 IC가 나타나면 타면 된다. 시간은 좀 더 걸린다. 이런 경우가 자주 생기다 도로 한가운데서 멈칫거리게 되면 운전대를 놓기로 다짐한다. 길눈 밝기로 이력이 났었는데 이젠 점점 길치가 되어간다. 일상에서도 사고에서도 어긋난 행보를 거듭하면 치매 이리라. 어쩌랴. 모든 걸 오래 써먹었다.
다부동 전적지를 둘러보고 달성 우록리의 '김충선 유적지'에 갔다.
백선엽과 김충선.
삼백오십 년의 시차를 두고 존재했던 두 인물의 차이는 무엇일까. 역사라는 무대에서 발휘되는 인간의 의지는 무엇을 연유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인가. 객관적 시대 상황은 인간의 의지에 어떻게 작용하는가. 게다가 같은 상황과 비슷한 의지라고 하더라도 각자에게 미치는 우연성을 놓고 본다면 어느 쪽이 저울의 무게가 더 나갈까. 혼란한 막부 시대를 통일한 정권이 들어선 16세기 말 일본의 상황과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타력의 해방 후에 찾아온 전쟁의 상황. 시대 상황은 두 사람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와카야마(和歌山)에서 태어난 김충선(1571~1642. 일본명 沙可也)은 도요토미 히데요시(風臣秀吉)가 전국을 통일하면서 가문의 비극을 겪는다. 유교의 나라 중국을 섬기는 조선을 흠모한 그는 일본의 조선 침략을 야만성에 근거한 섬나라의 일탈 행위로 보았다. 부산 상륙 후 며칠 만에 동조한 부하 오백 명을 이끌고 투항한다. 일본의 입장에서 그는 반역자였다. 선조 임금에게 성과 이름을 하사 받은 김충선은 66세의 노구에도 조정의 부름에 답하여 전장에 나섰다. 개인의 의지에 의한 선택은 삶의 방향을 바꾼다. 전쟁을 피하려 한 김충선은 조선의 백성으로 살면서 나라의 명을 거스르지 못했다. 시대 공간의 상황이었지만 김충선의 인류애는 조선에 한했다. 그런 그도 떠나온 고향에 대한 아픈 마음을 술회한다.
백선엽(1920~2020)은 식민지 시기 평안도에서 태어난다. 사범학교를 나와 잠시 교사 생활을 하지만 그는 본래 꿈이었던 군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박정희와 닮았다. 박정희도 교사를 때려치우고 군인의 길로 들어선다. 일제강점기 때 청년들의 이상은 무엇이었을까. 독립을 위해 국내에서 타국에서 몸을 던지는 독립군의 소식은 익히 들었을 터. 하지만 백선엽과 박정희는 일제의 군문에 들어감으로써 출세와 입신양명을 도모한다. 박정희의 모친은 수원 백 씨 28 세손이다. 백선엽은 27 세손이었는데 그것이 인연이었는지 몰라도 박정희가 숙군 과정에서 무기징역을 당하자 백선엽이 구해주었다. 군사 쿠데타 후 박정희는 백선엽을 외국 주재 대사, 교통부 장관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다부동전투에서 한국군 1사단장으로 북한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백선엽은 생전에 전쟁 회고록을 다수 썼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간도 특설대 전력을 인정할 뿐, 반성이나 사죄는 하지 않았다. '그땐 어쩔 수 없었다'는 논리다. 지리산 공비토벌 때에는 견벽청야(堅壁淸野)라는 간도 특설대 시절의 전술을 써서 빨치산에 협조한 마을의 인민을 학살하고 집을 불태웠다. 백선엽은 “당시 지리산은 소비에트 지구였다. 대한민국 안에 있는 공산 지구였으며, 누구도 여길 들어가지 못했다. 그래서 (공산) 주력을 여기서 떼어내어야만 했다. 나라가 위급한데 할 수 없었다. 이해해줘야 한다”라고 함으로써 토벌 과정에서의 민간인 피해를 불가피한 것으로 인식했다. 시민단체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전현충원 묘역에 누웠다. 백선엽과 박정희 두 사람은 나란히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독일 나치스 친위대 중령이며 국가안보 경찰본부 유대인 담당 과장과 유대인 이주국 책임자인 이차대전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은,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월급을 받으면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라고 진술했다. 그는 내적인 갈등 없이 관료주의의 효율을 위해 기술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유태인의 재산을 빼앗고 수용소로 보내는 정책을 제안하고 서명한 아이히만은 조국의 명령에 성실히 일했을 뿐이라고 했다. 그는 인간을 학살하는 범죄에 대해 도덕적으로 사유하지 않는 죄를 저질렀다. 그의 죄는 '생각하지 않은 죄'였다. '악의 평범성'은 교수형에 처해졌으나 현재도 타인에 대한 상상력이 결핍된 평범한 얼굴의 악은 계속 생산되고 있다.
나의 큰아버지 중 한 분은 비행조종사가 꿈이었던 식민지 소년이었다. 태평양전쟁 때 비행학교에 들어갔다. 전우들은 카미카제가 되어 미 전함에 폭탄을 안고 떨어졌고 그는 전쟁 막바지 대공포의 공격으로 현해탄의 고기밥이 되어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비록 자신은 산화(散華)되어 몸은 가루가 될지언정 조국(일본)에 몸 바친 멋진 파일럿으로 이름이 남지 않겠냐는 자부심이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일본말을 배우며 자란 세대에게 조국은 일본이었고 자랑스러운 황국신민으로 죽고 사는 것이 이상이요 꿈이었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해 갑종간부후보생으로 소위 계급장을 달았다. 구국의 전쟁에 참가하여 자유민주 수호를 위해 싸운 아버지는 전투 때 입은 상처를 자랑스러워했다. 구한말 의병의 가문에서는 한일병탄 후 독립을 위해 짐을 싸고 만주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시인 이육사는 외가인 허 씨 가문에서 유독 많은 의병장을 배출했다. 그도 중국을 오가며 의열단 단장 김원봉이 교장이었던 베이징 군사학교에서 간부 훈련을 받았다. 그는 1944년 1월, 17번 째로 체포되어 베이징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했다. 어릴 적부터 보고 들은 대로 학습한 것이 꿈이고 이상이 되는 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사고는 럭비공처럼 방향을 모른다. 같은 샘물을 먹고도 소는 우유를 내지만 뱀은 독을 뿜지 않는가. 우리의 꿈은 무엇인가. 우리 부모들의 이상은 무엇이었을까. 가난 탈출과 입신양명의 안온한 삶이 전부였을까. 나의 이상은 과연 무엇인가.
'내가 들개에게 길을 비켜줄 수 있는 겸양을
보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정면으로 달려드는 표범을
겁내서는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내 길을 사랑할 뿐이오. 그렇소이다.
내 길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은 나 자신에
희생을 요구하는 노력이오.
이래서 나는 내 기백을 키우고 길러서
금강심(金剛心)에서 나오는 내 시를 쓸지언정
유언은 쓰지 않겠소.
다만 나에게는 행동의 연속만이 있을 따름이오.
행동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 시를 생각한다는 것도
행동이 되는 까닭이오.'
이육사 수필 「계절의 오행」(1938)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