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에서 가치 없는 대상은 제거한다. 살려두느냐 제거를 유보하느냐는 인간의 판단임과 동시에 공동체의 규율이다. 인간중심주의는 생태를 대상화한다. 점령, 약탈과 남획은 당연한 가치가 되었다. 풀인 야생초는 인간이 원한 작물이 아닌 잡초로 명명한다. 논과 밭에서 농약 세례를 받는다. 곤충도 마찬가지다. 곤충은 벌레나 해충으로 이름 지어 제거의 목록에 넣는다. 굼뜨고 추하다는 이유로 노인은 젊은 사회에서 관리되거나 외면된다. 관리는 비용과 통제를 수반한다. 비장애중심의 사회에서 장애인의 생각은 무시되고 관리대상으로 전락한다. 동물은 개량된 개체로 일생 동안 새끼를 낳거나 젖을 짜다 값싼 고기로 처분된다. 궁벽한 농촌의 계곡에서 소 돼지 닭은 똥오줌 범벅된 케이지에서 매일같이 엉덩이에 항생제를 맞다 팔려 나간다. 돼지가 유일하게 세상 밖으로 나와 햇볕 쪼이는 날이 제삿날이다. 장애인도 시설에 갇혀 보호, 관리되다 세상을 뜬다. 정상 비정상, 장애 비장애, 인간과 동물, 이성과 비이성의 이분법적 사고는 차별 구조를 단단한 무의식으로 만들었다. 안락사 논의에서 꼭대기에 있는 개념은 생명 존중이다. 간과한 건 환자의 고통이다. 생명이 소중한 가치라고 해서 환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건 이성과 제도의 폭력이다. 인간답게 죽을 수 있는 권리는 자신에게 있다.
인간의 본성, 인간성이란 없다고 믿는 게 편하다. 인간적이란 말에 너무 지쳤기 때문이다. 바이러스의 통제를 받는 세상이 되었다. 인간은 백신이라는 무기를 개발하여 바이러스에 대항한다. 바이러스는 얼굴을 바꿔 공격한다. 살아남느냐 죽느냐의 사냥터에서 중요한 건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인식을 바꾸지 않으면 학습된 게임의 법칙만 고집한다. 아카시나무를 베면서 숲에서의 차별을 생각한다. 등칡과 아카시나무는 숲을 점령하며 숲의 얼굴을 바꾼다. 반듯하고 깨끗이 정렬된 사고와 완벽한 삶은 없다. 그런데도 인간은 제거 대상을 정하고 쓰레기로 간주해 끊임없이 청소한다. 망치는 건 제거 대상이 아니라 인간 중심주의로부터 비롯된 인간의 행위다. 성공하면 행복하다는 생각은 많은 사람을 절망에 빠뜨렸다. 삶은 성공이 아니라 성장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