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by 소인

杂文 (286)

새벽길은 고요해서 좋다.
한낮의 소란이 가라앉아 좋고 남들 자는 시간 홀로 길 밟으며 가는 호젓함이 그렇다. 밤새 달빛 젖은 등털 세우고 담 넘던 고양이 지칠 무렵이다. 일찍 깬 집 창문에 빛이 새어 나온다. 며칠 사이 만개한 목련 벚꽃 뚝뚝 꽃잎을 바닥에 누인다. 동백꽃의 떨어진 모양이 한 말 의병의 모가지 같다는 말이 떠오른다. 동백꽃의 핏빛 낙화는 아름답다 못해 처연하다. 선대는 험한 시대의 격랑을 몸으로 부딪쳐 살아냈다. 그 시대의 갈피를 떠올릴 때마다 한숨과 안타까움이 교차한다. 시대의 붉덩물은 얼굴을 바꾸고 나타나는데 지금의 평온해 보이는 모습이 나중 소용돌이로 비칠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코앞의 욕망에 취한 자는 과거도 미래도 가늠하지 못한다. 역사는 철저히 현재 진행형이다. 가늠하면 무엇하랴. 역사에서 시대인식과 인간의 의지가 아무리 댕돌같아도 우연한 사건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을. 희번한 동살 트기 전 읍내를 빠져나와 외곽 길로 들어선다. 닭실 마을 굽이를 도니 장례식장에 불 환하다. 또 한 사람의 하늘이 저물었구나. 주차장엔 밤새 망자의 넋을 달래던 차들이 졸고 있다.

한 달에 서너 번 막걸리 양조장에 아르바이트하러 간다.
주정에 술밥을 넣어 술이 익으면 걸러 빼내는데 술 빼는 날 일을 거든다. 통에서 내려온 술을 담으면 나는 옆에 서서 마개를 덮고 드릴로 돌려 막은 병을 씻으면 플라스틱 상자에 담아 옮기는 일을 한다. 단순한 반복 작업이지만 세 사람의 손발이 맞아떨어져야 일이 수월하다. 첫술을 맛본다. 술맛이 좋다. 달콤 알싸한 누룩향이 빈속으로 퍼지며 자극한다. 겨울에는 온도가 낮아 실내에 두어도 되지만 기온이 오르는 봄부터는 저온저장고에 보관한다. 새벽 다섯 시 반 콸콸 술 쏟아지는 소리와 라디오 소리 들리는 공장에서 세 사람이 술을 담는다. 보얀 술이 쉴 새 없이 막걸리병 목까지 차오른다.

막걸리의 소비 트렌드는 내리막이다.
소주와 맥주의 간편함과 술 종류의 다양성에 밀려 양조장이 사라지는 추세다. 게다가 지역 판매 제한이 없어 타 지역의 막걸리가 마트 진열장에 난립한 상태라 지역 독점도 사라진 지 오래다. 소비자의 입맛에 따라 당도와 탄산을 첨가해 톡 쏘는 맛을 내거나 캔 등에 담아 막걸리 대중화의 붐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소비 취향의 패턴을 되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요즘은 고급스러운 병에 담아 소량 생산으로 차별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가격이 비싼데 막걸리 본연의 대중적 속성보다 외양의 고급화에 기운 듯해 내키진 않는다. 예전엔 면 단위에 여러 곳의 술도가가 성황을 이뤘다. 잔치나 초상 난 집에 말통 째 배달했고, 체육대회, 마을 행사마다 막걸리가 빠지지 않았다. 논 삶고 김매다 논두렁에 앉아 들밥과 곁들이는 막걸리는 포만감과 노동에 지친 심신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데 톡톡한 역할을 해냈다. 술술 목구멍을 넘어가는 막걸리의 푸지고 알싸한 맛에 거나하게 취해 세상 풍진을 저주하고 고된 삶을 달래며 달빛을 따라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던 가장의 굽은 등이 떠오른다.

막걸리는 예부터 서민들의 사랑을 받아온 전통주다. 다른 술에 비하여 단백질은 풍부하면서도 열량은 낮은 것이 특징이며, 유산균과 효모가 풍부하게 들어있다. 찹쌀·멥쌀·보리·밀가루 등을 쪄서 누룩과 물을 섞어 발효시킨 한국 고유의 술 막걸리는 으뜸의 자리를 위협받고 있다. 시대의 변화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쳐도 술과 함께 풍류를 즐기던 풍경조차 사라지는 중이다. 술자리는 만남과 대화의 장소다. 또한 슬픔과 기쁨을 나누면서 삶의 도락을 함께한다. 술 익으면 동무를 청해 닭을 잡고 밤도와 시절과 학문을 얘기하던 선대의 모습이 그립다. 술자리는 또한 감정을 공유하며 이익과 정보를 살피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돈의 이동과 흐름을 살피는 자리의 술맛은 철저히 계산적일 수밖에 없다. 생각 없는 진부한 대화, 뻔한 얘기로 시간을 허비하기보다 달 보며 독작(獨酌)하는 게 나을지 모른다.

이곳에서 생산하는 막걸리는 효모가 살아 있는 생막걸리다. 멸균 막걸리는 저장 기간이 길지만 술빵, 기지 떡 등을 만들 수 없다. 생막걸리는 보존기간이 짧지만 효모와 유산균이 살아 있어 적당히 마시면 몸에 이롭다. 대형 술통에서 화수분처럼 콸콸 쏟아지는 보얀 첫술을 맛보는 느낌은 신혼 첫날 꽃밤 자는 설렘만큼이나 즐겁다. 첫째, 처음인 맏물은 무엇이나 성스럽게 여겼고 정갈한 손길로 다뤘다. 조왕신에게 가족의 평안을 빌기 위해 새벽에 남보다 먼저 뜨는 우물물인 정화수가 그랬다. 가로등이 마지막 졸음 털어낼 무렵 새벽길 더듬어 오늘도 나는 양조장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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