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맞은 터울로 비가 내렸다. 한 해의 농사를 가늠하는 강우는 농사 전과 작물의 생육기에 내리면 단비를 넘어 꿀비다. 한창 자랄 나이에 음식의 고른 섭생이 신체 발육에 관계하 듯이 식물도 그러하다. 파종 이식기에 가물을 타다 지난 뒤 비가 왕창 내려도 이미 왕성한 생육기를 지난 작물은 굶은 사람이 급하게 밥을 먹다 체하는 것처럼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땅거죽이 쫙쫙 갈라지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가뭄 뒤의 홍수는 콩 싹도 남기지 않고 쓸어버리기 십상이다. 예전 농부는 이팝나무 꽃을 보고 풍년을 점쳤다. 푸지게 고봉밥을 담은 것처럼 꽃밥이 풍성하면 대풍을 기대했다. 적당한 물기를 빨아올려 수목이 잘 자란다면 농사도 잘 되리란 기대가 높아진다는 거다.
감염목 무단이동 단속초소 근무를 시작한 지 이주 째다. 봄철 조경수 등 수목 이동이 빈번할 시기인데 나무 실은 차는 안 보이고 공사차량, 사료차가 바쁘게 오간다. 재선충병 감염목을 무단 이동하는 걸 적발하는 것과 반출증을 끊어 굴취•벌채한 소나무를 확인한다. 무단 이동할 만큼 간 큰 나무 업자는 없다. 아래께 내린 비로 젖었던 땅이 마르자 길에선 금세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초소 건너편 산 아래 밭에선 며칠째 굴삭기가 땅을 고르고 있다. 밭주인은 장비 옆에 종일 붙어 서서 일을 감시하고 아낙은 때마다 참을 나른다. 굴삭기는 구멍 난 삽으로 흙을 퍼다 돌을 골라 버리고 밭에 뿌린다. 걷어낸 흙이 쌓이면 덤프트럭이 궁둥이를 대고 흙을 실어 내 간다. 붕붕 대며 굴삭기가 움직일 때마다 기름한 산밭이 편평하게 꼴이 난다. 밭주인은 가생이로 떨어진 돌을 주워 개울로 던진다. 돌망태로 둑을 채운 개울 바닥엔 가운데로 가느단 물길이 났다. 말끔하게 단장된 둑엔 풀 한 포기 나지 않고 물가에 휘늘어진 버드나무 한 그루 없다. 물속에 살던 것들은 떠내려 갔거나 모래 속에 묻혔다. 개울에 산 것들의 기척은 죄다 사라졌다. 생명의 단절이다. 이런 짓들을 인간은 예사로 한다.
단속원은 이인 일조다. 도로 양쪽을 쳐다보며 나무 실은 차량을 세워 '생산확인표'를 확인하고 단속한다. 한쪽만 보면 가자미 눈이 되기 십상이라 하루 간격으로 자리를 바꿔 근무한다. 눈을 쓰는 일이라 근무 중에 책을 보거나 휴대폰을 들여다볼 수 없다. 잠깐 사이 나무 차량이 지나가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단속 근무를 시작하면서 무선 이어폰을 갖고 나갔다. 음악을 듣거나 유튜브 강의를 듣는다. 오전과 오후 두 꼭지 정도 듣는데, 책 한 권 읽는 분량과 맞먹는다. 강의를 듣고 나서 음악을 듣거나 동료와 대화를 나누며 강의 내용을 머릿속으로 곱새긴다. 듣는 분야는 주로 철학과 역사 분야다. 요즘 도올 선생과 한홍구 교수의 강의를 듣는데, 도올의 강의는 고전과 현대의 사상과 역사를 넘나 든다. 그는 방대한 학문적 정보에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한 교수는 박사논문을 김일성 평전으로 썼는데 근현대사에 박식하다. 역사적 사건과 인물의 깨알 같은 기억력에 놀라곤 한다. 최근에 수염을 깎았는데 그는 여전히 동안이다. 외국어 공부를 위해 장만한 무선 이어폰의 효용가치가 이렇게 요긴할 줄은 몰랐다. 집에 돌아가서 실상 책을 오래 읽지 못한다. 반주에 불콰한 얼굴로 책을 편 채 잠들기 일쑤다. 자다 보면 곰돌이가 옆에 누워 활개 펴고 코를 곤다.
오늘은 여덟 시에 출근했다. 월요일 도서관이 쉬는 날이라 읽던 책의 진행에 맞춰 점찍어둔 책을 여섯 시 전에 가서 대출할 요량이다. 근무시간은 한 시간 범위에서 탄력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점심을 먹고 교대로 한 시간씩 차에서 쉬었다. 동료는 길 건너에서 오르내리며 걷기 운동하며 길을 살핀다. 나도 초소 밖에 나온다. 걷기보다 길 양쪽이 보이는 논길 초입에서 좌우를 번갈아 본다. 오래 걸으면 밤에 아픈 다리가 쑤신다. 논둑에는 금잔디가 꽃다지가 퍼져 불붙은 듯 초록으로 빛난다.
읍에서 안동으로 내려가는 길은 일 키로 전방이 보이는 데 반해, 안동서 읍으로 가는 길은 가시거리가 이백 미터 남짓이다. 읍에서 내려오는 트럭이 아슴프레 나타났다. 사료 포대를 잔뜩 실은 것처럼 보인다. 굽잇길로 사라졌다 나타나니 나무를 잔뜩 실었다. 앗, 물 만난 고기처럼 눈이 번쩍 커진다. 걷던 동료도 화들짝 몸 돌려 신호봉을 흔들며 트럭을 세우느라 뛰어간다. 좌우를 살피며 길을 건넜다. 트럭은 순한 양처럼 길가에 정차했다. 기사는 고개를 내밀고 종이를 꺼내 보인다. 폰카를 찍으며 가까이 가니 운전수는 이미 반출증을 문 옆에 펼쳐 보이는 중이다. 번호판을 찍고 트럭을 보냈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트럭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동료와 나는 마주 보며 웃었다. 감염목 무단이동 단속초소 근무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밥값을 한 날이었다. 묘한 설렘이 일었다.생산확인표를 보니 울진 죽변에서 벌채한 3,40년 생 소나무를 예천의 목재소로 운반하는 중이었다. 짭조름한 해풍 맞고 자란 소나무의 운명이다. 초소에 돌아와 근무일지에 단속 내용을 반갑게 써넣었다.
감염목 무단이동 단속초소 근무원은 나무를 싣고 통과하는 차량을 단속한다. 솔수염 하늘소를 숙주로 번지는 재선충병은 소나무, 잣나무, 섬잣나무(오엽송)에 치명적이다. 한 군데 감염되면 4~5km 범위는 초토화되며 퍼지기 때문에 솔숲은 사라진다. 제주도와 경남 지역으로 피해를 입히고 북상 중이다. 하늘로 날아다니는 곤충이 매개하는 병해를 물리적 단속으로 효과를 볼 지는 불확실하다. 2015년 포항시는 재선충병 단속초소를 철수했다. 직접 예방으로 방향을 튼 건데 산림의 소나무류에 대한 전수 예방은 엄청난 인력과 비용이 든다. 1905년 목포에서 시작한 솔잎혹파리의 피해는 강약을 띠며 나타나지만 수간주사 등으로 방제 효과가 뚜렷하게 나타나지만, 소나무 에이즈로 불리는 재선충병은 피해 확산의 정도에서 위협적이다. 뾰족한 대책이 없어 답가운 현상이다.
기후변화로 삼백 년 후 한반도에서 소나무가 사라진다는데 그전에 병해충으로 사라질 위기다. 먼 훗날 사람이 '세한도(歲寒圖)'를 보고 소나무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을까. 아이가 태어나면 새끼에 솔가지를 끼워 대문에 금줄을 치고, 가난한 시절 송기를 벗겨 먹고, 땔감으로 쓰다 소나무로 만든 관에 들어가는 한반도 사람들의 풍습을 온전히 료해할 수 있을까 궁금하다. 아니다. 소나무를 알아보든 말든 의심하는 건 내 생각이고 그들의 관심은 다른 데 있을지 모른다. 지구인의 관성으로 아득한 우주 공간 속의 외계인을 사유하는 건 애초에 불가하다. 먹고 싸고 섹스하는 지구인의 생명 현상이 다가 아닐지 모른다. 인식은 인식의 초월을 명제로 한다.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다.
건너편 산밭에선 사내 서넛이 모여 오후 참을 나눈다. 보드랍게 체 친 다크 브라운 흙밥 위에 보오얀 막걸리가 휙 쏟아진다. 하나 둘 셋 아카시나무 우듬지에 종다리 여섯 마리가 꽁지를 쫑긋 대며 앉았다. 더럽게도 봄은 오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