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잔산(殘山)
겨울 산은 녹슨 고철 같다.
고속도로 양 켠에 펼쳐진 야트막한 산엔 잡목이 추레하게 떨고 섰다. 서울이 가까울수록 대형 창고가 줄지어 나타나고 부연 하늘은 을씨년스러운 한겨울을 무겁게 덮었다. 어둔 새벽에 집을 나서 첫차를 타고 설핏 잠든 사이 날이 밝는다. 도의 경계를 넘어 상경하는 동안 집과 건물과 사이사이 널브러진 빈 밭은 숨을 죽이며 휴경기를 보낸다. 가끔씩 강의 지류가 나타나곤 했는데 바짝 마른 물 바닥엔 허연 콩나물 같은 물길이 숨통을 잇듯 낮게 흘렀다. 초목이 무성한 여름의 풍경과는 정반대인 겨울 풍경은 볼품 사납다. 초록이 사라진 자리는 정말 대체할 무엇도 없는 사막이다. 풍경은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다양하게 읽히기 마련인데 오늘의 상경이 그랬다.
발목이 백팔십도로 꺾이고 관절의 뼈가 조각조각 부서져 덜렁대는 꼴로 사흘을 걸어 베이스캠프에 도달했다는 산악인의 말처럼 뒤도 안 보고 떠나온 곳이 서울이다. 더 머물렀다간 영혼도 몸도 으깨져 살아갈 일이 절벽일 것 같았다. 도망치듯 떠나온 뒤 밥벌이의 위대함을 고스란히 깨치면서 얻은 게 많으니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사람을 만나고 일을 바꾸며 삶의 고단함을 덮고 잤으니 몸으로 깨친 배움은 몸의 주름으로 남았다. 사람의 한살이가 눈 감았다 뜨니 꿈처럼 흐른 셈이다.
시골에 내려가 닥치는 대로 밥벌이를 찾았다. 땅을 빌려 헛농사한 일 년은 이후의 텃밭농사에 소중한 경험으로 쓰였다. 아이들이 크면서 골짜기서 면으로, 면에서 읍내로 거처를 옮기다 끝내는 직장을 얻어 강원도로 떠났다. 바닷가서 십오 년을 살다 도로 아내의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 사이 아이들의 발목은 굵어져 집을 떠났고 나도 나이 들었다. 나무와 함께 이십 년 가까이 산 것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숲의 속살을 더듬으며 자연의 무상을 배웠다. 인간이란 너른 바다의 좁쌀과 같은 창해일속(滄海一粟)의 존재란 것도 숲과 자연의 죽비로 맞은 자각이다. 그럼에도 아침에 세운 생각이 저녁에 무너지는 허약한 기반의 상념에 좌절하는 걸 셀 수 없기는 매한가지.
소소한 일상에 흔들리는 필부의 마음자리에 큰 뜻은 자리를 물리기 일쑤였다. 교만하게도 하심(下心)을 내세워 필명을 소인으로 짓고 글도 쓰고 술도 마셨다. 돌아보면 그지없이 부끄러운 시편을 불살라버리고 싶은 적이 많다. 허명에 집착하기도 했고 독설을 무기로 관계를 파탄내기도 했다. 타인에게 들이민 칼날은 내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글쟁이의 앙가주망이란 허울로 난필을 일삼은 끝에 문자 불립(文字不立)의 속내를 맡은 이후론 고독을 소중한 벗으로 들였다. 의미 무의미를 떠나 시간은 차곡차곡 쟁여져 나이 든 것처럼 삶의 주변도 주름투성이다. 그런 마음의 느낌이 겨울 잔산(殘山)의 추레한 풍경과 맞아떨어진 것이리라.
터미널에서 흡연장소를 찾았다.
흡연구역은 찬바람이 쓸어가는 차도에 바짝 붙었다. 세상없이 평등한 곳이란 생각이다. 인디언과 담배를 나누던 백인의 그때처럼 좌우도 빈부도 남녀 계층의 차별도 없는 공간. 흘깃 바라보고 한 곳을 향해 집요하게 빨아대다 미련 없이 돌아서 가던 길 가는. 예수도 부처도 미처 몰랐을 평화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내남없이 건강을 위하는 세상에 살뜰한 세금 바치며 용감히 구박받는 이들이 모여 훈훈한 연기로 데우는 겨울 하늘이 따스했다.
사촌동생이 사위를 보는 결혼식에 때맞춰 도착했다. 광고회사 시절 십 년 동안 오갔던 강남의 거리는 많이 변했다. 사람들은 고층빌딩 아니면 지하에서 소비하고 사랑을 나누는 듯했다. 미로처럼 깔린 지하 거리를 헤매다 군데군데 붙은 시편을 읽었다. 시민의 응모로 일상의 감상을 적은 시들은 지나치는 사람의 등짝에 눅진한 온기로 내려앉는다. 사촌동생은 흰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밝게 웃었고 젊었던 큰어머니는 노파가 되어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했다. 수년마다 한 번 보는 친척들은 염장 시래기처럼 오그라들고 시들했으나 입을 비뚤거리며 웃어대고 손을 잡았다. 신랑 신부와 하객들은 서로의 안부와 내일을 축복하며 즐거워했다.
차 시간이 넉넉해 터미널 지하상가를 걸었다. 대형 화방과 시골의 열 배는 됨직한 다이소, 갖가지 아이디어 상품으로 손님을 부르는 가게엔 사람들로 북적였다. 너른 인도에 만들어놓은 아이스링크에선 아이들이 맴을 돌며 환호한다. 어린 자식을 앞세운 엄마 아빠가 위태로운 세상의 걸음마를 받쳐준다. 중심을 잡느라 힘준 스케이트 날에선 하얀 얼음 조각이 반짝이며 튀었다. 불쑥 다가선 사내가 봉지를 내민다. '예수 믿으시오' 종이는 버리고 초코파이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가 믿는 예수는 그의 천국이자 보배다. 나는 사후의 낙원보다 살아 몸으로 겪는 이승의 고통이 소중하다. 고통은 살아 있게 하는 각성의 힘인 까닭이다. 멀어져 가는 사내의 등을 보며 송나라 옥득자(玉得者)가 겹쳐져 웃었다. 예전에 송나라에서 옥을 얻은 사람이 벼슬아치에게 옥을 바쳤다. 벼슬아치는 옥을 되물리며 '나는 물건을 탐하지 않는 걸 보배로 여기고 그대는 옥을 보배로 여기오. 내게 옥을 준다면 우리는 보배를 모두 잃게 될 것이오(我以不貪寶 爾以玉爲寶 若以與我 皆喪寶也)' 사람은 각자의 방법으로 행복한 삶을 궁리한다.
내려오는 길의 겨울 숲이 조금은 환해 보였다. 해 지는 충청과 경상의 산들이 황금빛으로 물들며 지나친다. 간만의 장거리 행보에 피로에 젖어 오늘 보았던 풍경들이 아스아슴 사라지는 걸 느끼며 잠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