杂感(59)
시골 읍내나 외곽에 이런저런 현수막이 걸린다.
광고가 대종이고 축하, 격려 이런 것들이다. 명절을 앞두고 지역에서 방귀깨나 뀌는 것들은 선거를 앞두고 머리 조아리며 친절해진다. 평소와 다른 행실에 실소가 나온다. 현수막 내용 중 골 때리는 건 자식의 자랑질이다. 누구 네 자식이 별을 달았다든가 무슨 어려운 시험에 붙었다든가 하는 걸 주르륵 써넣어 알린다. 함께 경축하자는 건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경쟁 사회에서 좋은 자리를 선점한 그들의 앞날이 잘 풀리리란 건 알겠으나 그게 나와 이웃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두고 볼 일이다. 자식의 성공을 대리 만족하는 부모의 눈물겨운 심정을 알만도 하지만 아무래도 부박(浮薄)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마치 선택된 반열에 오르는 신고식 같아서 토 나올 것 같다. 무슨 뜻인지 모르고 멍하니 보고 지나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 환하게 펄럭이는 현수막. 어쩌면 저 새끼도 누구처럼 차곡차곡 도둑의 경력 쌓아 금배지 달고 불특정 다수의 등짝에 빨대 꽂고 쪽쪽 빠는 천하의 잡놈이 될까. 공동체의 바람인 다수의 삶과는 동떨어진 가문의 영광 잔치 마당에 똥물 끼얹어 미안하다만 우리가 사는 병든 세상에 병든 사람들 머리 위에 이런 것 매다는 현실이 슬프다. 서로의 아픔을 보듬고 눈물을 씻어주는 게 사람의 일이라면 지 새끼 잘났다고 자랑질하는 건 신자유의 승자독식을 널리 알려 후세에 전하기 위함이다. 내 새끼 이렇게 잘났으니 좀 알아달라는 거다.
자본의 본성 중 하나는 차별을 조장하는 능력주의다. '내 능력껏 일해서 올라온 자린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는 신자유주의에 쩐 사람이라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알아들을 리 없다. 능력주의와 차별은 뿌리가 깊다. 삶은 인정 투쟁이고 각자도생의 현장이란 말은 냉정하고 인정 없는 사회에 어울리는 말이나 공동체의 이념과는 배치되는 말이다. 인간의 삶은 능력 없고 못나고 부족해도 존중받아 마땅하다. 생태라는 부면에서 보아도 혼자서 살아가는 존재는 없다. 예전의 왕에게는 신하와 백성이 있었고, 현대의 국가는 주권을 가진 국민으로부터 출발한다. 물론 국가는 주권자인 시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지만 때로는 폭력으로 시민을 통제한다.
대문에다 커다란 태극기를 하늘 높이 내다 건 집들을 볼 때마다 마음 불편하다. 누가 나의 눈물겹고 애타는 절절한 나의 애국심을 알아달라는 듯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시사철 나부끼는 태극기는 사상 검증의 의식을 거친, 난 빨갱이가 아니라는 우리나라 특유의 사상 트라우마가 스며 있다. 난 좌빨이 아니니 공동체에서 배제시키지 말아 달라는 절규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인정 욕구는 눈물 나게 처절하다. 개인의 가치관과 선호도 사회와 문화의 결과이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꾸는 꿈과 희망, 욕망조차 사회가 원하는 타인이 원하는 걸 욕망하도록 조작되어 있다는 거다. 자본주의 사회는 출발부터 병적인 사회다. 자본의 논리가 증식되어 세뇌된 사람들이 자신을 위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본을 위해 살다 가는 것이다. 이걸 깨닫는다면 얼마나 허망하고 억울할까. 인간의 욕망은 만족을 모른다. 종점을 향해 달리는 기관차는 가속도가 붙어 멈추지 못한다. 멈추기 위해선 엔진의 열을 식혀야 하는데 제동장치는 망가지고 냉각제가 없다. 삶을 궁구(窮究)하는 서늘한 사유는 사라지고 쾌락을 즐기는 신경만 살아 꿈틀거린다. 현수막에다 제발 유치한 글귀 늘어놓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