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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

by 소인


축제가 시작되었다.
가을색을 띤 구름이 드문 하늘은 투명한 햇살을 쏘고 바람은 쾌적하다. 한여름 은어축제와 달리 축제장의 소음이 골짜기 마을까지 들리진 않는다. 예상과 달리 송이 수확량이 줄어든 탓일까. 송이 파는 천막 앞에서 눈치 살피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축제장의 천막은 열흘 전부터 설치가 끝났고 내성천 하늘 높이 띄운 애드벌룬은 축제를 알리는 듯 둥실둥실 떠다녔다. 낮 동안 더운 기세가 축제장의 차분한 열기를 데우기엔 맞춤한 날씨다. 송이가 산태나듯 물물이 나와야 등외품이나마 사서 소고기에 볶으면 별미다. 생김새는 일등품에 미치지 못해도 쫄깃한 맛과 향은 그대로다. 평소 소고기에 기갈난 사람도 고기보다 송이에 먼저 손이 갔다.

길이 험한 사오십 년 전의 송이는 가을 한철 맛보는 숲의 귀한 나물 같은 존재였다. 청호박 송송 썰어 멸칫물에 끓여 불에서 내리기 전 잘게 찢은 송이 몇 가닥만 넣어도 향긋한 버섯향이 밥상 가득 넘쳐났다. 숨넘어가도 자식에게 송이 나는 자리를 알려주지 않는단 소리가 나온 건 길이 뚫리고 송이의 가치가 알려지고 난 다음의 일이었다. 아무리 재물 욕심이 제일이라 해도 송이 나는 자리를 알려주지 않는다는 건 말 좋아하는 사람들이 과장해서 지어낸 얘기일 터. 시절이 변해 송이는 축제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그다지 돈벌이가 없는 벽촌으로선 일 년에 두 번 벌이는 축제가 흥청대는 잔치마당이다. 돈이야 송이꾼이나 은어 양식업자가 번다고 해도 농사와 밥벌이에 지천 군민에게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유명 가수와 듣보도 못한 물건을 들고 와 파는 장꾼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통돼지를 빙글빙글 돌려가며 굽는 술청이 차려지면 한두 잔 걸치는 재미 또한 빠뜨릴 수 없는 일과다.

축제는 공동체의 행사다.
수확의 기쁨과 전쟁의 승리, 일상의 고단함과 슬픔을 나누고 돋우는 위로와 격려의 놀이다. 골골이 나온 주민들은 축제를 통해 화합을 다지고 소식을 나누었다. 고대 국가의 광장인 아고라는 축제 마당이고 모인 사람들은 밥과 술을 먹고 마시며 춤과 노래를 즐겼다. 음력의 절기에 따른 농사 축제, 생산과 결혼 등의 일상은 축제를 거치며 의미를 곱새겼다. 고된 농사일을 농악과 노동요로 달래던 걸 금지했던 일제로부터 공동체의 축제는 조금씩 사라졌다. 군사 독재정권은 사람들의 모임을 불순한 동기로 의심하고 축제를 억눌렀다. 대학생의 서클 모임도 의심의 눈초리로 감시하던 정권 아래서는 밍밍한 동아리가 모였다 흩어졌다. 그러나 억압당하고 해체되면서 모임은 끊임없이 생겨나고 가지를 쳤다.

사상과 이념은 올바른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인식 체계다. 하지만 '올바른 세상'과 '평화'는 이쪽과 저쪽의 거리만큼이나 색깔과 맛도 달랐다. 체제의 억압에 순응하거나 체념한 사람은 가족의 안녕과 물질의 신앙에 몰입했고, 신념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은 살얼음 위를 걸으면서도 확신을 접지 않고 저항했다. 분단 상황이 굳어지며 통일은 하늘 위의 구름층을 벗어난 남의 일처럼 되어버렸고 자본주의는 신자유란 새로운 처세술을 사탕처럼 내놓았다. 사탕이라기보다는 아편이 어울릴 새로 들인 처세술 앞에 모두가 경배하듯 엎드렸다. 돈이라면 먹고 죽으려 해도 없는 사람들조차 악착같이 매달렸다. 돈의 유혹은 아편의 그것처럼 빠질수록 헤어 나오기 어렵다. 한 번 살다 가는 인생 골치 아픈 생각보다 일신과 가족의 안녕을 담보하는 건 출세와 재복이다. 존재에 대한 회의가 깊어질수록 명예와 재산이 모든 가치를 초월해 들어앉았다.

생태계의 지속 가능과 소수와의 연대를 통한 공동체의 가치는 빠르게 발전하는 생산과 효율의 측면에서 뒤로 처진 인식이 되어버렸다. 국가가 인정하는 한 정당한 수단이라면 부의 극대화는 지고의 가치며 이념이 되었다. 문제는 국가가 일반 시민의 권리를 포장하고 소수를 뭉개는 데 있다. 엄청난 부의 규모를 이루었음에도 사람들의 삶은 불안하고 두렵다. 안정을 지속하기 위해선 얼마큼의 재화가 필요한지 가늠하기 어렵다. 욕망은 만족을 모르듯 악착같이 질주하는 게 삶의 방식이 되었다. 갈 데까지 달리고 보자는 건 욕망의 기관차에 매달린 꼴이다. 권력과 부는 계층과 계층을 넘나들며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다. 출발에서부터 숟가락의 색깔이 달라져 삶이 결정되는 구조는 거대한 벽이 되었다. 억울하면 출세하라가 아니라 억울해도 가망이 없는 구조다.

집은 안전의 상징이 아니라 삶의 조건에 구체적 대상이 되었다. 결혼마저 포기한 세대는 안온한 삶을 위한 노력보다는 한 번뿐인 생을 즐기려고 노력한다. 실현 불가능한 꿈에 매달려 피 끓는 열정을 쏟아붓기엔 삶은 유한하고 아깝지 않은가. 욜로족이 생기고 명상센터가 붐빈다. 인간 존재의 근원과 삶의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고, 자신의 유의미한 삶을 가꾸는 사람들의 노력이 늘어간다. 교양강좌나 전통의 미와 지식을 단순 전달하는 인문학 강의를 벗어나, 동서양의 역사와 사상과 이념을 거쳐 선각의 생각을 현재와 잇대려는 사고의 전환이 융성해졌다. 허위와 진부의 옥석은 가려지겠지만 삶이란 어쩌면 옥석이 쌀과 겨처럼 한데 섞여 뒹구는 것인지 모른다.

공동체란 저마다 각각의 다른 빛깔의 꿈을 가진 이질적인 존재들이 살아가는 공간이다. 그것의 일체감을 조장하고 상상의 헛물을 들이붓는 게 국가와 경제 구조다. 사회적 위치의 부와 권력은 행복의 조건이 되었다. 존재에 대한 성찰과 분별은 '부귀영화'란 외피에 대한 몰입이 처세가 되었다. 기르던 양을 잡아도 하늘과 신에게 기도 올리는 유목민의 습속은 치열한 사냥터로 변한 삶에선 가치의 반열에서 밀려났다. 교육은 인간적 삶을 가르치기보다 부귀영화를 향한 도구가 되었다.

펑펑 축포가 터진다.
검은 하늘에 붉고 노란 불꽃이 퍼졌다 촤르륵 쏟아진다. 사람들은 밤하늘에 터지는 불놀이를 보며 자신의 삶도 환한 꽃길이기를 기원한다. 수신제가란 근친 공생의 이기주의를 꾸며놓고 몰 수단의 처세를 부추긴다. 찰나에 불과한 도락을 위해 기꺼이 몸을 던지는 도박을 불사한다. 생태계의 부분인 인간종은 사유하는 만물의 영장이란 타이틀에 걸맞게 행동하는 게 아니라 다른 종을 부수고 급기야 동종마저도 물어뜯는다. 상대를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는 절박한 사욕 주의가 공멸을 조장한다. 축포의 여음이 어둠에 묻힌다. 빛과 소리 없는 칠흑의 공간은 시간이 멈춘 무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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