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감

by 소인

杂感 (30)

남북으로 흐르는 강을 바라보면 땅의 기울기를 느낄 수 있다. 봉우리에서 시작한 물길은 실개울에서 큰 물에 몸을 섞으며 강을 이룬다. 지천은 실핏줄처럼 갈라져 심장의 펌프질로 퍼져 나가지만 땅의 경사는 물을 한 줄기로 모은다. 더 큰 물길은 곳곳의 댐에 막혀 거대한 호수를 만들었다가 무넘이를 타고 남쪽으로 흘러간다. 댐이 생기면서 생태의 교란이 시작됐다. 아카시나무 꽃 질 무렵 바다에서 돌아오는 은어는 오도 가도 못하다 대가 끊어졌다. 육봉(陸封)은 바다에 사는 동물이 바다와 분리되어 있는 호수나 늪 따위에서 세대를 되풀이하는 일을 뜻하는데, 연어, 송어 따위에서 볼 수 있다. 축제에 사용하는 은어는 육봉 은어다. 남쪽 산란장에서 사 온 치어를 가져다 키워 축제장에 낸다. 인간의 손길을 피한 축제 은어는 낯선 물길을 거슬러 오르다 겨울이 오면 서서히 운명을 다한다. 사람들은 가여운 운명에서 탈주한 은어를 작살과 투망질로 잡아다 썰고 굽는다.

산은 수목이 숲을 이루고 옹달샘이 발원하여 물길을 이루고 내려간다. 강을 따라 볕이 드는 평평한 땅에 집을 짓고 농사를 지었다. 산맥과 강은 지역을 구분했고 산 너머 마을과 강 건너 마을의 습속은 혼인 제도를 통해 교류했다. 빛의 속도로 인구와 물산이 오가는 지금에 이르러 인간은 도시 생활에서 벗어나 초록의 숲을 느끼고 즐기게 되었다. 초소 앞을 지나는 차와 사람을 보면 거개가 여행이나 관광이 목적이다. 지역 주민은 적재함에 농기구, 모종 등을 싣고 느리게 오간다. 휴일이면 오토바이 폭주족이 종일 땅을 울리며 지나간다. 자전거 캐리어를 달고 강바람 맞으며 유유히 지나는 나이 든 라이더도 보았다. 캠핑카는 흔하게 보는 풍경이 되었는데, 지난겨울 동계 캠핑 이후 나가지 않아 몸이 근질근질해서 며칠 전 캠핑 도구를 트렁크에 착착 넣어두고 언제든 떠날 준비를 마쳤다.

초소 근무 한 달이 돼가며 주변의 자잘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강변 풍경에 기꺼워 매일매일이 즐거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강의 속사정을 알게 되고부터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루에도 서너 번 다리 위에서 물 바닥을 내려다보며 물고기의 안부를 살폈다. 산과 강, 그리고 주변의 풀과 나무를 찬찬히 관찰했다. 오월초에 초소에 옮겨올 무렵엔 병꽃나무와 수수꽃다리 꽃이 만개했다. 버드나무 솜털이 눈처럼 날렸고 차 안과 초소에까지 날아들었다. 산괴불주머니와 애기똥풀 꽃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피고 진다. 제비꽃이 지고 찔레꽃이 피고 붓꽃이 새파랗게 질린 꽃을 무쩍무쩍 피워 올렸다. 산뽕나무 아래엔 이름 모르는 꽃들이 연달아 피었는데 가까이 보면 꽃판의 모습이 우주의 기하학적 구조처럼 느껴졌다. 길가에는 토끼풀 질경이 소루쟁이 붓꽃 쑥과 애기똥풀이 자라고 임연부에는 찔레나무 꼭두서니 인진쑥 참나리 병꽃나무 수수꽃다리 싸리나무 산초나무 붉나무 복분자 고무 딸기 두릅나무가 자란다. 순을 딴 두릅나무는 두 번째 이파리가 무성해져 늘어진 왕관처럼 되었고 국수나무 꽃이 지고 잎 색깔이 하루가 다르게 짙어진다.

풍혈 부근에는 바위마다 돌이끼가 쿠션처럼 자리 잡았고 돌이끼 주변으로 양치류가 보기 좋게 군락을 이룬다. 강마을 사람들은 불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이 이어지면 수박을 들고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 풍혈(風穴) 주위에 돗자리 펴고 쉬기도 한다. 산괴불주머니, 산뽕나무, 담쟁이덩굴, 아카시나무, 국수나무가 들어찼고 다래덩굴은 직벽 아래를 점령하고 길에까지 세력을 확장하는 중이다. 오래전 청량산 도립공원에서 등칡을 제거하는 만경 작업을 했다. 밑동의 줄기를 자르고 통에 담은 근사미 액을 붓으로 발랐다. 글리포셰이트 계통의 성분은 뿌리의 생장점까지 내려가 죽이는 약제인데 칡 줄기는 좀처럼 죽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났다. 산소 부근의 아카시나무를 제거하려면 적어도 내리 삼 년은 해주어야 정리가 된다. 바람에 씨가 날아와 퍼지는 건 인력으론 불감당이다.

직벽에는 담쟁이와 돌단풍이
부처손이 절벽을 덮다시피 자란다. 부처손은 거울에 얼었다가 봄이 되면 파릇하게 살아난다. 돌단풍과 부처손이 다닥다닥 붙은 절벽은 그대로 그림이 된다. 오래전 부처손의 약효를 탐낸 사람이 직벽을 오르다 다치기도 했다. 직벽 아래 토종 벌통을 놓은 사람이 보름에 한 번꼴로 찾아와 벌통의 상태를 살피다 간다.

강변에는 버드나무 벚나무
오디가 날아가 자란 산뽕나무도 몇 그루 자란다. 작년 물난리로 한쪽으로 쓰러진 버드나무는 뿌리를 엉거주춤 땅에 박고 잎을 키워낸다. 엉겅퀴 꽃이 피자 엉겅퀴 닮은 지칭개가 연해 꽃대를 올려 피웠다. 엉겅퀴와 지칭개는 모두 초롱꽃목 국화과지만 지칭개는 두해살이인데 엉겅퀴는 여러해살이다. 처음 시골 내려와서 산당귀와 개당귀를 구별 못했다. 그러다 산에 자주 가서 보니 이제는 닮은 게 눈에 안 뜨일 정도로 확연하게 구별되었다. 식물은 사계절을 두고 관찰해야 특성에 따른 구별이 가능해진다. 지속적인 관찰 이후의 통찰이란 면에서 아끼고 사랑해야 대상과의 공감과 소통이 가능하다. 시골살이 이후 산에서 나무를 베는 간벌작업을 하다 강원도로 가서 소나무 조경일을 했다. 간벌하는 건 숲의 위생과 적정 개체의 유지, 최종 목재 생산을 염두에 둔 계획이고, 조경은 생활 주변의 경관과 휴양을 목적으로 수목에 인위적인 영향을 주는 일이다. 나무와 관계하면서 숲과 생태에 조금씩 눈을 열었다.

오부 능선부터는 생강나무, 신나무, 물푸레나무, 때죽나무, 신갈나무, 굴참나무, 상수리 등 낙엽활엽수와 참나무류가 소나무, 잣나무 상록 침엽수와 함께 혼효림의 임상을 이루지만 산꼬대 가까이는 참나무류가 우점종이다. 멀리서 바라보는 능선의 실루엣을 전부터 그리고 싶었다. 청량산 봉우리로 올라가는 골짜기에 철계단을 설치했지만 그 뒤로 올라간 적은 없다. 전국의 산에 케이블카와 철계단을 놓아 사람을 접근이 쉽도록 하는 게 생태와 경관에 도움이 될지 의심스럽다. 그것보다 관광 수입을 올리려는 지자체와 주민의 바람이라고
하는 게 맞을 거다. 생산과 효율이 문명의 발전과 삶의 척도라고 믿는 사회에서 저성장을 주장하고 반생명의 경고를 외치는 목소리는 힘이 약하다. 코로나 이후 도립공원 앞 민박단지의 식당과 가게는 개점휴업상태다. 한 번은 민박단지 식당의 메뉴판을 살핀 적이 있는데, 매운탕도 들어 있었다. 민물고기, 메기, 쏘가리 매운탕의 재료는 병든 강에서 잡은 물고기는 아닐 거다. 강마을 뒷산의 소나무 임상은 오륙십 년 전에 조림했다. 전쟁 후 산의 나무는 땔감으로 베어졌고 민둥산이 된 땅에 일본 이깔나무(낙엽송), 리기다소나무를 심어 녹화(綠化)를 진행했다. 덕분에 벌거숭이였던 산은 푸르게 덮였지만 최근 대형 산불과 솔잎혹파리, 소나무 재선충병 등 병충해의 피해로 수종 변경을 계획한다. 대면적에다 생육기간을 감안하면 백년대계로 진행하는 게 맞겠다. 온난화 등으로 식생이 변화하면 수백 년 후 한반도의 소나무는 식물도감에서 볼지도 모르겠다.

출근하고 얼마 안돼 두 여자가 초소 앞을 지나간다.
챙 넓은 하얀 모자를 쓴 두 사람은 한눈에도 주민이 아닌 여행자였다. 콧등을 간질이는 바람에 찔레꽃 향기가 묻어난다. 연하늘색 청바지와 진한 바다색 바지를 입은 두 사람은 한 손에 물병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청량산 쪽으로 가는 중이었다. 초소 창문을 열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디 가세요?
청량사 가려구요.
어디서 오셨는데요? 농암종택에서 왔어요.
아, 차는 거기 세워두고 운동 겸 걸어가시는군요.
네.
구경 잘하고 오세요!
네에!

두 여자는 밝게 웃으며 멀어져 갔다. 농암종택에서 청량사까지의 거리는 줄잡아도 왕복 십 킬로가 넘는다. 오후 네 시가 되어 두 여자가 나타났다. 오전부터 여섯 시간 동안 청량산에 다녀온 거다. 길을 오르내리며 근무하다 말 건넸다.

구경 잘하셨어요?
네! 청량산이 너무 아름다워요!

합창하듯 동시에 말하며 환하게 웃는 여자들의 표정은 만족스러워 보였고 아침보다 훨씬 밝아 보였다.

점심은 거기서 드셨나요?
네!
조심히 가세요!
네, 수고하세요!

여자들은 아침에 오던 길 쪽으로 멀어졌다. 오십 전후의 도시 사람인 듯했다. 일상을 떠나 초록의 숲과 강이 흐르는 길을 걷는다는 건 행운이다. 산하의 속살을 일일이 헤아리지 못하면 어떠랴. 푸른 산, 푸른 강 공중을 날며 노래하는 새들, 길 숲에 핀 야생화, 새뜻한 바람... 꿈틀대는 생태의 기운이 전하는 충일한 삶의 느낌이면 족하다. 오전에 만났던 그녀들과 오후에 본 그녀들은 분명 달라진 사람이다. 오늘의 트래킹이 그녀들에게 영혼의 에너지가 되었으면 좋겠다. 터널 끝에서 두 여자의 모자가 팔랑거리는 점이 되었다가 차례로 사라졌다.

환경 철학가이자 작가인 우석영은 「숲의 즐거움」에서 이렇게 말했다.
'더 많은 쾌락으로 보상받고, 더 따뜻한 만남과 소통으로 심신을 회복하려는 행복과 치유의 기획이 더 흔하고 인기 있지만, 이런 기획을 실행하는 사람은 언제나 두 가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하나는 쾌락의 부산물인 피로이고, 또 하나는 만남과 소통의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쾌감이다. 상대적으로 덜 위험하고 효율성 높은 기획은 소연한 시간을 체험하려는 기획이다. 숲 산책은 이런 시간 체험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로버트 오언(Robert Owen)의 말처럼 우리는 인간의 마을이라는 공동체에 속한 채"공동체의 행복을 늘리는 행위로써만 자신의 행복을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행복의 한 얼굴일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개인의 행복은 인간의 마을(공동체)에서 잠시 퇴각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삶의 피정(避靜, retreat) 속에서 인간의 마을보다 더 크고, 인간의 마을을 아래에서 떠받치고 있는 '토대'인 지구공동체(Earth Community)에 귀속되는 가운데 소박한 존재가 됨으로써만 가능하다. 숲 산책으로 나타난 이 무인칭의 존재가 마을의 행복을 늘리기 위해서 마을에서 일하는 시간. 이것이 행복한 사람의 시간이 아닐까.'

숲은 지구가 생긴 후 생명의 터전이 되었다. 동식물이 숲에 기대 삶을 이어갔다. 탄소 배출을 줄이려는 인간의 노력에 비해 매일 사라지는 숲의 면적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농사와 원료의 생산으로 파괴되는 산과 숲은 바다의 고갈되는 자원과 함께 인류의 생존은 반대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마당에 심은 꽃나무 한 그루, 거리에 줄지어 선 가로수, 공원의 숲과 도서관의 수목 등은 생활의 근처에서 숨 쉬는 영혼을 가진 존재다. 지나치다 만나는 나무를 자세히 보면 다 같은 나무가 아니라 표정과 개성을 지닌 존재다. 해를 향하고 가지를 뻗고 빗물을 머금고 산소를 내뿜는 초록의 정령이다. 나무와 숲에 깃든 생명은 무한하리만치 광대한 규모다. 개발과 파괴로 마을마다 상징처럼 서 있던 노거수가 사라진다. 나이 든 나무는 그대로 역사가 되고 혼이 깃든다. 모든 생물과 사물을 대상화한 의식 체계에서는 집단 사육하는 동물에 번호를 매긴 인식표가 사육우의 고기와 가치를 대변하고, 수목과 숲은 그저 보기 좋은 생활 속의 부품 정도로밖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에게 성가신 나무는 사정없이 베어버리거나 팔다리를 자른다.

나무 아래 서면 오래된 지구의 이야기가 들린다. 과거로부터 들려오는 이야기는 미래의 암울한 소식까지 전해주는 듯하다. 동살 트는 아침 산책할 때마다 야생 사과나무 열매를 주머니에 담으며 숲에 감사하는 데이비드 소로우의 얘기는 전설이 되었다. 소나기라도 내리려는 듯 하늘이 캄캄해진다. 서둘러 강 잉어의 안부 살피러 다리 위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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