杂感(60)
수영장에 다닌다.
쉬는 날엔 낮에 가고 근무일엔 저녁 먹고 간다. 주 오일 수영 생활이다. 시골에 수영장이 생겼다는 건 촌놈에게 득의만만한 사건이다. 문화생활이라야 문화원이나 여성회관에서 하는 기능 위주 강습이 대부분이고 가끔 외부 강사가 와서 강의를 해도 시간 맞추기 어려우니 문화생활은 그림의 떡이다. 다행히 실내 체육관이 생기고부터 운동하는 사람이 늘었다. 시간 내서 하자고 하면 산책, 조깅은 물론이고 테니스 탁구 동호회도 있다. 물을 좋아해서 수영장이 생기길 고대했고 몇 년 공사한 끝에 실내 수영장을 열었다. 읍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강습권은 하늘의 별 따기였는데 코로나19까지 겹쳐 수영장은 툭하면 문 닫았다. 일 년 후 코로나가 숙지고 나서 수영장에 갔다. 강습은 중단되었고 자유 수영이 유일했다. 유튜브에서 국가대표 출신 강사의 강의를 닳도록 보고 또 봤다.
바다에서 스노클 경력 십오 년이지만 수영을 제대로 배운 적은 없었다. 일주일 만에 호흡이 트였다. 이십오 미터 레인을 왕복한다. 매일 조금씩 동작을 익히니 재미가 났다. 횡영(橫泳)은 제일 자신 있는 종목이다. 옆으로 누워 가위차기로 글라이딩하면 천정의 깃발이 쉭쉭 지나간다. 물속 스타트 후 돌핀킥에 스트롴까지 혼자 익혔다. 살아오면서 뭐든지 혼자 익히지 않은 게 없다. 이론을 겸비해 몸으로부터 느끼는 감각이 오래간다. '동물적인 감각'이란 수많은 기초 훈련에서 나온다. 따지고 보면 수영은 종목이 많다. 시합은 자유형, 평영, 배영, 접영과 다이빙이지만 인명구조사(life guard)는 헤드업 자유형•평영과 횡영, 잠영(潛泳), 입영(立泳), 트러젠(trudgen) 등 다양하다. 일주일 만에 만난 초급의 사내가 알은체하며 잘하신단다. 별말씀을! 수영은 물의 저항을 최대한 줄이고 몸을 유선형으로 만들어 나아가는 동작이다. 어제는 돌핀킥 오늘은 오픈 턴으로 오십 미터 완주다. 내일은 플립 턴 연습이다. 매일 조금씩 쌓아가면 백 미터 오백 미터도 가능하리라. 물 밖보다 풀 안에서 물의 저항을 몸으로 느끼는 게 스릴 있고 재미있다. 벌써 여름의 바다 수영이 기다려진다.
본의 아니게 독거생활 계획을 들키고 말았다.
잡문을 끼적여 sns에 올리다 보니 속내를 드러내는 것도 본의가 아니랄 것 없다. 다만 잠시가 될지 계속 이어질지 몰라도 독거를 꿈꾼다는 건 철저히 혼자 있고 싶다는 거다. 혼자 밥을 끓이고 낯선 마을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인식을 얻겠다는 거다. 인생은 홍로점설(紅爐點雪)과 같이 뜨거운 화로에 눈을 뿌리는 것처럼 거대한 물결 앞에 맥을 못 추는 상태다. 그럼에도 당당히 또는 비루하게 한뉘를 살다 가는 것이다. 매일 같이 뻔한 밥벌이, 진부한 희망, 구태의연한 인연과 만남 또는 이별. 딱 부러지게 정해진 길로만 가기에도 벅찬 삶의 여정에서 단 몇 달 몇 년이라도 진부한 일상에서 훨훨 날듯이 멀리 떨어져 살 수 없다면 삶은 고인 물의 녹조만큼이나 부글부글 끓다 말라버릴지도 모른다. 새장 안의 새를 날려 보내면 도로 새장으로 날아오듯이 사람도 저 살던 물속의 사정이 안온하고 물 밖의 세상은 두려운 법이다. 하지만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보듯이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면 깊고 먼 인식도 멀기만 하다. 물리적인 거리뿐 아니라 심리적 거리도 마찬가지다. 생각만 한다고 깊은 사유가 솟아나진 않는다. 책과 현자의 말을 통해 곱씹은 사유라야 발전이 있는 법이다. 공부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공부하지 않으면 사유도 성찰도 고인 물을 면치 못한다. 공부 없는 사유는 고집과 독선으로 똘똘 뭉쳐 중언부언하다 지리멸렬로 빠진다.
며칠 전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남쪽 섬에 간다면서 언제 가느냐고 생활은 어찌하느냐고 속사포 같은 질문이 튀어나왔다. 친구는 말미에 바다에 놀러 가겠다 했다. 난감했다. 혼자 있고 싶다는 말은 목구멍에서 맴돌았다. 저간의 사정을 친구가 알 리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