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by 소인

杂文(300)


휴무 이틀째.

엎드려 책 읽고 있는데 연금공단 심사과에서 전화가 왔다. 담당은 장애 심사를 맡고 있는 연금공단에서 시내의 정형외과를 방문할 것을 요청한다고 했다. 최종 판정 전 확실한 장애 진료를 받으란 얘기인 것 같았다. 8월 초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읍사무소에 장애 등록 신청을 했는데 9월 둘째 날 연락이 온 거였다. 이번만 나서면 앞으로 진행이 수월할 거란 느낌이 들었다. 오후 한 시반에 시내 정형외과의원에서 담당과 만나기로 하고 도서관에 갔다. 저녁엔 양조장 막걸리 알바가 있다. 원래 오늘 새벽에 술을 빼기로 했지만 기온이 내려가 술 익는 시간이 길어졌다고 했다. 저녁이든 새벽이든 연말까지 가까운 초소에서 근무하니 지장은 없다. 단지 내년 초 남쪽으로 내려가면 나 대신 다른 이가 술 빼는 걸 도와야 한다. 손발이 척척 맞는 내가 빠지면 좀 당황할 양조장 내외의 표정을 상상했다. 모든 일은 변화가 따르는 법이고 적응해 갈 것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실내체육관으로 갔다.

코로나19로 문 닫았지만 실내수영장을 볼까 해서였는데 출입문과 창문이 높아 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재정자립도가 전국 꼴찌인 가난한 군에 새로 지은 실내체육관은 외양부터 빛이 났다. 실내체육관 화단에서 풀 뽑던 나이 든 여자 둘이 앉아 어슬렁대는 나를 쳐다봤다. 오는 길에 장날의 장꾼들이 커다란 고추 포대를 쌓아놓고 손님 기다리는 걸 보았다. 가을이 오긴 오는 모양이다.


어릴 적 동무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 나는 홀로 남은 공터에서 어둠이 밀려오는 걸 보고 있었다. 난 남들과 달랐는데 다르지 않은 것처럼 살았다. 남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그 무슨 대단한 결함이고 장애냐고, 당신은 정상인보다 탁월한 삶을 살아왔잖아. 정상의 말속엔 비정상의 결핍이 존재한다. 완벽이란 말속에 충만, 통일, 조화의 의미가 들어 있는 것처럼 장애는 결핍의 언어로 들린다.


남과 다르지 않게 산 건 아니었다.

열등감에 증폭된 자의식은 옆길로 엇나간 삶을 살았고 중심부에서 밖으로 떠돌며 주변의 삶을 살았다. 툭하면 가족에게 뼛성을 내고 폭언을 일삼았는데 가족은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도 나를 제어하지 못했으니 당연했다. 불행한 날이 많았다. 지금에야 나의 모자란 국량을 인정한다. 실패를 수습하기엔 나의 고집도 한몫을 하는 거여서 실패를 인정하고 가족을 떠난다. 지식은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앎은 또 다른 변화와 성장으로의 몸부림이 따를 때 제대로 아는 과정이 된다. 그러니까 앎이란 그저 안다는 것이 아니고 불확실, 불안, 의심과 더불어 확장의 몸부림이다. 좀 알면 위험하다. 어정뜨기의 앎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상황을 결정하니 맨날 지리멸렬에 중언부언이다. 세상은 보고 싶은 대로 보지 말고 보이는 대로 봐야 제대로 본다. 현실적이란 말은 처세에 능한, 상황 판단이 정확한 걸 이르는 말이 되었다. 진정한 현실주의자는 과거를 바탕으로 현실을 해석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자다. 그래서 현실주의자는 늘 우울하다.


실내체육관에 간 건 수영장을 보려고 했던 건데 실은 얼마 전 아레나 물안경을 '11번가'에서 샀기 때문이다. 스노클링 장비 중 수영모와 수영복, 귀마개는 있으니 물안경이 필요했다. 다 갖춰진 셈이다. 어릴 적 군인이던 아버지를 따라 임진강의 민간인 통제 구역에 들어가 미역 감고 놀다 중이염에 걸렸다. 장마 통의 흙탕물이 문제였던 것 같다. 자고 나면 베개에 고름이 흥건했다. 그때 이후 수영할 때 귀에 물 들어가는 게 극도로 두려워 귀마개를 꼭 챙긴다. 코로나 확산세가 숙지면 수영장도 다시 문을 열 거다. 연말까지 저녁 수영을 할 생각이다. 나이 들수록 울퉁불퉁한 근육보다 뭉근하게 오래가는 근력이 중요하다. 영법만 제대로 익히면 다음은 얼마나 오래 물 위에 떠서 가는가의 문제다. 근력과 근육의 조화가 시간을 좌우한다. 깎아지른 돌섬을 탈출한 에드몬 단테스나 빠삐용은 아니더라도 목표는 철인 삼종 경기다. 트라이애슬론(triathlon)의 올림픽 코스의 경우는 남녀가 각각 수영 1.5km, 사이클 40km, 마라톤 10km 등 전체 51.5km 거리를 경쟁한다. 물론 선수 수준은 아니고 완주가 목표인데, 내게 가장 취약한 종목은 달리기다. 이십 대 때 친구들과 덕소에서 한강을 건너고 한탄강을 헤엄쳐 건넜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아무리 초월적 사유로 시공을 꿰뚫어도 그건 소금쟁이의 표면장력에 불과하다. 심연의 바닥까지는 알 수 없다.


약속 시간 십분 전에 병원에 도착했다.

대기실 의자에 앉아 TV 모니터에 시선을 두고 연금공단 담당을 기다렸다. 점심을 먹은 간호사 둘이 양손에 음료와 간식을 들고 들어온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내 앞을 지나 의자에 앉는다. 굽은 등 위에 중력의 무게가 느껴진다. 아이의 이름인 줄 알고 엄마 이름을 잘못 부른 간호사가 급히 사과하며 웃고 엄마가 괜찮다며 따라 웃는다. 시내라 진료과목 하나로도 사람들이 붐볐다.


가슴에 이름표를 매단 여자가 들어오더니 핸드폰을 꺼낸다. 내가 일어서서 다가갔다. 눈이 마주치며 커진다. '안녕하세요? 공단 심사과...' '아, 네. 차는 잘 주차하셨나요?' 주차까지 신경 쓰는 그녀의 마음씀은 오전에 통화할 때부터 세심하고 친절했다. 나 만한 키에 날씬한 미인이었다. 그녀가 간호사에게 눈짓을 주자 '들어가세요...' 한다. 간호사의 입술은 방금 쥐를 두 마리나 해치운 색깔이다. '들어가시죠' 연금공단 담당자는 내 앞으로 손날을 내밀며 뒤에 선다. 어두컴한 진료실에서 솥뚜껑만 한 손으로 폰을 만지던 의사가 허리를 펴며 우리를 쳐다본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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