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감

by 소인

杂感 (34)


나는 비건도 세미 베지테리언도 아니다.


고기가 흔한 세상. 평소 육류를 즐기지 않아도 가끔 고기가 당길 때가 있다. 식구들도 가끔 고기 굽는 걸 좋아한다. 직장 시절 거래처 사람들과 도마 고깃집에 간 적이 있다. 개고기를 도마에 올려 데삶은 부추랑 섞어 먹는 메뉴였다. 집에 돌아가 보신탕 먹었다니까 아이들은 야만인이라고 멀리했고 함께 살던 치와와도 날 피하는 것 같았다.


시골에 내려와 일주일에 한 번은 마당에서 숯불 피워 고기를 구웠다. 남은 불로 된장을 끓이고 또 남은 불로 커피를 끓이며 밤하늘의 별을 헤다 잠들었다. 돈 떨어지자 마당의 바비큐는 사라지고 밥 끓이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고기는 귀한 것이 되었고 생기면 먹을 정도였다. 세월을 한 바퀴 돌아온 요즘은 어렵잖게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시골인 여기는 소나 돼지, 닭 키우는 풍경을 자주 본다. 공단이나 맞춤한 벌이가 없는 농촌에서 만만한 게 냄새나는 짐승 사육이다. 그것도 집단 사육이다. 소는 귀를 뚫어 매단 번호표에 의해 인식되는 존재다. 발목까지 차오른 똥 더미 위에서 자고 먹는다. 상상력이 모자란 나란 놈에게 소의 커단 눈을 보고 도저히 옛날 밭 갈고 논 삶던 농우 소와 겹쳐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식 같은 소'라고 말하며 사랑스럽게 쓰다듬고 돌본다. 세상에 자식을 잡아먹고 팔아먹는 부모는 없다. 하긴 요즘엔 그런 인간도 있긴 하다. 돼지는 암굴의 나폴레옹이다. 어두컴한 돈사에서 평생을 살다 근수 나가면 일생에 한 번 보는 햇빛이 제삿날 밥상이다. 영리하고 청결한 성미의 돼지는 인간을 향한 반역을 도모한 오래 전의 나폴레옹을 기억할까. 옥골선풍의 금계 장군(金鷄將軍)은 A4용지만 한 케이지에 갇혀 일평생 엉덩이에 주사 맞다 팔려 나간다. 냄새나는 돈사가 있는 마을의 주민들은 코를 쥐고 살지만 돈사 주인은 똥냄새가 향기로운 돈 냄새다. 삶의 질은 개판이고 손님 방문은 꿈도 못 꾼다. 논바닥에 공그리 치고 파이프 박아 세운 우사는 골골이 마을마다 들어찼다. 소값 파동이나 전염병이라도 돌면 죄다 흉물로 변할 거다.


이런 걸 보고 고기를 못 먹는다면 나이브하거나 순일한 감성의 소유자일 터다. 치맥과 삼겹살의 유혹은 현대인의 주메뉴가 되었으니. 사람에게 인권이 있는 것처럼 동물에게도 동물권이 있다고 일부에서 주장한다. 쾌고 감수능력(快苦感受能力)을 가진 존재의 권리는 보장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얼 먹을 수 있단 말인가. 인간 중심의 사고는 인간 외의 대상을 다루는 데 깊은 사유를 고려하지 않는다. 동물권을 단순히 쾌고 감수능력과 먹고 먹히는 문제로 다뤄져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의 조사관이었던 사회학자 장 지글러에 따르면 현재 생산되는 곡물로 지구 인구의 두 배인 140억 명이 먹을 수 있는데, 고기 생산으로 곡물의 50%를 사료로 소비한다고 한다. 또한 원조는 해당 국가 정권의 독재와 부패로 고통받는 인민에게 전달되지 않으며, 다국적 기업의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곡물을 재배할 경작지가 사라지는 것도 빈곤과 기아의 원인이라고 했다.


도시 태생인 나는 나물 반찬을 멀리했지만 지금은 즐겨 먹는다. 그렇다고 풀밭 위주의 밥상보다는 중금속 오염의 상위 포식자인 고등어라도 노릇하게 구워야 입맛 돌 거다. 비겁하지만 난 점진적 채식주의자라고 하겠다. 생일날 정해 배 터지게 고기 먹는 작가도 있지만 고기 먹는 날을 두거나, 달걀 유제품과 생선류에 한하든 채식을 향한 걸음을 디뎌야겠다는 게 요즘에 든 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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