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감

by 소인

杂感(51)


가난한 동네의 돈벌이 중 하나가 동물 사육이다.

예전엔 마을에서 닭이나 돼지를 키웠다. 시대가 변해 냄새나고 전염병을 염려해 닭과 돼지는 인적이 드문 골짜기로 들어갔다. 대량 사육이 시작된 거다. 생산성이 낮은 논을 콘크리트로 메워 대형 축사를 지었다. 아침이면 마을마다 소 우는 소리가 꽉 들어찬다. 소 돼지 닭을 키워 도시에 팔아 축사 옆에는 비싼 승용차가 서 있다. 개와 새벽 산책하는데 길가 농가에서 절그럭대는 쇳소리가 났다. 쳐다보니 우사에 죽 늘어선 소가 아침을 먹고 있었다. 철창 너머 고개를 빼고 긴 혀로 사료를 먹는데 움직일 때마다 철창에 목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비명소리가 났다.

초소에 앉아 있는데 빠른 속도로 차가 지나가며 비명이 들렸다. 창으로 보니 트럭 적재함에 플라스틱과 철망 케이지가 서너 개 실렸는데 거기서 나온 소리 같았다. 케이지 안은 보이지 않았다. 트럭이 백여 미터 앞의 굽잇길을 돌아 사라질 때까지 비명소리는 계속 들렸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케이지에 든 개는 건강원이나 보신탕집으로 팔려가는 걸까. 그 소리는 날 여기 가두고 어디 데려가는 거야, 어서 꺼내 줘!라고 울부짖는 소리였다. 젊은 개의 목소리 같았다.

곰돌이 생각이 났다. 뒤이어 내가 키웠던 개들과 개들의 죽음이 떠올랐다. 나도 딱 한 번 개장수에게 개를 판 적이 있다. 아들의 수학여행비 때문에 개를 팔았다. 녀석은 잠깐 개장수에게 적의의 이빨을 보이더니 순순히 끌려갔다. 개장수 트럭을 볼 때마다 팔려간 개가 생각났다. 늙거나 병들어 우리 곁을 떠난 개가 있었고 큰 개에게 물려가 행방을 몰랐던 개도 있다. 이사하면서 남에게 준 개도 있었고 집 나가 실종된 녀석도 있다. 개는 늘 우리 곁에 새로운 얼굴로 있었고 말은 없으나 서로 속을 알 정도로 친하게 지냈다.


개는 뜨거운 모래 해변의 뫼르소였다. 자신의 상황을 스스로 통제하지도 그렇다고 천사 같은 손길에 운명을 맡길 생각도 없다. 다만 나를 옥죄인 사슬 같은 현실에서 자유든 죽음이라고 하든 어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어차피 모든 산 것들은 고독한 존재라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타자의 생명과 함께 타자의 상황을 통제하려는 생각은 부조리하다. 누구도 그렇게 하도록 부여받거나 실행할 권리도 의무도 없다. 인간이 다른 존재에 비해 월등한 문명과 문화를 세우고 역사를 이끌었다. 그러나 인간이 바라는 행복한 삶은 어느 시대, 누구라도 도달하지 못했다. 인간의 문명은 생태를 파괴하고 환경오염을 부추겨 기후 재앙이라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중이다. 아프간에 친미 정부를 세우고 이십 년 동안 반군과 싸운 미국은 100조 가까운 무기를 버리고 도망갔다. 이제는 미국의 무기상이 탈레반 정권에 찾아가 무기의 사용법을 알려줄 차례다. 자본과 전쟁은 누이와 매부의 사이가 됐다. 사실 따지고 보면 꿀벌이나 개미 사회보다 인간 사회가 낫다는 증거는 없다. 인간은 사유하는 감정의 존재라는 면에선 짐승이라고 부르는 동물과 다를 게 없다. 왜냐하면 개도 기억을 되살려 생각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개미나 벌은 유전 형질에 새겨진 설계도에 따라 움직인다. 다만 그 생각을 잇는 사슬 관계의 논리적 사고 능력이 부재할 뿐이다.


개를 실은 트럭이 지나고 한참 되었지만 마음 내내 불편하다.

나도 개처럼 누군가에 의도된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른다. 자본과 국가와 권력이 기획한 대로 일하고 세금 내며 자본에 순종하도록 길들여진 것이다. 자본과 권력이 허락하는 한에서 꿈과 희망을 키우고 사랑하고 자유를 누린다는 뻔한 삶의 지도. 그것으로부터 탈주하려는 난 지리멸렬한 지도 한 장을 손에 쥐고 중언부언하며 사는 존재다.

비명을 질러대며 자신을 드러낸 개가 성삼문처럼 절명시를 짓고 의연히 죽음의 길로 들어섰는지 모르지만 그의 영혼을 위하여 고개 숙인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휴일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