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새

by 소인

참새


참새가 이파리처럼 가지에 붙어 있다.

아침 해가 막 떠오른 무렵이다. 간밤에 기온은 어김없이 영하로 떨어져 추운 밤이었다. 새들은 마른풀 속에서 잠을 뒤채다 햇발의 기운을 얻어 몸을 녹이는 중이다. 저들도 계절의 감각을 몸에 익혀 춥고 더운 때에 대처하는 법을 안다. 짝짓고 알을 깨고 태어난 것들은 스스로 먹이를 찾아 적응하는 습속을 깨쳐야 살아남는다. 어미가 벌레를 물어다 주는 기간은 짧다. 천적을 피하려면 육추(育雛) 기간이 짧을수록 좋다. 들짐승은 태어나자마자 탯줄을 달고 달린다. 인간은 늙은 자식을 주머니에 넣고 키우는 경우가 있다. 그만큼 혈육의 인연이 끈질기다. 예전에는 형제와 가족의 인연을 중하게 여겼지만 지금은 개인주의가 팽배한 탓도 있지만 가족도 개체의 존재를 존중하는 점에서 개인의 삶에 끼어들지 않으려는 경향이 짙다. 끼어든다고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게 또한 세상 일이다. 부모의 몸을 통해 태어난 존재지만 부모와 자식의 삶은 엄연한 별개의 상황이다. 자식이 성장하고 교육받으며 사는 동안 부모는 책임과 관리를 해주어야 하지만 성인이 되고부터는 스스로의 삶을 살아야 한다.


동물의 경우도 인간의 시선으로 해석해서 그렇지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다. 형제 부모의 기억도 희미해지는 요즘엔 수십 년 등을 대고 산 배우자도 다 큰 자식도 점점 애틋한 정이 사라지는 것 같다. 아들은 마치 먼 데 사는 잘 아는 청년처럼 여겨야 맘이 편하다. 가는 건 순서가 없어 이별은 순간의 사건이 되겠지만 정리할 것도 여한도 없다고 생각하니 홀가분해진다. 실은 정리할 것과 여한을 체념한 까닭이기도 하다. 수십 년 관계에서 얼크러진 게 어찌 없겠는가. 그렇다고 맺은 인연이 쉬이 끊어질 리는 물론 없다. 아쉬워도 대체로 나는 그것마저 지고 가야 한다는 쪽이다. 비겁하고 무책임하다면 그렇기도 하다.


완벽한 상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완벽의 이상은 상상으로만 가능해서 완벽이라고 착각한 것을 완벽으로 믿는다. 완벽해 보이도록 살뿐이다. 완벽은 성공, 출세, 행복과 맞먹는 가치로 여긴다. 사랑, 우정, 애국, 미움... 삶과 죽음조차 불완전한 상태로 이어진다. 문제는 타인과 비교하는 의식에 있다. 자본주의는 타인과 비교 경쟁하는 걸 부추기는 사회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고 타인의 인정에 목말라하는 개인을 양산한다. 불명예를 죽음과도 바꾸는 사회지만 뻔뻔스러운 것들은 용케도 치욕을 견뎌낸다. 전직 대통령은 감방 안에서 모아둔 돈을 쓰지 못하고 죽을까 봐 끌탕할 거다. 그런 사람도 자식을 키우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억울해한다. 세상은 넓고 다양한 사람이 사는 곳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고 지금의 선택에 달려 있지만 선택이란 자신의 세계관에서 비롯하니 자신의 가치관은 믿을 게 못된다. 변화와 성장은 인식의 확장이란 국면에서 꼭 필요하다.


나는 잡문을 써대면서 살지만 글을 끼적이며 느끼고 반성한다.

글이 말을 따르지 못하고 아무리 말을 잘해도 심중의 바닥까지 뒤집어 보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는 일을 멈출 순 없다. 그것은 내게 있어 삶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동의하지 않는 '좋아요'를 인정한다. 난 미욱하고 덜 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 생각을 상대에게 강요하거나 주장할 생각은 없다. 받아들이는 쪽의 생각과 가치를 존중할 뿐이다. 살다 보니 잡다한 경험을 많이 한편이다. 낙엽 지추(落葉知秋)의 명민한 머리라면 모르겠으나 난 대체로 늦게 깨치는 쪽이다. 아침에 했던 생각이 저녁에 뒤집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중심 없이 흔들리는 세상에다 핑계를 대면 낫겠지만 기실 흔들리는 건 내 마음이다. 남이 아는 내 마음을 내가 모르는 건 당연한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를 알려면 타인의 얼굴을 뜯어보아야 한다. 가족과 남들이 보는 나는 즐겁게 남을 웃게도 하는 사람이면서 고집 세고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다. 또한 나도 그런 남들의 안목에 대체로 따르며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이기적이며 비굴한 것도 그들의 생각일 수 있다. 소심하고 예민한 성정으로 때에 따라 감정이 들쭉날쭉하는 것도 맞는 말이나 요즘은 두어 가지에 꽂힐 뿐 조락(凋落)한 식물처럼 쭉정이만 남았다.


삶의 스승은 많다.

나는 책을 통해 만난 스승의 생각을 나의 가치관에 대입하고 산다. 사물, 사람들을 만나면서 스승의 면모를 발견하기도 한다. 인간의 꿈과 이상은 옛사람들이 꾸고 가꿔온 가치에 다름 아니다. 인식의 확장이란 옛사람의 생각을 듣고 배워 자신의 패러다임을 다지는 일이다. 그밖에 삶의 잡다한 경험은 인식의 반복이거나 확인의 과정이다. 과거로부터 온 것에 현재의 사람이 내일을 꿈꾸는 과정이 역사다.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진 사상은 없다. 선인(先人)의 생각을 좇아 다듬고 새기는 과정 없이 새로운 사상은 태어나지 못한다. 역사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우연을 거듭해 진행된다. 시대인식과 조건, 우연성이 역사의 세 가지 요소라고 믿는다. 당대를 읽지 않고 당대 사람의 인식을 논할 수 없다. 서민의 사정을 경험하지 않고 올바른 지도자가 될 수 없다. 고민하지 않는 지도자는 시민을 대표할 수 없다. 철학 없는 양아치 인식으로 세력을 휘몰아 권력을 도모하는 무리는 시민의 힘으로 패퇴시켜야 한다. 그럼에도 작금의 상황은 나를 우울하게 한다.


참새는 정말 잎이 된 듯 꼼짝 않고 매달려 넘어오는 햇살을 쬐고 있다.

빈 사과나무 과수원 우듬지엔 남은 이파리가 배배 꼬여 바람에 떨고 있다. 얼마 후 농부는 가위를 들고 나타나 웃자란 가지를 잘라낼 거다. 땅 위에 농부의 입김이 퍼지고 풀이 돋아나는 봄이 오면 겨우내 죽은 것처럼 난짝 엎드린 것들이 파란 싹을 올리고 기지개 켤 거다. 자연의 순환은 변함없는데 숲을 흐르는 공기와 물이 심상치 않다. 만들어 쓰고 버리는 데 익숙한 사람들에 의해 환경은 오염되고 무너진다. 기후학자, 환경 운동가들이 나서자 각국의 정상들이 손가락을 걸고 환경 보전을 약속한다. 하지만 사양의 길로 접어든 초록별의 앞날이 밝지 않다. 가속화된 괴물의 제동장치를 움직이기엔 시간이 없다.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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