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다.
올겨울 처음 한파다. 추위야 견디면 그만이지만 송송 얼음바람 들어오는 곳에 사는 사람들 난방비 무서워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며 웅크리고 사는 게 눈에 선하다. 기온이 뚝 떨어지면 방의 온도를 십오 도에 유지한다. 바깥 온도와 큰 차이지만 일상생활에 적당한 온도는 이십일 도 내외니 선득하게 지내는 편이다. 겨울에 실내에서 반팔로 지내는 사람들이 감기에 더 약하다. 더위나 추위나 에너지 빈곤층은 계절의 기온 변화에 민감하다. 특히 밖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기온은 노동의 곤핍함을 더하는 요소일 게다. 오래전 산이나 바다에서 일할 때도 더위와 추위는 고통 자체였다. 고통은 사람을 단련시킨다고 하지만 익숙한 고통은 어디에도 없다. 슬픔이 일상화되면 생명 활동인 삶이 위태롭다.
어릴 적 장작 때는 집에 살 때는 아랫목은 쩔쩔 끓어도 윗목은 냉골이었다. 아랫목엔 늘 시커먼 툼벙 같은 탄 자국이 보였다. 어찌나 뜨거운지 자다가 불에 데는 꿈을 꾸기도 했다. 승냥이가 우는 백석의 겨울답게 읍내 국숫집에선 막국수를 말았다. 노란 계급장을 달고 들어온 아버지의 명령이 떨어지면 막내는 냄비를 들고 국숫집으로 뛰어갔다. 승냥이 대신 마을 개들이 컹컹 짖고 낫을 닮은 하얀 쪽달이 내려다보았다. 지름길로 통하는 철조망 지나 잔설이 깔린 빈 배추밭을 지나면 상점의 불빛이 별처럼 조는 게 보였다. 초가와 양철지붕이 서로 이마를 맞대고 있는 읍내는 우리들의 별천지였다.
한 번은 소풍 가던 길에서 오 원짜리 종이돈을 주웠다. 작은형과 나는 하늘이 정수리에 닿도록 뛰면서 기뻐했다. 형제는 착한 아이가 아니었고 파출소는 멀었다. 형과 작당하여 소풍길을 뒤로하고 읍내 쪽으로 달렸다. 문구와 잡화를 파는 가게서 형제는 쇼핑과 만찬을 즐기고 산과 들을 쏘다니며 시간을 죽이다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 일 원이면 왕사탕이 열 개였다. 오 원짜리 연필깎이 칼은 함부로 사지 못했다. 큰 물이 지면 학교 앞 나무다리가 떠내려갔다. 아이들은 읍내 공회당에 모여 노래자랑으로 수업일수를 채웠고 선생님들은 입상자이건 아니건 아이들에게 공책과 연필을 골고루 노나 주었다.
추운 날 아침에 일어나 보면 윗목의 그릇에 살얼음이 덮였다. 형과 얼음을 깨물어 먹으며 웃기도 했다. 삼 형제는 식전에 개울에 나가 막소금으로 이를 닦고 세수를 했다. 우물이나 펌프가 있는 집은 동네서 몇 집뿐이었다. 강원도의 추위는 매섭고 독했지만 아이들은 양말도 없이 뛰어놀았다. 한국 전쟁 때 격전지였던 동네 뒷산의 참호에서 나무 총을 들고 다람쥐처럼 전쟁놀이를 했다. 분명히 명중시켰는데도 적들은 자꾸 살아났다. 승패는 우기는 쪽이 이겼다. 손등은 갈라져 피가 비쳤고 겨우내 더운물 목욕 한 번 귀하던 시절이었으니 발바닥엔 때가 꼬질꼬질하다 못해 윤이 났다. 까마귀가 형님아 부르며 따라올 지경이었다. 우리 집엔 바셀린 연고가 있어 수시로 발랐지만 친구들은 터진 맨살을 드러내고 학교에 다녔다. 집에서 기르던 개, 바셀린 연고, 산골에서 보기 힘든 도루묵 상자 등은 군대 물품이었고, 아버지는 가끔 그것들을 날라 살림의 소용으로 삼았다.
겨울 오기 전에는 사병들과 함께 군용 트럭을 몰고 산에서 땔나무를 하기도 했는데 아버지와 병사들은 노루를 잡으러 총을 들고 숲을 뒤지기도 했다. 부대에 딸린 배추밭에서 배추를 날라 김장을 할 때는 장교 사모님들과 사병이 어울려 배추를 절이고 무쳤는데 이백 포기 김장도 거뜬히 해치웠다. 지금 생각하면 남북의 대치 상황에서 소중한 아군의 전력을 김장 배추에 쏟아부은 꼴이었다. 그러나 김장도 전투요 땔감도 전투였다. 배추 뽑는 밭에 가서 배추 꼬랑지를 얻어먹곤 했는데 엄청 달고 시원한 간식거리였다. 지금의 개량 배추는 꼬리가 짧아 먹을 게 없다.
방학 오기 전까지 학교에서의 급식은 강냉이죽이었다. 군인가족은 제외되었기 때문에 맛있는 강냉이죽을 얻어먹기 위해 당번을 자청했다. 바께쓰를 들고 죽을 끓이는 급식소에 가서 가득 받는다. 흘리지 않도록 조심조심 복도를 지나 교실에 오면 빈 그릇을 책상에 올려놓은 아이들의 눈이 일제히 모아졌다. 자루가 달린 국자로 퍼주며 교실을 돌면 바께쓰의 강냉이 죽은 에누리 없이 동난다. 빈 바께쓰에 달라붙은 죽을 긁어먹는 맛이 어찌나 꿀맛인지. 담임선생은 입가에 미소를 달고 쳐다보았다.
가장을 따라 움직이는 군인가족은 이사가 습관이다. 아버지의 전출지로 주거를 옮기며 새 친구를 사귀는 일은 늘 긴장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오래된 계집애의 이름은 숙희와 선녀다. 선녀는 전학 가서 만난 아이고, 숙희는 이웃에 사는 군인의 딸이었는데 나보다 한 살 적었다. 숙희와는 사금파리 조각으로 밥상을 차리며 놀았지만, 선녀에겐 말도 제대로 붙이지 못했다. 나보다 어린 숙희는 소꿉장난할 때 언제나 각시 역할을 맡았는데 조용하고 고개 숙인 속눈썹이 길었다. 난 속으로 크면 숙희와 결혼하겠다고 생각했다. 선녀는 예뻤지만 목청이 크고 성격이 괄괄해서 두려웠다. 나이 들어 우연하게 숙희란 이름을 가진 여자를 만나 조심스레 고향과 선친의 직업을 물은 적이 있었으나 예상은 빗나갔다. 세상에 숙희가 어디 한둘인가.
이웃집의 만균이 아버지는 산골마을에서 소문난 천석꾼 부자였다. 만균이와 난 조 병장 아저씨한테 그림을 배웠다. 커서 생각하니 조 병장 아저씨가 가르쳐준 그림은 초가지붕에 박이 올라간 그림이었는데 판에 박은 이발소 그림이었다. 아저씨는 월남 가면 바나나를 한 상자 보내겠다고 약속했는데 정작 온 건 장교 모자를 쓰고 해변에서 찍은 사진과 바나나가 주렁 하게 달린 흑백사진이었다. 언젠가 만균이 아버지가 마을 밖에 사는 문둥이들에게 몰매를 맞은 일이 있었다. 의원도 없는 산골에서 아버지는 만균이 아버지를 부대로 데려가 정성껏 치료해주었다. 며칠 후 사냥터에서 돌아온 만균이 아버지는 우리 집 마당에 산꿩 열 마리를 던져주고 갔다. 그날 저녁 식구들은 꿩고기를 넣은 만두를 빚었는데 맛은 기억나지 않는다. 머릿속엔 자꾸 피 흘리며 쓰러진 산꿩의 모습이 겹쳐질 뿐이었다. 마을 밖에 사는 문둥이들은 가끔 읍내에 나타났다. 선글라스를 간신히 걸칠 정도로 코는 지워졌고 콧구멍만 뚫려 있었다. 손목엔 때 절은 붕대를 친친 동여맸다. 교회를 나가기도 했는데 사람들은 멀찌기 떨어져 그들을 쳐다보았다. 아이들을 잡아다 간을 빼먹는단 소문에 우리들은 문둥이가 나타나면 집으로 뛰어가 이불속에 숨곤 했다.
전학 간 학교에서 남자아이와 싸움을 하기도 했다. 수상한 녀석이 왔으니 본때를 보여주겠단 심산이었다. 선방을 날려 코피가 터지면 이기는 거였는데, 때로는 해 지는 개울가에서 주먹을 쥐고 서로 눈싸움을 한 시간 넘게 하기도 했다. 신나는 활극을 기대했던 친구들은 배고프다며 집으로 가자고 보챘다. 은빛으로 부서지는 여울에 저녁 고기가 튀고 좔좔 흐르는 물소리가 지금도 귀에 선하다.
아버지가 예편하자 가족은 짐을 부치고 기차 타고 아버지의 고향인 서울로 갔다. 기차는 마을 가운데를 지나고 논밭을 가로질러 미끄러지며 서울로 달렸다. 멀미를 했던 것 같다. 시골 아이의 눈에는 도시 풍경이 신기했다. 이사한 며칠 후 창경원에 갔다. 추운 날이었는데 사자도 있었고 원숭이도 보았다. 전봇대와 건물이 버스 뒤로 휙휙 내빼는 게 이상하고 신기했다. 학교에 가자 삼 형제는 교장실로 불려 갔다. 시골과 다르게 차가 많은 곳이니 차조심하란 말을 들었다. 이부제 수업의 콩나물 교실에서 학교에서 제일 어른인 교장 선생님을 만난 건 무섭고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운동장엔 햇볕에 반짝이는 왕모래가 시골의 개울처럼 반짝였다. 이젠 숙희도 선녀도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바지에 오줌 싼 것 같은 축축한 느낌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친구들에게 날 소개했다. 친구들은 강원도서 온 나를 감자 쳐다보듯이 말똥말똥 바라보았다. 전국 1,2위를 다툴 정도로 축구를 잘하는 학교였는데 담임이 축구부 코치였고, 선생님은 가정방문을 와서도 침을 흘렸다. 어릴 때 다친 후유증이라고 했다. 선생님이 민망하고 가여웠으나 내가 고쳐줄 순 없었다.
전학을 하니 시골서 줄곧 일등이었던 성적이 이등으로 떨어졌다. 일등 하던 여자아이의 이름을 지금도 기억한다. 궁궐의 지엄한 제조상궁 같았던 여자애는 내가 오기 전부터 공부와 반 분위기를 휘어잡고 있었다. 학교 앞 큰길엔 말이 끄는 수레가 길바닥에 말똥을 싸며 벽돌을 실어 날랐고 교문엔 번데기 장수가 신문지로 돌돌 만 종이컵에 번데기와 국물을 담아주었다. 쪽쪽 빨아 속살을 빼먹는 다슬기도 쌉싸레한 게 맛났다. 서울은 어린 소년에게 새로운 세계였다. 군 출신의 월급쟁이 아버지는 육 남매를 먹여 살려야 했고, 나에게는 가난과 외로움의 시절이기도 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고아원 아이들과 어울렸고 겨울방학 때 처음으로 가출을 시도했다. 혈혈단신으로 무임승차하여 내려간 곳은 전라도 곡성. 열한 살 겨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