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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 노동자

by 소인



노동은 인간 생존의 기본 요건이다. 그래서 노동은 신성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노동은 신성과 비 신성으로 변별되어 왔다. '함부로 가까이할 수 없을 만큼 고결하고 거룩한' 신성함의 허위는 역사의 계층 간 차별에서도 여실하게 나타난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노동에 대하여 “노동은 무엇보다 먼저 인간과 자연 사이의 한 과정, 즉 인간이 자연과의 질료 변환을 그 자신의 행위에 의하여 매개하고, 규제하고, 통제하는 과정이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외적 자연에 작용을 가하면서 이 자연과 자기 자신을 동시에 변화시킨다. 자연을 변화시켜 인간은 자신의 의식적 목적을 실현하고, 그것을 자신의 욕구에 적응시킨다. 동시에 인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높이고, 생활 상태를 더욱 개선하여, 인간 자신이 스스로를 변화시켜 간다. 원시공동체에서는, 노동은 공동으로 발생하고, 집단적이라, 노동의 성과물 또한 공동으로 분배되었으며, 착취라는 것은 없었다. 생산수단의 공유가 그 특징인 것이다. 그 이후의 계급 대립적인 경제적 사회구성체에서는 항상 인간의 노동은 착취의 대상이었다. 노예ㆍ농노ㆍ근대 노동자의 노동이 전부 그렇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서의 노동 천시는 사농공상의 신분질서에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위계적 질서를 고착화한 지배계급의 사상이었다. 평민과 구별되는 양반계층은 과거제도를 입신양명의 수단으로 삼았다. 문장을 잘하는 자가 정치를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관료가 되었다. 농사와 상공업에 종사하는 계층은 양반을 먹이는 수단으로 존재했고 더 나아가 천민과 노비의 가치는 물적 교환가치 외에는 살아 있는 생명으로서의 가치 또한 전무했다. 개 돼지와 같은 가축에 불과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도 조선 사회는 변화의 바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권력의 암투와 지역 간 파벌 쟁론으로 정치는 성난 민심을 다스리지 않았다. 오랑캐라 멸시하던 청이 득세한 세상에서도 소중화주의를 자처하며 명나라의 은공을 못 잊어 절치부심한 세력이 양반관료였다. 한때 18세기 북경의 유리창을 통한 서양 문물의 수입으로 실학의 물결이 대세를 이루었으나 정치의 활용에까지 이르진 못하였다. 삼정의 문란과 지배층의 부패로 19세기 무렵 매관매직의 횡행으로 양반의 비율이 인구의 팔 할에 육박할 정도였다. 사정이 이럴진대 농사는 누가 짓고 소는 누가 키우나. 시대인식에 눈뜬 민중의 불만은 1800년대 전국적인 민란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목표의식의 부재와 민중의 지원을 얻지 못한 민란의 거개는 토벌대에 의해 좌절되거나 하찮은 결과에 머물렀다. 오히려 부의 편중은 자본에 눈뜬 약삭빠른 중인 계급에서 시작되었다.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은 명문 대학에 진학해 대기업에 들어가는 거나 이른바 '사'짜 들어가는 전문 직업을 얻는 길이었다. 정신노동은 고급한 두뇌 활동이 수반되는 것으로 사회의 상위계층에 집중된다. 반면 육체노동은 저학력에 두뇌보다 근력에 의지하는 단순 노동으로 사회의 편향된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수입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고 삶의 질에서도 극단의 편차가 나타난다. 가난한 부모의 자식은 교육의 균등한 기회에서도 배제되어 거친 일자리와 가난을 대물림한다. 경비, 청소노동자는 연령과 소득에서도 그렇지만 저임금 구조로 노동의 조건도 열악하다. 민주적이지 못하며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이에게 노숙인이나 거리의 청소부 가리키며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돼'라는 어른들은 직업의 천함과 소득의 형편없음을 잘 안다.

가난한 형편이면 인간다운 삶을 살기 어려운 게 세상의 속내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건 지배층의 기만적인 언설이다. 그들은 그런 논리로 지배와 착취를 정당화하고 노동자가 연대하여 사회를 변화시키는 걸 두려워한다. 저임금 구조에 시달리는 노동자는 분명 사회의 한 축을 담당하는데 그들의 처우에 대한 개선에는 외면한다. 소득 분배의 불공정과 노동의 착취는 저들의 배를 불리고 기득권을 단단하게 만든다.


공장의 노동자는 한 울타리 안에서 옅은 소속감이나마 느끼며 일한다. 한솥밥을 먹는다는 동료의식인데 그중에서도 청소노동자는 일의 숙련도에선 저급한 축이나 나름의 보람을 지니고 일한다. 사람의 흔적은 역사요 쓰레기를 남긴다. 재활용이 가능한 역사의 교훈적 유산도 있겠지만 묻어 영원히 격리해야 할 유산도 있다. 기계에 매달려 이교대로 돌아가는 공장에선 갖가지 쓰레기가 나온다. 유압유의 누유와 그것을 닦는 기름걸레는 기본이고 잠을 쫓느라 마시는 커피와 음료 캔, 쉴참 피우는 담배꽁초 컵라면 생산 재료의 포장지 등 다양하다. 또한 공장의 불빛을 찾아 날아든 장수풍뎅이와 나방, 그리고 하루가 멀다 하고 집 짓는 거미류도 제거의 대상이다. 청소의 범위는 공장 전체에 꾸며진 공장스러운 조경에까지 미친다. 잔디의 잡초 제거는 물론 주목 철쭉류의 전정과 땅을 가리지 않고 올라오는 풀들과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공장이 쉬게 되면 청소노동자의 일도 없어진다. 쓰레기의 유무가 청소노동자의 밥줄이고 보람이다.

청소노동자를 바라보는 공장 노동자의 시선은 호의적이나 신경 쓰거나 배려할 겨를이 없다. 그들은 노동의 성질에 따라 차별하는 세상의 통념에 반해 청소노동자의 자존감을 건드리지 않는다. 다만 청소노동자의 입장에선 배출되는 쓰레기를 다소곳이 모아놓는 것만도 큰 도움이다. 흘러나온 기름이 공장 바닥에 떨어진 것도 청소노동자의 몫이다. 거미줄 걷고 거미줄로 꽉 찬 볼록한 거미의 배를 밟아 죽이는 것도 청소노동자의 일 중 하나다. 처음엔 끔찍했지만 하다 보니 금세 무감해지는 거였다. 거미줄을 걷고 거미 밟는 일에 열중한다. 거미는 빗자루가 달린 장대가 가까이 가면 본능적으로 줄을 떠나 달아난다. 그러나 인간의 손길은 거미보다 교활하고 재바르다. 이스라엘 전범 재판정의 아이히만이 떠올랐다. 한나 아렌트의 관찰에 의하면 아우슈비츠로 유태인을 보냈던 아이히만은 성실한 관료였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명령에 복종하면서 명령의 성질에 대한 사유가 전무했다. 인간의 양심을 들떼 놓고 일했던 것이다. 거미에서 비롯된 사유의 비약인가. 아이히만은 생각 없는 막대기였다. 그러나 프리모 레비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인간의 허위와 비극을 겪으며 자신을 지켜냈다.

'千金之子不死於市'란 말은 천금을 가진 부잣집 자식은 저잣거리에서 죽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돈이 많은 사람은 죄를 지어도 형벌을 면할 수 있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자본은 권력이며 유전무죄의 세태를 의미한다. 모든 노동자가 공정한 소득의 분배를 누린다면 삶의 가치 또한 고양될 것이다. 그러나 최저시급 인상에서도 보듯이 대기업을 비롯한 경제인연합은 마치 시급 인상이 한국 경제를 망칠 주범인양 몰아간다. 소상공인, 자영업자의 골목 상권을 빼앗고 중소기업의 납품단가를 후려쳐 이윤을 불리는 수법을 휘두른 저들이 을들의 이간질과 싸움 부추기는 것을 보면 실로 가소로운 인간 탐욕의 바닥을 느낀다. 노동의 착취는 단순히 자본가의 탐욕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계층 간 파급력 또한 광범위하고 커서 종국에는 사회 불안을 심화시킨다. 배추가 비싸면 양배추를 먹으라는 전임 대통령은 가난을 극복했다고 공공연히 떠벌리고 다녔다. 그러나 그는 시커먼 탐욕으로 노동을 천시하고 경멸하는 뱀의 입을 가졌던 거였다. 독재 정권과 유착하여 배를 불린 재벌 대기업 등은 투자 재분배에는 외면한 채 사내유보금을 늘리는 데 혈안이 되어 천문학적인 돈을 쌓아두고 철 지난 경제 위기 타령을 늘어놓는 것이다. 반노동 반사회적인 행위인 것이다.

노동은 사람을 살게도 하고 인간을 소외시키기도 한다. 새벽부터 시작하는 청소노동자의 하루는 길고 고달프다. '좀 많이 번다'는 건 최저시급에 대한 시간 싸움의 결과지 자본주의 배려는 아니다. 주 6일의 노동에서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의 휴식에서 무엇을 할 수 있나. 모자란 잠의 보충이 휴식이다. 삶다운 여가활동은 개인에 따라 혹독한 노력이 뒤따른다. 미뤄두었던 집안일과 제한적인 친교관계를 유지한다. 벌이는 적은데 몸은 고되고 여가시간은 부족하다. 새벽에 일어나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미화반 동료 중엔 평일 저녁에도 색소폰 배우기에 열심인 여성이 있는데 부러움의 대상이다. 그녀의 여타 문화적 욕구 또한 대단한데 개인적인 인생 역전에 대한 보상심리의 작용으로도 보였다. 그녀는 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밖에서 만나면 아는 척하지 말라고 한다. 한 번은 색소폰 멤버인 남자가 지나는 길에 들른다고 했더니 부랴부랴 청소복을 갈아입고 면회실로 달려가는 거였다. 그녀는 청소일 하면서도 청소부를 부끄러워했으나 공장 안에서 만큼은 명랑하고 활달했다.

도시의 청소노동자는 새벽 첫차를 탄다. 사무직들이 출근하기 전에 휴지통을 비우고 바닥 쓸고 닦아야 하기 때문이다. 새벽 버스나 전철에서 조는 사람 대부분은 청소노동자다. 밤샘 술꾼이나 가출한 연인들도 섞여 있다. 쓰레기통을 열면 상한 참외 냄새가 난다. 자연과 인간의 몸에 밴 냄새의 조합이다. 청소노동자 된 후 길 가다 담배꽁초 보면 줍고 싶어 진다. 쓰레기통만 보인다. 살아오며 함부로 버린 꽁초와 독설의 찌꺼기 찢어버린 휴지 같은 정념 패악의 언설 주워 담는다. 그리고선 다시 질질 흘린다. 불완전은 인간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한한 한계성을 말한 것이지 도주의 뒷구멍을 뜻하는 건 아니다. 청소노동자는 종일 줍고 거두고 쓸고 닦고 치운다. 삶의 정리요, 재생산인 셈이다. 숨이 탁탁 막히는 화덕 같은 열기에서도 청소노동자는 곰바지런히 움직인다. 사람은 누구나 일한다. 그러나 노동의 가치는 삶의 가치와 비례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자본의 시선에서 계량되고 판단된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노동의 소외는 인간의 소외다. 여적지 일할 수 있는 몸에 감사한다. 게다가 노동과 삶에 관계된 모든 것들에게 고맙다. 저들이 느끼건 느끼지 못하건 간에 말이다. 예전엔 새로움을 찾는 푸른 시절 있었다. 그런 이유로 일에서 지루함 느끼면 다른 일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이젠 상황이 다르다. 할 수 있는 노동의 범위가 엄정하게 제약되기 때문이다. 개인적 상황의 노동만을 말하려는 건 아니다. 지금도 살인적인 노동 강도와 비인간적인 처우, 열악한 임금구조의 악순환 속에서 신음하는 것이 이 땅의 노동자의 현실이다. 세계 최대의 인권단체인 국제앰네스티와 국제 사회의 석방 권고에도 정당한 노동의 권리를 주장한 노동운동가는 감옥에 갇혀 있다. 노조 파괴와 노동 착취의 연결 고리는 지금도 독버섯처럼 자란다. 노동은 모두를 살게 하는 신성한 가치임을 확신한다. 하지만 가치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신념이 아니다. 싸워서 쟁취하는 피의 대가와 교환될 때 진정한 가치와 의미는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지탱할 것이다. 청소노동자의 내일은 더럽지 않을 거다. 매일 새벽에 나와 치우고 쓸고 닦기 때문이다. 이 땅의 청소노동자들의 말끔한, 때 빼고 광나는 때깔 좋은 삶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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