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코로나

by 소인


코로나 바이러스는 일상이 되었다.
바이러스 확산이 숙지자 각국은 생활수칙을 발표하면서 단계별 해제를 진행했으나 이후로도 소규모 확산 세는 늑줄 주지 않고 이어진다. 휴가철이 다가오면서 가족별 소규모 국내 여행이 늘고 있다. 프로야구는 제한된 인원의 야구장 입장을 검토한다. 그럼에도 미국 러시아 인도 등의 확산 추세는 기세를 더해 간다. 백신의 개발은 일 년이 넘어야 가능하다는 전문가의 의견이다. 그러는 동안 해외 입국자 중 양성 환자 또한 꾸준히 늘어나고 경로를 알 수 없는 국내 확진자의 확산 속도도 늘어간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정말 생활 속에 침투한 불안으로 자리 잡았다. 리조트로 가던 식품 트럭은 멈춰 섰고 하루 벌어 먹고사는 일용직 노동자, 영세 자영업자는 문을 닫아야 할 판이다.

노동하는 인간은 아름답다는 말은 유쾌하지 못하다. 거기에는 자본의 속악한 위무와 격려가 숨어 있다.
적당한 노동으로 삶다운 삶을 즐길 수 있다면 노동은 아름다울 거다. 인류는 잉여 생산물이 생기고 나서부터 규칙을 앞세운 제도가 생기기 시작했다. 남의 곳간에 쌓아둔 곡식을 훔치거나 남의 물건, 남의 아내를 탐하는 자를 벌하는 규칙을 만들었다. 공동체가 생기면서 법에 의해 강제하지 않으면 무질서한 사회는 무너지고 말 것이었기 때문이다. 문자가 발명되고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계급이 생겨났다. 문자는 말과 기억의 총합이다. 말은 발설하는 이의 생각인데 사상은 문자로 기록되어 저장하고 이동하여 퍼뜨리게 되었다. 문자가 발달하지 못한 집단은 오래가지 못했다. 법과 규칙, 사상과 제도가 미비했기 때문이다. 추위에 강하고 먼 거리를 달려도 지치지 않는 기마군을 키운 몽골군은 광대한 대륙을 점령했지만 지속되지 못했다. 그것이 문자라고는 콕 집어 말할 수 없지만 초원의 문명은 점령지에 대한 지속적은 실효 지배가 어려웠다. 저항 민족에게는 단호하고 참혹한 학살로 다스렸지만 협조하고 엎드린 민족은 관리로 등용하고 화친 정책을 썼음에도 말이다.

'혹성탈출'이란 영화의 새 버전 종의 전쟁은 인간과 유인원의 싸움을 다룬다. 인간의 지배욕에 저항하는 머리가 뛰어난 원숭이와의 싸움이다. 유인원의 우두머리인 시저는 인간과의 싸움을 피하고 공생을 모색하지만 실패한다. 인간은 인간 종을 최상위에 두려는 그래서 다른 종의 위에 서는 걸 당위의 명제로 설정하기 때문에 애초에 야만적인 원숭이와의 합의 따윈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나 시저는 종족의 생존을 위해 끝까지 평화의 방법을 찾아 유목의 길을 떠난다. 역사 이래 인간은 자연과 사물, 다른 종들의 최상위의 위계를 당연시했다. 자연은 정복과 개발의 대상이며 지구 상의 모든 물상은 인류의 필요에 따라 재단, 개발 파괴되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현재에 와서 기후 온난화, 환경파괴로 부산하게 대책을 세우려 애쓰지만 인류의 문명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앞만 보고 달려왔다. 유목(遊牧)과 정주(定住)의 차이는 크다. 어떤 학자는 유목을 침략과 약탈의 기제로 보지만 정주 또한 안정과 번영을 약속하는 건 아니다. 유목은 존재의 불안성에 기인하는 바 크다. 인류는 생존을 위해 빙하기를 건너 초원이 펼쳐진 대륙을 찾아 이동했으며 종족을 멸절시키지 않고 보존할 수 있었다. 새로운 것을 찾아 유목하는 민족은 살아남았고 머물렀던 종족은 눈보라와 혹독한 추위 속에 죽어갔다. 각지로 흩어져 물과 옥토를 찾은 종족은 대륙의 곳곳에 문명의 시원을 이룩했다.

생존은 사냥과 수렵, 채취로 이어진 본능적 습성이었다. 오늘날의 문명과 비교해 매우 다른 모습일 것 같지만, 실은 본질에선 차이가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흡사하다. 산업혁명 이후 세분화된 경제의 갈래는 삶의 방식에 있어서 많은 변화를 거듭했지만 원시의 문명과 닮은 채로 삶은 지속되었다. 공장 노동자와 농민, 월급쟁이와 자영 상공업자, 관료와 정치가로 대별되는 직업군은 밥벌이의 형태와 수단만 바뀌었을 뿐, 본질에선 차이가 없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지금 사회를 액체 근대라 명명하고, 이전의 현대 사회를 고체 근대라 명명했다. 그는 지금 현대 사회가 더는 안정적이고 견고한 사회가 아니라고 했다. 현대 사회는 액체처럼 변화하고, 불안정하고 가볍고 예측 불가능한 것으로 진단하는 그는 이 둘을 비교하면서 해방, 개인성, 시/공간, 일, 공동체라는 다섯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지금 사회의 초상을 그려낸다. 해방은 우리에게 무제한의 자유를 준 대신 그만큼의 불안을 안겨주었다. 개인주의는 사회 규범을 지탱하는 공적 영역을 무너지게 했으며 그 빈자리에는 사적 영역이 가득찼다. 시/공간의 변화는 공간이 곧 가치가 되던 시대가 무너졌다는 것을 알린다. 일의 변화는 노동이 곧 자본의 창출로 연결되지 않는 세계를 만들어 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공동체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데 고정된 것들이 하나씩 무너지고, 쉼 새 없이 모든 게 바뀌어가는 사회에서 현대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답은 있고도 없다. 질문의 연속이 '살아 내게' 하는 힘일 뿐이다.

아열대 우기가 한반도로 올라온 느낌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도 일상이 되었다. 문화지체 현상은 충격적인 외래의 문화가 서서히 기존의 문화로 섞여 든다는 말이다. 올해 초부터 퍼지기 시작한 코로나 바이러스는 이제 우리의 문화처럼 스며들었다. 중국과 이탈리아에서 대 발생하면서 사망자가 속출했던 분위기는 미국과 멕시코, 러시아와 인도로 옮아갔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생활 수칙으로 한 부분 별 격리 해제가 시작되자 여기저기서 확진자 소식이 튀어나온다. 어쩌다 걸린 바이러스로 죽어도 운에 맡길 뿐 남의 일이 되어 심드렁한 일상이다. 그러면서 언제 내게 닥칠지 모르는 불안과 공포는 상시적이다. 소독약과 마스크 착용은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다.

파란 하늘을 본 게 언제쯤일까.
동아시아를 덮어씌운 구름대가 보름 넘도록 비를 쏟아낸다. 중국의 산사태와 강의 범람, 일본의 집중호우에 이어 한반도 이곳저곳에서 물폭탄에 의한 피해가 불어난다. 도시의 지하차도에 갇힌 사람들, 진흙에 묻힌 집안을 뒤져 망가진 살림을 꺼내는 사람들. 때마다 터지는 자연재해는 인간 능력의 왜소함을 온기 없이 증명한다. 배수 능력과 저수 능력을 장담하던 시설들이 며칠 내린 폭우에 간단하게 무너져 내린다. 날마다 제습기를 틀었다. 비 오면 습기 차오르는 벽은 말랐다 젖었다 반복하며 곰팡내를 풍긴다. 물이 다 찬 제습기는 스스로 가동을 멈춘다. 차면 빼주어야 하는데 차고 넘치도록 인간의 탐욕은 멈출 줄을 모른다. 어제 오후 파란 하늘이 살짝 열린 순간이 있었다. 정말 비구름 위에 대기를 뚫고 우주 공간의 무한대가 존재했는지를 잠시 망각했다. 보이는 시력의 범위는 물론 대기권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의 상상력은 까마득한 우주 공간까지 손을 뻗친다.

영리한 인간은 내부의 세계에 대한 탐구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몸과 정신의 탐구는 인류 역사와 궤를 같이 했지만 여전히 인체의 신비와 정신의 영역에서 미개척 분야는 무궁하다. DNA 지도를 밝힌 인류의 과학은 유전공학 분야에서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정신의 세계를 밝히는 것은 인류 탄생 이래의 철학적 명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왜 사는가에서 어떻게 살지를 궁구한 인류의 역사는 지금도 전쟁과 기아, 범죄와 질병에서 나아지기는커녕 분열과 대립을 거듭하기 때문이다. 중세의 암흑기와 산업혁명을 거치며 실험적으로 실천한 정치 및 경제시스템으로도 만인의 공리를 위한 삶과는 거리가 있었다.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신자유주의가 생존법의 화두로 등장했지만 양극화로 부와 빈곤의 격차는 깊이를 더해갈 뿐이다.

고통은 존재의 현현이란 말은 냉혹하기 그지없으나 일견 사실이다. 또한 고통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이다. 누구도 자신의 고통을 대신하거나 완벽하게 공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연대라는 감정이 공동체를 이끈 동력이 된 것처럼 희망의 끈은 절망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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