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도(火山島)」를 읽고
김석범(金石範, きんせきはん, 1925~)은 일본의 소설가이다. 재일 한국인이며 본명은 신양근(愼陽根). 1925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고, 교토대학을 졸업했다. <제주 4•3>을 테마로 한 화산도를 집필하고, 일본에서 4•3 진상규명과 평화인권운동에 젊음을 바쳤다. 1957년 「까마귀의 죽음」을 발표하여 최초로 국제사회에 제주 4•3의 진상을 알렸다.
대하소설 「화산도」로 일본 아사히(朝日) 신문의 <오 사기지로(大佛次郞)>(1984), <마이니치(每日) 예술상>(1998), 제1회 <제주 4•3평 화상>(2015)을 수상했다. 1987년 <제주 4•3을 생각하는 모임 도쿄/오사카>를 결성하여 4•3 진상규명운동을 펼쳤다. 재일동포 지문날인 철폐운동과 일본 과거사 청산운동 등을 벌여 일본 사회의 평화, 인권, 생명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주요 소설로는 「까마귀의 죽음」, 「화산도」, 「만월」, 「말의 주박」, 「죽은 자는 지상으로」, 「과거로부터의 행진 상•하」등이 있다.
역사학자 오항녕은 역사란 시대성, 우연성에 인간의 자유 의지가 결합된 기록이라고 말한다. 대만의 1948년 2•28 사건도 대만인 담배상 여인을 본토에서 넘어온 경찰의 구타로 촉발된 것이었는데, 해묵은 감정의 폭발은 사십 년 넘게 대만의 계엄 정권을 이끌었다. 제주 4•3 항쟁도 1947년 삼일절 기념식에서 기마경찰의 발포로 시작되었고, 친일 경찰과 점령군으로 상륙한 미군정청의 도민 학살로 비롯되었다. 다음 해 제주 전역의 오름에서 4•3 항쟁의 봉화가 오른 것은 통일을 위한 남북 총선거 실시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기 위한 남한조선노동당과 도민의 여론이었다. 공산주의 사상이 현재의 레드 콤플렉스와 달리, 중국 공산당의 국민당 싸움의 승리와 소련 소비에트 정권의 시대적 흐름에 의한 요청이었다. 소련군은 북한 정권이 수립되자 물러났지만 미국 제국주의 군대는 지금까지 버티고 있다.
임시정부의 계파는 공산주의, 민주 공화 정파, 복벽파(왕정복고), 아나키즘 등으로 분열되어 지루한 내분 끝에 연합군의 승리로 독립 의용군의 국내 진입 작전이 수포로 돌아가며 남의 힘을 빌린 독립이라는 한계를 지닌다.
이승만은 외교적 수완으로 독립을 꾀했으나 현실의 벽을 무시한 처사였고 외려 무력항쟁의 기운을 와해시킨 영웅적 일신을 도모한 기회주의자였다. 김구, 김규식 등의 남북 총선을 위한 남북회담을 묵살, 차단하고 친일파를 단죄하기 위한 친일 반민족 특위를 테러로 짓밟은 인물이었다. 그가 친일세력을 업고 과거의 친일을 반공 이념으로 갈아타며 극한의 사상 대립과 민중 학살의 당위를 아편처럼 세뇌시킨 결과 제주의 비극이 벌어진 거였다. 제주의 비극은 한국전쟁 전후로 자행된 보도연맹 학살과 5•18 광주의 비극으로 이어진 제노사이드의 계보였다.
잠깐 허구적 상상의 산물인 소설을 톺아보자. 세계 전체는 한 인간에 의해 통일적으로 인식되고 형상화되기에는 너무 포괄적인 대상이다. 만약 한 인간이 세계 전체에 대한 형상화를 시도했다고 했을 때, 그 범위와 텍스트의 규모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클 것이다. 세계와 동일한 크기의 텍스트라면 결코 인간에 의해 형성될 수 없으며 더군다나 읽힐 수 없는 것이다. 결국 텍스트는 세계 전체가 아닌 대상의 일부분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이 일부분이 상징 또는 알레고리 같은 문학적 기법을 통해 일반적인 대상 전체로 확대되고 해석되고 그렇게 읽히는 것이다. 또한 세계와 같은 총체적인 대상에 대한 인식은 그 자체가 가설적 구축물이라고 할지라도 인식을 진행하기 위한 유용한 방법이 되기 때문에 최상의 수단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다. 인식된 세계를 질서화하고 독해 가능한 대상으로 축소시키는 작업이 바로 픽션이다.
픽션은 보통 가공의 사건과 인물을 통해 텍스트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말해진다. 하지만 단순히 허구적인 사건과 진술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많은 층위들을 텍스트는 담고 있다. 보편적 대상에 대한 일반적인 논평이 텍스트 내에서는 픽션으로 치부될 수 있지만 독자에게는 세계의 질서를 밝혀주는 진리 가치(Truth Value)로 읽힐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작가와 독자가 은연중에 공유하고 있는 문학적 관례에 따라 작가의 허구적 진술은 사실과 거짓을 나누는 판단의 체계에 놓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허구에 근거하고 있는 문학 텍스트가 그 이유 때문에 작품성을 폄하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결함이나 과오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문학은 허구라는 질료로 진실을 빚어내는 예술의 한 장르이기 때문이다.
화산도(火山島)는 전 12권의 대하소설이다. 총 27장의 구성으로 주인공들의 주변에서 벌어진 시대 상황을 묘사한다. 허구를 뛰어넘은 논픽션의 진실 가치를 내포한다. 주인공인 남해 자동차 사장 이태수의 아들 이방근과 오사카에 어머니와 여동생이 사는 일본 유학파인 산 게릴라 연락책인 남승지, 이방근이 도쿄에서 반일활동으로 체포되었을 때 인연이 된 미군 통역관 양준오, 서울의 음악대학 학생이며 남승지와 사랑을 나누는 이방근의 동생 이유원, 한라일보 기자이며 작가인 김동진, 식민 시절 친일로 표창받은 경력을 숨기고 남로당으로 갈아탄 기회주의적 인물 유달현, 일제 때 친구를 팔아 목포 순사부장이 된 제주 경찰서 경무계장이자 이방근의 팔촌 형 정세용 등의 인물과 이방근의 아버지 이태수의 후처인 계모 선옥, 하녀 부엌과 S대 건축과 휴학생 오남주와 오남주의 여동생 정애와 결혼한(현지처) 서북의 양대선, 친구 동료, 연인 등 세대를 아우른다. 제주의 원로 지식인 한성주와 일본군에 자원해 인도네시아에서 포로 감시병을 하다 패전 후 BC급 전범으로 복역하다 살아 돌아와 나중에 일본으로 밀수와 밀항자를 나르는 선장이 된 한대용, 또 다른 선주 송래운, 이방근의 유치장 동기인 게릴라 부대장 강몽구와 서울의 거물 남로당원 황동성, 서북의 사무국장 고영상과 서북 제주지부의 함병호, 토벌군 11 연대장 김익구(김익렬), 남해 자동차 트럭 운전수 박산봉과
서울 친구며 소설가인 나영호, 이방근이 서울서 만난 평양 출신의 미녀 문난설과의 로맨스는 가슴을 후벼 파는 아픔이었으나 시대의 질곡을 통과하지 못한다. 동굴에서 사철 담요 한 장으로 사는 목탁 영감과 남의 종기를 빨아주고 사는 이방근이 육지서 데려온 부스럼 영감, 서울역의 구두닦이 소년 등도 이방근의 성정과 면모를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소설에서는 음식과 풍습도 주요한 얼개를 이룬다. 그중 제주 향토음식인 새끼회는 보양식인데, 갓 잡은 암퇘지의 태를 다져 양수에 섞어 만든다. 애주가이자 호주가인 이방근의 숙취해소 음식이다. 그 밖에도 좁쌀떡으로 만든 오메기술, 막걸리 위에서 뜬 달콤 새콤한 맑은 청주, 맥주나 소주, 흰 살 부드럽게 녹는 옥돔 찜, 국물 시원하게 내장 씻어내리는 옥돔 국, 전복 젓갈과 삶은 양(소의 위장), 뼈째 오도독 오도독 씹어먹는 자리돔 물회와 두툼한 갈치구이 비계가 붙은 분홍빛의 돼지고기 수육을 정어리 젓갈 얹은 신김치에 싸 먹는 안주 또한 심심찮케 등장하는 토속 음식이다.
팔십 년 초 제주도에 갔었다. 제주시 삼성혈 근처에서 반년을 하숙하며 막일을 했다. 그 후 몇 해 전 삼십오 년 만에 다시 갔는데 일자리를 구하러 간 거였다. 관광객과 골프가방을 실은 비행기가 쉼 없이 뜨고 내리는 활주로 밑에는 4•3의 원혼들이 묻혀 있다. 모 시인은 비행기가 뜨고 내릴 때마다 원혼들의 뼈가 빠지직거리며 부서지는 소리에 몸서리치며 두 발을 들곤 한다고 했다. 일자릴 포기하고 돌아오는 화산섬엔 강정의 해군기지가 공사 중이었고 중국인이 사들인 땅에서 리조트 건설이 한창이었다. 치솟는 땅값에 계산기 두드리는 섬의 모습은 통일정부를 외치며 저항한 혁명가들의 학살과 처형의 상흔보다 소돔과 고모라의 불빛이 더 밝게 어른거렸다.
소설은 산 게릴라의 연락책인 남승지가 목탄 버스를 타고 성내(城內-제주읍)로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지게에 보릿자루를 얹어 장터로 향하는 농부의 차림인 남승지는 일본 유학 선배인 양준오를 만나러 간다. 양준오는 미군 통역관이다. 또한 조직의 선인 유달현과도 접촉하는데, 유달현은 일제 때 일본에서 친일활동 경력을 숨기고 해방 뒤에는 공산당에 가입하여 혁명에 앞장서는 변신의 귀재다. O중학교의 교무주임이다. 작년 삼일절 기념 데모 당시 기마경찰의 발포로 여덟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후로 동요하는 민심과 이승만의 5•10 남한 단독선거와 단정 수립을 저지하기 위한 4•3 봉기가 다가오는 무렵이다.
이방근은 친일 사업가인 남해 자동차 사장 이태수의 아들이다. 큰 덩치에 새우처럼 구부린 등이 얼핏 보면 짙은 허무의 냄새를 풍기는 서른넷의 사내다. 그는 해방 전 반일활동으로 유학 중인 도쿄에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일 년을 복역했다. 복역 중 폐결핵으로 전향서를 쓰고 병보석으로 나와 고향 제주의 관음사에서 요양하다 읍으로 내려왔다. 하는 일 없이 (아버지 이태수의 사업으로 먹고살기 위해 돈을 벌 필요가 없었다) 서재의 소파에 종일 앉아 안뜰을 내다보거나 술을 마시며 지낸다. 해방된 조국의 상황에 염증과 허무를 느끼며 하루하루를 묵언 수행하는 건데 어떤 이념이나 사상조차도 그를 자극하지 못한다. 이방근의 여동생 유원은 서울의 음악대학에 다니며 건수 숙부 집에서 기숙한다. 이방근의 위로 형이 있으나 오래전 일본 여자와 결혼, 일본인으로 귀화하여 도쿄에서 개업의로 산다. 제주의 집과는 인연을 끊었다. 어머니가 몇 해 전 간경화로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 이태수는 내연관계였던 기생 출신의 선옥을 후처로 들였다. 이방근은 명목상 남해 자동차의 임원이나 회사일에는 관여하지 않고 어머니가 물려준 유산을 쓰며 산다. 아버지 이태수는 그게 불만이다.
어느 날 이방근은 양준오와 함께 간 술집에서 시비를 거는 '서북'을 두둘겨패 유치장에 갇힌다. 유치장에서 만난 강몽구는 남로당의 간부이자 유학파로 남승지와는 사돈 간이다. 이방근은 하룻만에 나오고 서북의 협박에 합의금을 내준다. 당시 서북은 제주의 동란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로 투입되었는데 일정한 급료가 없기 때문에 모든 걸 자급자족했다. 태극기와 이승만의 사진을 애국심을 앞세워 주민들에게 강매하고 밀수를 단속한다며 집을 뒤져 일본에서 가져와 장롱 깊숙하게 숨겨놓은 견직물이나 비단 등을 약탈했다. 혼자 걷는 부녀자를 강간하고 무전취식을 일삼았다. 친일 경찰의 묵인 아래 그들은 게릴라의 가족을 검색해 학살을 저질렀다. '멸치도 생선이냐, 제주 놈들은 인간도 아니다' 란 자조적인 말들이 도민들 사이에 퍼졌다. 서북인 자신들의 차별대우는 뿌리가 깊었는데 중앙의 신분차별은 홍경래 난의 시발이 되었고, 해방 후 월남한 서북은 반공 멸공을 앞세워 혼란한 사회를 공포로 몰아갔다. 이방근은 서북 제주지부장 함병호와 이 사건으로 겉으론 친분을 유지하며 지내지만 한라산 혁명그룹과 서북이나 경찰과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관계를 유지했다. 그것은 때를 기다린다기보다 식민과 해방을 거치며 친일 세력의 재 득세로 나아질 기미가 없는 상황에의 환멸, 세상에 대한 허무의 깊은 뿌리였다.
후배인 남승지와 유치장에서 만난 강몽구, 그리고 기회주의자이며 교조적인 유달현, 서울에서 내려온 남로당의 거물 황동성 등에게서 끈질긴 혁명의 참가를 권유받지만 이방근은 게릴라 부대에 자금을 지원하면서도 가입은 거절한다. 드디어 4•3 혁명의 봉화가 제주 전역의 오름에서 불붙고 투쟁은 본격화한다. 육지 간 통행은 끊어지나 이방근은 특별 통행증으로 화물선으로 서울을 오간다. 때로는 부산으로 밀항하기도 하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국외도 아닌 국내로의 밀항이라니... 이방근은 이런 조국의 현실에 절망한다.
4•3 이후 제주읍을 제외한 각 지역의 면사무소 지서가 파괴되고 사망자가 속출했으나 토벌대의 공격 또한 극악으로 치달았다. 5•10 선거는 유일하게 제주도만 무산되었다. 급기야 경찰과 서북의 진압에 회의를 느낀 좌익파 11 연대장 김익렬은 게릴라 사령관 김성달과 극적인 4•28 화평 협상을 이끌어내지만 경찰의 방해공작에 그것마저 좌절된다. 여기에는 이방근의 팔촌 형 제주경찰 경무계장인 정세용의 공로가 컸다. 이방근은 정세용의 혐의의 증거를 서북과 술자리 등에서 확보하며 추이를 살피고 있었다. 또한 게릴라 비밀조직의 간부 유달현의 이방근에 대한 포섭공작 이면의 기회주의적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서울의 여동생 유원이 삐라 살포 혐의로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갇히자 그녀를 빼내기 위해 서울을 오가던 중 문난설과 만난다. 평양 출신의 미녀 문난설과 제주도를 동행하며 사랑의 정념을 키우면서도 이방근은 동란의 현실에 갈등하며 여동생 유원의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학교의 추천서가 있으나 밀항선을 타야 하는 일이었다.
동란의 제주는 육지로 통하는 교통이 차단되었다. 최소한의 화물선이 오갔는데 특별한 신분이 아니면 출항 허가를 따내기 어려웠다. 시외전화는 신청 후 두세 시간이 걸려야 연결되었고, 전기는 저녁 열두 시면 공급이 끊어졌다. 남해 자동차 사장 이태수의 아들 이방근은 택시와 트럭을 이용했고 서울을 오가며 시국의 상황을 파악했을 터였다. 신문은 극도의 보안 속에 며칠 지나야 사건의 겉만 찔끔찔끔 보도했다. 이방근 주변의 인물은 거의가 일본 유학파였다. 재경 제주 학우회의 멤버가 동란에 휩싸인 고향의 상황에 발을 굴렀고 가슴을 태우고 눈물을 삼켰다. 좌우익의 대립과 백색테러가 판치는 해방된 조국의 현실은 식민 상황보다 못한 학살의 지옥이었다.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 친일을 비호하고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키웠다. 역사의 우연성이란 논란만 키우는 의제라 할지라도 필연이 내포한 우연이란 점에선 일면 타당하다. 문제는 사회의 보편성을 향한 인간의 의지가 역사의 사건을 끌고 가는 데에 있으나 우리 역사는 과거로부터 눈곱만치도 배우지 못했다. 이분법의 극한 대립으로 서로를 물어뜯어 죽여야만 직성이 풀렸다. 뜻있는 인사는 정권의 하수인에게 목숨을 잃었다. 한국전쟁과 군사독재를 고치며 숱한 대중이 파리 목숨처럼 사라졌다. 혁명이라도 그것이 혁명의 당위에만 미쳐 인간을 배제한다면 대체 무엇을 위한 혁명이란 말인가. 이방근은 난제를 끌어안고 침묵했으나 머물러 있진 않았다. 보이지 않게 고뇌하고 행동했다.
이런 와중에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던 제14연대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다음은 여수 인민일보 10월 24일 자에 실린 호소문 일부이다.
애국 인민에게 호소함(제주도출동거부병사위원회)
모든 동포들이여! 조선 인민의 아들인 우리는 우리 형제를 죽이는 것을 거부하고 제주도 출병을 거부한다. 우리는 조선 인민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싸우는 인민의 진정한 군대가 되려고 봉기했다.
친애하는 동포여! 우리는 조선 인민의 복리와 진정한 독립을 위해 싸울 것을 약속한다.
애국자들이여! 진실과 정의를 얻기 위한 애국적 봉기에 동참하라. 그리고 우리 인민과 독립을 위해 끝까지 싸우자.
산중의 게릴라들은 크게 고무되었지만 사건은 10월 27일 8일 만에 진압되고 만다. 앞서 북으로 건너가 인민대회에 참여하고 1948년 9월 9일 북한 정권의 창립을 보았던 제주 게릴라 사령관 김성달 일행은 11 연대장 김익렬과의 4•28 화평 협상이 경찰의 방해공작으로 결렬된 이후 돌아오지 않았다. 북의 무기와 보금품 등의 지원을 애타게 기다리던 산부대는 여수•순천 사건의 진압으로 태백산 팔공산 지리산 등지로 흩어진 혁명군의 상황에 절망하며 분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혁명적인 투항주의는 일체 발설해선 안 되는 금기사항이었다. 토벌대의 대대적인 섬멸작전으로 중산간 부락이 불에 타고 게릴라 가족은 색출, 검거되어 부녀자 노인 아이까지 면사무소 마당에서, 보리밭에서 바다에서 학살 처형되었다. 반란군의 머리를 가져오면 등급에 따라 포상금이 지급되어 제주 경찰서 계단과 관덕정 구석구석 게릴라의 머리가 산처럼 쌓여 굴러다녔다. 양쪽 귀가 철사에 꿰어져 매달린 게릴라의 머리는 평온한 얼굴이었으나 죽음도 허무도 아닌 지옥 그 자체였다. 시체의 머리를 노리는 까마귀 떼가 읍사무소 광장을 맴돌았다. 돌담아 둘러친 보리밭에 산더미로 쌓여 썩어가는 시체더미에서 가족을 찾는 일은 불가능했다. 휘발유를 끼얹어 태우거나 불도저로 밀어버렸다. 빌레못 동굴에 피난한 노인과 부녀자들은 밖으로 끌려 나와 총살했다. 산 곳곳에서 학살의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살과 피가 하얗게 타들어갔다
당시 해방 후 일본에서 귀국한 7,8만여 명과 합해 삼십만 명에 달했던 제주인구의 10% 이상이 토벌대와 경찰에 의해, 또는 게릴라에 의해 살해, 처형되었다. 수치적인 통계에 의하면 게릴라보다 토벌대에 의해 학살된 도민의 숫자는 7,80%였다고 한다.
1949년을 눈앞에 두고 이방근은 서울 유학생 오남주를 데리고 제주도로 내려온다. 국민학교 교원이던 오남주의 형은 이미 산부대로 올라갔고 남은 여동생과 어머니는 서북의 보복학살이 두려워 여동생 정애가 서북의 양대선과 정략결혼을 하고 그의 아이를 밴다. 오남주는 현실에 분노하고 치를 떨며 복수를 각오한 채 입도 허가기간을 넘겨 사라진다. 결국 산에 들어간 오남주는 여동생의 남편 서북의 양대선을 살해하고 여동생 정애는 나무에 목을 맨다.
이방근은 여동생 유원의 일본행을 보기 위해 한대용의 밀항선을 타고 가려는 중, 유달현이 가명으로 일본행을 하려는 걸 알아챈다. 그는 성내 세포조직의 일제 검거 시에 조직의 명단을 정세용에게 넘긴 혐의가 있는 인물이다. 정세용 또한 4•28 화평 협상 반년만에 도경 경찰국 계장으로 승진했다. 한림의 밤바다를 헤쳐 밀항선이 바다로 나가자 이방근은 한대용을 시켜 선창에 있는 유달현을 불러낸다. 이방근을 본 유달현은 놀라지만 가느다란 눈으로 배신을 부인한다. 이십여 명의 밀항 청년들이 유달현을 죽이자고 짓밟지만 이방근은 그를 마스트에 묶게 한다. 그들은 게릴라 거나 경찰의 수배를 피해 희망도 없이 절망의 조국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이었다. 한 시간여 뒤 청년들은 유달현을 내리지만 그는 이미 숨이 끊어졌다. 일제와 해방 조국의 배신자인 그가 남긴 유품은 사냥 모자와 일본돈 삼십만 엔이었다. 유달현의 시신은 밤바다에 수장된다. 선장이 묵념을 제안했다. 수천수만의 도민을 학살로 이끈 그라도 생명에의 외경이었을까. 스크루에 걸린 유달현의 머리가 잘려 수박처럼 밤바다의 어둠 속을 둥둥 떠다녔다. 표류하는 영혼처럼.
투항주의, 혁명의 좌절에 게릴라 전체가 개죽음당할 순 없다는 생각에 이방근은 배를 사는 데 거금을 내놓으며 섬 밖으로의 탈출 계획을 도모하지만 게릴라 부대는 이방근을 혁명의 방해자로 지목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토벌대의 섬멸작전이 점점 좁혀오자 굶주린 혁명가들은 낙오하거나 분열하기 시작했다. 비관적 혁명주의가 싹트기 시작한 거였다. 이방근의 게릴라 탈출계획은 외려 반전하는 양상이었다. 그러나 이방근은 팔촌 형 정세용을 끈질기게 노리고 있었다. 남해 자동차 트럭 운전수 박산봉은 이방근으로부터 유달현의 최후를 듣자 정세용은 자신이 처단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이방근은 그를 말렸다.
어느 날 정세용의 납치 소식이 들려왔다. 서귀포 출장의 정보를 입수한 게릴라 부대가 그를 도중에 납치한 것이다. 남은 건 신문과 처형뿐이었다. 이방근은 증인 심문의 형식으로 게릴라의 안내를 기다렸다. 이방근은 한대용으로부터 벨기에 브라우닝 권총을 품에 넣었다. 어머니의 친척인 팔촌 형 이전에 그는 살아서는 안될 사람이었다. 그러나 설령 그를 누가 죽인다 해도 죽음으로 섬의 비극이 치유될 순 없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무로 바꾸는 행위가 과연 정당한가. 이건 살인이 아니다. 나를 죽이고 나서 살인도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죽고 상대를 죽이는 건 가능한 일일까. 이방근은 소파에 앉아 밤의 파도 소리와 유달현의 최후를 생각한다. 며칠 후 박산봉이 수류탄을 던져 제주 서북 지부장 함병호를 살해했다. 박산봉은 부상을 입었는데 현장에서 사살되었다고 했다. 토벌대의 전과가 속속 드러나자 산에서 투항, 체포된 게릴라들이 끌려왔다. 일부는 심문에 따라 처형되어 비행장 구덩이에 묻히고 일부는 육지의 형무소로 보낼 것이라 했다. 이방근은 남승지와 양준오를 찾아내어 밀항시킬 계획을 꿈꾸었으나 둘의 행방은 묘연했다. 어느 날 하녀 부엌이 포로 행렬에서 남승지를 보았다고 알렸다. 이방근은 거액을 털어 남승지의 석방을 합의했다. 고문으로 정강이뼈가 드러난 남승지는 양준오가 산부대에서 혁명을 비판하다 사살되었다고 했다. 이방근은 남승지에게 여동생 유원의 쪽지를 주며 밀항선에 태웠다. 남승지에게 시계를 풀어주며 뜨거운 포옹을 했다. 이게 마지막이라고 이방근은 속으로 되뇌었다.
며칠 후 산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동굴에서 이방근을 본 정세용은 끼악... 비명을 지르며 살려달라고 했다. 일제 때 친구를 팔아 순사부장이 되고 토벌군과 게릴라의 4•28 화평 협상을 훼방하여 학살을 부추긴 정세용. 그를 죽이고 살리는 건 이미 선과 악의 구분을 초월한 거였다. 나는 나를 죽이고 그를 살해한다. 이방근은 총구로 그의 심장을 겨눴다.
...... 난설의 향기가 스미듯 전해져 왔다. 백란이었다......
...... 이방근은 산천단 벼랑 끝에 서 있었다......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然
삶이란 한 조각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은 한 조각구름의 스러짐이라
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니
살고 죽고 오고 감이 모두 이와 같도다
4•3 이전에 가끔 찾아오는 이방근에게 노인(목탁 영감)이 중얼거리던 시. 이조 중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침공한 임진왜란 때 승병 5천을 이끌고 왜병과 싸운 의병장,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시라고 했다......
살육자들이 승리자로 서울로 개선한 뒤, 폐허의 광야를 가로질러 가는 바람 속에 허무가 있는가. 섬을 뒤덮은 시체가 허무를 부정한다. 죽음의 폐허에 허무는 없는 것이다. 아득한 고원의, 보다 저 멀리, 초여름의 햇볕에 반짝이는 부동의 바다가 보였다.
파란 허공에 총성이 울렸다.
「화산도」의 결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