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속의 모텔

by 소인



한낮의 태양은 텅 빈 콘크리트 주차장 바닥을 녹여 버릴 듯 맹렬한 기운을 쏟아붓고 있었다. 모텔 옆으로 손바닥만 한 그늘 아래 검은색 뉴그랜저가 숨 넘어간 듯 붙박인 채 멈춰 있었다. 새벽에 들어온 노래방 주인 은혜는 에어컨 바람 쏘이며 잠에 떨어진 것이 분명했다. 명철은 열기가 남아있는 빈 물병을 안고 식당으로 향했다. 작업단 일행은 오전 풀베기를 끝내고 점심 먹으러 남부 식당으로 들른 거였다. 동해안 해안선 따라 여기저기 기계충 앓는 머리털 모양으로 작업현장이 흩어져 있는 터라 오늘도 현장을 옮겨가며 작업 마치고 점심시간에 맞춰 숙소인 모텔 앞 식당에 들렀다.

주 씨 등 작업단 일행은 오전 풀베기에 넌더리가 났는지 연신 식당 앞 급수대에서 찬물을 빼먹고 있었다. 풀베기 작업이 나흘째로 접어들었는데도 오전 해 뜨고부터 줄줄 흐르는 땀줄기에 밤새 얼린 페트병 주둥이 빨아대느라 정신없었다. 덕산댁이 호들갑 떨며 차려낸 점심상을 앞에 두고도 누구 하나 선뜻 수저를 들이대는 이가 없었다. 어지간히 지칠 대로 지친 모양이었다. 병출 씨는 땡삐에 쏘여 부어오른 손을 쓰다듬으며 시계를 보았다.

"벌써 한 시네, 후딱 밥 먹고 삼십 분은 자고 가야 쓰겄는데......"

"밥이 넘어가야지 말이지. 내사 더윌 먹은 것 같소"

남 씨가 긴 속눈썹을 열며 말했다.

"니기미, 찬물만 잔뜩 묵어놔서 배가 퉁퉁 뿔어 밥이 들어갈 것 같지도 않네."

학기 씨가 미역냉국에 숟가락을 적시며 밥을 한술 떠올렸다. 식탁 앞에 틀어 논 대형 선풍기 바람에 국물이 몇 방울 튀어 날랐다.

"두 시 반까지 푹 자고 한 세 시쯤 올라가지."

김 반장이 걱정 반 달램 반으로 중얼거리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남부 식당 반찬은 항상 구미에 당기지 않았다. 집에서와는 달리 조미료를 잔뜩 친 데다가 설탕 아니면 매운 청양초로 국물 내는 통에 수저 내밀기가 어느 것 하나 마뜩잖았다. 일이 끝난 저녁때라면 허기를 반찬 삼아 억지로 욱여넣겠지만 새벽에 일어나 깔깔한 입속인데 일 하려면 억지로 물 말아 채워 넣어야 하는 것이 여간만 고역 아니었다. 그런데다 오늘은 간밤에 내린 빗물기가 햇발 비치고부터 푹푹 찌는 가마솥으로 변해 고로쇠 식재지에서 어린 묘목 다칠라 조심조심 예취기 들이밀다 보니 일은 일대로 더디고 축 젖어 늘어 터진 윗도리에서 흐르는 땀줄기가 팬티며 바지를 적셔버려 샅으로 끈적한 기운이 뻗쳐 불알마저 퉁퉁 붇는 느낌이다. 차라리 음식 맛 좋기로 알아주는 월송정 기사식당으로 내달려 점심을 챙기고 현장으로 갔으면 했는데 얼음물 조달 때문에 남부 식당으로 들를 수밖에 없었다.
"냉국은 장물로 간을 봐야지, 소금에다 간을 보면 우짜노."

툴툴거리면서도 학기 씨는 냉국을 훌쩍 털어 마시고 남은 얼음 조각을 우적우적 씹어 삼켰다. 모두들 더위에 지친 탓에 밥을 양껏 먹지 못하고 찬물만 몇 잔씩 들이키며 점심을 마쳤다. 김반장은 커피믹스를 따서 식당 앞 평상 그늘에 걸터앉고 학기 씨 일행은 빈 종이상자를 들고 잽싸게 모텔 뒤로 향했다. 그늘을 차지하기 위해서다. 주차장 가로질러 가는 그의 등 위로 여전히 맹렬한 햇살이 내리 꽂혔다. 명철은 페트병에 물을 채워 냉동실에 차곡차곡 넣은 다음 왕피천 개울가의 수양버들 그늘 아래에 놓인 들마루 위로 벌렁 자빠졌다. 나무 위로 기어오르던 불개미 한 마리가 먹이를 찾은 듯 그의 옆자리로 방향을 틀었다. 동민은 잠잘 자리를 찾느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성류굴을 산 아래 품은 야트막한 구릉을 병풍 삼아 모텔이 진을 치고 그 앞에 널따란 주차장이 용암이 휩쓸려 내려오다 굳어버린 형상으로 퍼질러 자리 잡고 있었다. 기념품 파는 가게와 충청도 건어물 가게 그리고 남부 식당과 진주식당이 다가오는 휴가철 삼복더위를 호기로 버텨보지만 오늘같이 뜨거운 날엔 차양 밑을 맴도는 파리조차도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 같았다. 동민은 명철이 누운 옆자리에 드러누워 잠을 청했다. 파란 하늘 점점이 흰 구름 박혀 있는 게 금세 비구름으로 뒤덮일 것 같지는 않은데 텔레비전에서는 밤마다 장마가 밀려오고 있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었다. 기상캐스터의 이름 가운데 쓰는 '우'자가 필시 비 '우'자 일거라며 멀거니 들여다보던 시선이 멈추는 곳은 그녀가 일기도를 설명할 때였다. 갸름한 상반신에 비해 볼록하게 솟은 젖가슴의 볼륨이었다. 방송국에서는 어쩌면 기상캐스터 뽑을 때도 남자 시청자의 시선을 의식하지는 않나 그래서 조금이라도 시청률 경쟁에 보탬을 노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매번 일기예보 볼 때마다 동민의 머릿속을 스쳐가곤 했다.

동민이 서면 작업단에 들어온 지 한 달이 넘었다. 백암온천에서 소나무 솔잎혹파리 방제 주사 놓을 때 들어와서 풀베기로 들어섰으니 산림작업에서 제일 힘들다는 일 중의 한가운데에 와있는 셈이다. 집에 있을 때만 해도 집 근처의 영림 작업단에서 일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군 전체면적의 팔 할이 넘는 국유림 임지를 관리하는 근동의 작업단 수는 너무 차고 넘쳤다. 거기에다 산림청에서 도급을 맡아 벌이는 작업단의 할당량은 각 작업단 별로 균등하게 나누어지는데 그 일만으로 생계를 꾸려가기엔 벅찬 것이 현실이었다. 그나마도 넘치는 작업단 숫자에다 빠지는 멤버가 없어서 티오가 없으면 가입이 불가능했다. 산골 밥벌이에 필요할 것 같아 한 번 낙방하고 두 번째 땄던 산림기능사 자격증에 인감증명서까지 떼서 들이밀었지만 두 달 여를 기다려도 종무 소식이었다. 마침 알고 지내던 산림청 직원이 서면 작업단의 김반장을 소개해주어서 들어올 수 있었다. 이들도 따지면 동민이 사는 같은 군의 사람들이지만 군의 끝자락에서 고개 하나 넘으면 울진군으로 속하는 지리적인 위치로 울진군의 일을 하기가 수월한 까닭에 이쪽 일을 하고 있는 거였다. 한 동네 출신이 거지반이라 서로가 동서 아니면 처남 이모 아재, 할아버지 뻘로 이루어진 인척 간이 작업단의 구성을 이루고 있었다. 각성받이들로 모인 것에 비해선 오히려 장점 많을 수도 있겠지만 요즘같이 바쁜 농사철에는 집안일 구실로 빠지는 숫자가 늘어 안 그래도 한여름 수간주사니 풀베기로 돈 안되고 일 고달픈 때에 현장 꾸려 가기가 여간만 힘들지 않다는 것이 김반장이 요즘 입에 달고 다니는 푸념이었다.

동민이 서울서 내려온 지도 삼 년째로 접어들었다. 제법 잘 나가는 광고회사에서 한 계단씩 올라가며 승승장구하던 그가 친구의 제의로 자신의 회사를 차리면서 궤도는 어긋나기 시작했다. 꽤 믿을만한 광고주를 독립하면서 꿰차고 나왔는데 하필이면 IMF가 터지면서 석 달치 전파 광고료와 신문광고료를 물려 버렸던 거였다. 십 년 넘게 거래해 오면서 동민은 자신이 분신처럼 키워 온 브랜드가 회사와 함께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걸 뼈 시리게 목격했다. 고개를 떨군 광고주 앞에서 동민은 할 말을 잃었다. 배 쨀 수도 감방에 처넣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급기야 광고주는 득달같이 밀려오는 채권단을 견디지 못해 빚으로 세운 자신의 회사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렸고 동민은 사십 평생 알곡처럼 모아 논 재산을 남김없이 털어 내 빚잔치를 벌였다. 한동안 집 떠나 독주를 마시며 앞일을 도모했지만 그에게 일어설 수 있는 여력은 남아있지 못했다. 더 이상 도시에서의 생활은 넌더리가 날 지경이었다. 그는 보름간의 방황에서 돌아와 아내에게 고백하듯이 시골 행을 종용했다. 굳게 다문 입을 열지 않던 아내가 단정하듯이 말을 꺼냈다.

(단, 우리 친정 동네는 안돼요. 그리고 딱 삼 년 만이에요. 그 후에도 시골이 살만하다면 계속 살고 그렇지 않다면 다시 올라와 시작하는 조건이에요)

동민은 그녀의 그런 제의를 가타부타 수긍하는 척 도망치듯이 서울을 빠져나왔다. 탈방거리는 이삿짐 사이에서 아이들은 소풍 가는 날처럼 마냥 즐거워했고 아내는 이삿짐 트럭이 한강 지나자 소리 없이 눈물을 찍어냈다. 동민이 시골 행을 결심했던 것은 갑작스러운 결정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산골을 전전하며 커왔던 기억이 서울에서 사춘기 보내며 자랄 때도 늘 마음 한자리에는 흙에의 동경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꽉 짜인 직장생활의 틈새에서도 쉬는 날이면 쏜살같이 도시를 빠져나가 한가로운 저수지에서 낚싯대를 담그고 와야 비로소 일주일의 충전이 이루어지는 병적인 낚시 환자 생활을 유지했었다. 그러면서도 늦기 전에 얼마간은 돈을 챙겨 전원에서 삶을 보내리라 다짐했다. 그러던 것이 하루아침에 상황은 급변하고 급기야는 도망치듯이 서울을 빠져 올 때는 그의 마음도 허청거렸다. 처가와는 한 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에 요행히 살만한 빈집을 얻어 시골생활을 시작했다.
골조를 사다 비닐하우스를 만들고 개울의 호박돌을 주어다 무너진 담을 쌓고 깨진 방구들을 새로 깔고 하면서 집 단장을 하다 보니 아내도 차츰 웃음을 되찾기 시작했다. 입에서 단내가 풀풀 나도록 빨갛게 익은 물고추를 따다가도 고랑에 나란히 누워 자연과 인생의 무상함을 속삭이며 고된 시골살이를 이겨내자 다짐했었다. 그러나 남의 땅 고작 이천 여 평을 빌려 시작한 초년 농사꾼의 각오는 한여름 터진 농약 줄 틀어막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면서 조금씩 새기 시작했다. 수십 년을 아니 한평생을 흙 지렁이로 살아온 이들도 화석처럼 굳어버린 가난을 벗어내지 못하는데 도시 놈인 동민의 깜냥으로 그걸 벗겨내기에는 생각과 현실이 너무도 달랐다. 빈 마당 가득 콩대 쏟아붓고 도리깨질하면서 다시는 농사를 짓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밑천은 고사하고 생산과 유통 그리고 최종적인 판매가 불확실한 농촌의 현실은 도시에서 들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그래도 한밑천 들여 농사 공부는 실히 했다고 자위하면서 산골의 삼동 혹한을 보냈다. 생계의 기회가 절대로 부족한 산골지역에서 실업구제 공공근로는 가족의 생계를 조금이나마 받쳐 주었다. 1단계 2단계 반년을 채웠을 때 인원감축으로 세 번째는 탈락되었다. 가만히 앉아서 굶을 수는 없다 싶어 추적추적 내리는 장맛비를 밟고 인근 도시의 노동사무소를 찾았다. 컴퓨터 앞 아가씨가 자판 두드려 추천한 곳은 한 달 칠십만 원의 석회 공장 단순노무직이었다. 아니다 싶어 평소 귀동냥으로 알았던 일월산 장군봉 아래 아연 광업소를 찾아갔다. 전문 기술도 없으니 시키는 대로 조차 공으로, 막장 발파 보조공으로 돌덩이보다도 몇 배나 무거운 광석이 실린 광차를 밀면서 반년을 보냈지만 지하 육백육십 미터의 수직 암굴에서 안전등이 꺼졌을 때처럼 막막한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했다. 동민이 광업소를 나오면서 깨달은 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가난이 구조적으로 대물림되는 것은 생산기반에서 얻어지는 잉여가치가 노동자에게 철저하게 배제되는 시스템이었다. 심지어 도급 사장인 중간 덕대들의 횡포는 소자본 주의 전횡을 보는 것 같아 욕지기가 나올 정도였다. 대학에서 한때는 운동권으로, 건설현장에서 혈기 있는 노동운동가로 활동했으면서 머리로만 외우고 지껄였던 현실의 쓴 잔을 비로소 마시게 되는구나 생각하니 실소보다는 가슴이 서늘하게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숲 가꾸기 공공근로에 참여했다. 이번에는 조장을 맡으며 나름대로 산판에서의 일머리를 깨우치려 열심을 다했다. 어차피 산 아래서 먹고 살 바엔 산판의 기술을 익혀야 한다는 생각에 광산 다닐 때 산림기능사 필기를 따고 한 번의 낙방 끝에 실기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도시생활에서 취미 삼아 익혀두었던 외국어 자격시험도 자식 뻘 되는 학생들 틈에 끼어 따냈다. 아직도 공부머리는 있다고 생각하니 은근히 생활에 자신도 생기는 거였다. 그러나 그것이 아내의 지청구처럼 당장 돈으로 바뀌지 않는 담에야 무슨 소용이랴.

공공근로 2단계가 끝나갈 즈음 서면 작업반에 들어왔다. 면적 당 책정된 사업비의 일을 끝내면 경비 빼고 인원수대로 나누는 모작의 형태지만 반장은 동민에게 처음 왔으니 일당제로 하자고 제의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동민이 그것을 말 올릴 처지가 아니었다. 모두들 집 떠나 현장 옮겨가며 여관 생활을 하니 잠자리 물자리가 설만도 한데 이 생활도 익숙해져서인지 동민을 제외하곤 일에서 돌아와도 제집처럼 행동하는 거였다. 언제까지 이 생활을 계속해야 하는 건가. 강하게 쏘던 햇살이 구름 사이로 설핏 들어서자 동민은 시나브로 눈을 감았다.

"어이! 김 씨, 이제 그만 가세!"

누군가 외치는 소리에 눈을 떴다. 잠깐 사이에 여러 가지 잡스런 꿈을 꾸고 나니 뒷맛이 영 개운치 않았다. 꿈의 연결도 혼란스러워 생각나지 않았다. 옆을 보니 같이 누워 코까지 골던 명철은 보이지 않았다. 벌써 물을 챙기러 간 모양이었다. 동민은 작업화 끈을 서둘러 매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씨팔! 이게 무슨 놈으 이 정이야, 오 륙정은 족히 되겠다."


발세가 급한 산자락에서 예취기 웅웅대며 학기 씨가 툴툴거렸다. 작은 키에 까맣게 그을린 얼굴, 곱슬머리에 등 굽은 콧대가 얼핏 보기에도 성깔 있어 보이는 그는 농사도 웬만큼은 짓고 있었다. 올봄에 치솟기 시작한 배추 값에 틈만 나면 연신 중간상인과 흥정하는 모양이었다. 잘만하면 일 년 치 농사 수입이 몽땅 배추 일모작에서 떨어지는 판이니 안달이 나도 날 판이었다. 당장이라도 기계 집어던지고 집으로 달려가 배추 팔아 치우고 싶지만 작업단원들 보기도 그렇고 해서 마지못해 하루하루 때우고 있는 형편이었다. 지난번 수간주사 작업 중에도 약 친다는 핑계로 일 빠진 것도 감안한다면 더욱 그럴 수 없는 게 그로서는 여간 몸 다는 게 아니었다. 동민과 막내 명철 빼고는 모두 집집마다 한농사 하고 있으니 집안일을 구실로 하루 이틀 빠져도 두 사람은 꼼짝없이 일 해야 하는 판이었다. 더구나 돈이 안 되는 풀베기 작업을 하려니 찌는 날씨에 여간 고통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기계를 껐다. 동민의 앞에서 하나가 쉬면 모두들 눈치껏 기계를 내려놓고 한숨 돌리는 거였다. 그나마도 조림지 풀베기 작업이라 그늘이 있을 리 만무했다. 움돋은 일 년생 잡목의 솔개그늘이라도 얻어걸리면 황감할 지경이었다. 동민은 손바닥만 한 그늘에 고개를 디밀고 누워 담배를 물었다. 비닐봉지로 겹겹이 싼 담뱃갑이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엔진 위로 동여 맨 물통은 이미 녹아버려 뜨끈한 물이 반 남아 출렁거렸다. 그거라도 마시지 않으면 탈수증 걸리기 십상이다. 목울대 타고 흐르는 물맛이 꿀맛이다. 저만치 아랫칸에서 명철이가 이마에 두른 수건을 쥐어짜고 있다. 주르륵 흐르는 것이 물인지 땀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다. 동민과 눈 마주치자 그도 실쭉 웃음을 보였다. 명철은 동민의 동네서 고개 하나 너머에 산다. 서른여섯의 노총각인 그는 병중인 부친과 노모를 모시고 산다고 했다. 첫 상면에 동민과 본관이 같은 성씨인지라 내심 끌리는 바 없지 않았지만 동민이 시골에 내려와 같은 성씨를 만나 별반 흥미를 느끼지 못한 터라 파(派)가 다르다는 것에 오히려 다행일 정도였다. 좀은 풍덩한 몸피이면서 다람쥐같이 산 타는 날랜 동작이나 작업단의 소소한 일을 챙기는 그의 행동에서 동민은 그의 일에 대한 애착을 엿볼 수가 있었다. 한때는 경기도의 앨범 공장에서 과장까지 해봤다는 그의 자랑스러운 말투에서 동민은 관심을 가지고 들었지만 근년에 입었음직한 손등의 화상 자국을 보고 더 이상 말잇기를 피했었다.

네 시가 넘었을까. 온몸을 철판구이로 볶아낼 듯한 열기도 조금은 누그러진 듯했다. 여덟 명의 인부가 산을 가로로 잘라 위아래로 서서 풀을 깎아나가다가 경계선에서 다시 위칸으로 정상까지 더듬어 깎아 돌아오면 이 산의 풀베기는 종료였다. 이 정이면 육천 평인데 동민의 어림으로도 만 평 이상은 실히 될 법할 면적이었다. 작업비의 반을 산주가 부담하고 나머지는 조합에서 내기 때문에 어떤 경우는 실제 면적을 상당히 축소해서 작업계획을 올리는 때가 허다하다고 한다. 결국 애만 먹고 새 빠지는 쪽은 일을 떠맡은 작업단 쪽이다. 해도 어쩌랴 일을 안 하자니 다음 계약이 걸리고, 면적을 따지고 들자니 그 또한 거북한 것이 현실이고 보니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거칠게 밀어붙이기 마련이었다. 한 번은 동민이 꼼꼼한 스타일로 풀을 베어 나가는 것을 보고 단원 중 좌상인 병출 씨가 한마디 거들었다.

"김 씨, 그런 식으로 풀 베다간 굶어 죽기 십상일세 그려. 어차피 면적 속이고 사업비 떼먹는 일인 담에야 한 번 예취기 날 돌아가면 그만이야. 대충대충 문대라고."

그의 말이 옳은지도 몰랐다. 그 뒤부터 동민의 일하는 속도도 훨씬 빨라졌다. 처음 예취기 메고 산에 올랐을 때는 기계의 무게도 무게지만 봉대 잡고 날 휘두르는 것이 여간 힘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이틀 째 되는 날에는 숟가락 들기조차 힘들 정도로 팔이 뻐근하게 굳어 오는 거였다. 그것도 이골이 나는지 요즘은 꽤나 능숙한 본새로 일을 해나갔다. 김반장이 다가와 은근히 추어 줄 때는 동민도 싫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불룩하게 매달린 산도라지의 꽃봉오리가 매서운 속도로 돌아가는 날에 부딪혀 사정없이 나동그라졌다. 식재된 묘목 사이로 생명력 강하게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것이 잡목이며 잡초였다. 아카시, 참나무류 등속은 특히 맹아력이 강해서 일 년만 묵어도 목질이 단단해져 버려 어지간한 예취기로는 단번에 베어 내기가 어려웠다. 식재지 풀베기는 보통 소나무 등 성장 속도가 빠른 나무는 삼 년, 잣나무 등 초년에 성장 속도가 느린 수종은 오 년을 계속해서 베어 주어야만 비로소 잡목을 이겨내고 홀로 설 수 있게 된다. 작업단이 주로 풀베기하는 산은 산불이 나서 새로 식재한 임지나, 산주가 나무를 팔아 돈을 바꿀 요량으로 벌목한 임지이다. 초봄에는 황량한 산비탈에 나무를 심으면서 이런 거친 땅에도 풀이 올라올까 의심스럽지만 초여름 접어들면서 빠른 속도로 올라오는 풀들 보면 강한 생명력에 대한 감탄은 뒷전이고 풀베기에 대한 두려움이 앞선다는 게 동료들의 말이다. 그래도 동민이 산판 기웃거리면서 정상에 올라 산아래 점점이 흩어진 집들과 등고선을 따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골을 타 놓은 밭들을 보면서 자꾸만 아연광산의 끝 간 데 없는 막장의 칠흑 같은 어둠과 대비되어 차라리 가슴이 후련하게 열리는 안도감을 느끼곤 하는 거였다. 일 마치고 산을 내려가면서도 양희은의 한계령을 되뇌지만 동민은 저 산을 다시 오르리라 다짐하곤 하는 거였다. 그것이 자신이 선택한 시골살이의 마지막 희망 같은 믿음이 되살아나는 확신이기 때문이었다.
산아래 밭에서는 부부인지 여자는 소를 끌고 남자는 쟁기로 골을 타면서 밭을 갈고 있었다. 그 옆으로 난 밭에서는 감자를 캐고 난 뒤에 관리기로 골을 타는데 모양은 소보다는 나아 보이는데, 속도 쪽은 소가 훨씬 빠르게 지나갔다. 땅이 풀리는 봄부터 가을걷이까지 쉼 없이 몸 움직여 흙 더버기로 살아가는 저들의 생활에 경외감을 느끼기까지 하는 것이 요즈음 동민의 시선이었다. 도시나 들이나 사람 사는 거 매한가진데 도피하듯이 빠져나온 자신의 행동에 의혹을 품은 적도 있었지만 조금씩 고집스러울 정도로 홀로서기에 집착하는 자신을 보면서 동민은 아내와의 소원한 대화에 너그럽게 이해를 구하고픈 심정이었다. 하기는 동민이 독립하며 기세 좋게 사업 꾸려 나갈 때 아내는 그녀대로 사회적 위치를 굳혀가고 있었다. 그때의 페이스대로라면 지금쯤 그녀는 학원을 차리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지역에서도 우러러보는 사회운동가로서의 자리를 확보했을 터였다. 다섯 군데의 단체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도 지칠 줄 몰랐고 주위의 많은 시선들로부터도 동경과 선망을 한 몸에 받았던 그녀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동민과의 시골 행에 몸 맡기기까지는 도저히 공감하기 어려운 번민이 함께 했으리라. 게다가 하루하루 겹겹이 산으로 둘러 쳐진 골짝에서 바깥세상과의 단절 속에서 아직도 물정 모르고 이 산 저 산 뛰어다니는 동민을 보면서 허청한 마음 굴뚝같았으리라. 동민은 아내의 속내를 알면서도 아직은 참아달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점점 굵어지는 팔뚝만큼이나 강퍅해져 가는 그녀의 언행 앞에서는 금세 가슴이 오므라져 드는 거였다. 한밤의 이층 짓기도 예전 같지는 않았다. 그는 펄떡이는 숭어가 되어 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싶지만 자꾸만 물레방아처럼 물줄기를 되돌려 버리는 그녀의 불감증을 되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밤중에 일어나 마당 가운데서 달빛을 받으며 우두커니 앉아있는 아내를 볼 때마다 동민은 가슴에 서늘한 얼음장이 들어박히는 느낌이었다.

"벌이다! 벌!"

남 씨가 예취기 날을 거두며 뒷걸음친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벌집을 피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땡삐나 고무 땡삐에 쏘이면 몰라도 바드레로 불리는 말벌에 쏘이면 치명적이다. 벌 중에서도 침의 독성이 제일 강해 심하면 생명까지 위험하다고 했다. 동민도 작업 도중 서너 번은 벌에 쏘였지만 모두 땡삐 종류였다. 벌집이 발견된 곳을 피해서 풀을 베어 나갔다.

오후 일곱 시가 넘어서야 작업이 끝났다. 후줄근한 상의를 벗은 채 트럭에 올랐다. 비포장을 달려 나가 아스팔트 길에 오르니 스치는 바닷바람이 서늘했다. 한낮의 열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해안선을 따라 모래벌판이 있는 바닷가는 포장을 치고 휴가철 손님 맞을 준비에 분주했다. 점점이 떠 있는 고깃배가 석양을 받아 금빛으로 출렁거렸다. 해마다 여름이면 얼마나 많은 발자국들이 모래를 찍고 파도를 마시며 다녀갈까. 동민은 여름이면 식구들과 처가엘 들렀다가 해안도로를 따라 여행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도시의 휴가객으로 쏘다녔던 이 곳을 지금은 산판의 일꾼으로 지나간다니 감회는 새로웠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일말의 회오나 미련은 남아있지 않았다. 산다는 것의 현실에 만족하며 끊임없는 자신에의 도전이 그에게는 유의미성을 띠고 나타날 뿐, 예전의 기억은 한낱 추억으로만 존재하는 과거일 뿐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달랐다. 그녀는 진저리 처지는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중학교를 마치고 도시로 탈출했으며, 혼자의 힘으로 고등학교 대학을 다녔으니 지금도 도시에 대한 문화적, 경제적 상승 욕구는 그와는 애당초 방향이 달랐던 거였다. 그러던 차에 동민을 만나 어느 정도 가속을 붙여가며 꿈을 이루려던 참에 모든 것을 내던지 듯 포기하고 내려와야 했으니 그 속내가 어땠을까.

트럭이 꽂히기라도 할 듯 모텔을 향해 달려가다 급정거했다. 주차장엔 햇살 대신 어둠이 깔려 있었다. 작업반 일행은 빈 물병을 들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오후에 단체손님이 다녀갔는지 식탁마다엔 빈 그릇이며 과일 껍데기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모두들 급수대에 달라붙어 냉수를 들이켰다. 기념품 가게의 여주인이 부채를 흔들며 뭐라고 지껄이는지 동민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돌아가며 샤워하고 팬티 차림으로 벽에 기대 텔레비전을 보았다. 몇 사람은 저녁 후에 한 잔 걸치는지 아직 들어오지 않았고 명철은 햇볕에 그을린 불콰한 얼굴을 베개에 묻고 벌써 한밤중이다. 선풍기가 돌아가는 데도 모기가 달려들어 뜯기 시작했다. 동민은 모기향을 찾았다. 낮 동안 달구어진 방안의 열기는 아홉 시 뉴스 끝나도 식을 줄 몰랐다. 자리 펴고 누웠는데 옆방에서 건너오란다. 노래방 주인 은혜가 수박을 쪼개고 있었다.

"날도 더운데 고생 많지요, 수박 조금 드시고 자소."

검은색 핫팬츠에 검은색 러닝셔츠를 입은 그녀의 살결이 더욱 우유 빛이었다. 서 넛은 수박을 핥으며 시선으로 그녀의 넙데데한 엉덩이며 허벅지를 연신 더듬었다. 나이는 서른 중반쯤일까. 아담하면서 날씬한 몸매에다 성글성글한 말씨에 거침없는 성격이 작업반이 모텔을 숙소로 삼으면서 그녀와는 친밀한 사이가 된 모양이었다. 김반장과 성격이 무뚝뚝한 석봉 씨와도 오빠 오빠하고 트고 지내는 사이다. 다만 그녀가 겁내는 사람은 좌상인 병출 씨였다. 그는 은혜의 외삼촌 되는 이와 군대 동기로 은혜의 사생활을 훤히 알고 있는 데다가 불뚝불뚝 뼛성을 내며 그녀에게 바른말을 해대기 때문에 그녀는 병출 씨를 어려워했다.
병출 씨에 의하면 그녀는 어렸을 적에 조실부모했다고 한다. 친척의 집에서 천덕꾸러기로 자라난 그녀가 세상에 눈뜨기 시작한 건 지금의 모텔 사장 부친인 엄 노인의 양딸로 들어가고부터였다고 한다. 말이 양딸이지 스무 살의 처녀가 환갑을 갓 지난 홀아비한테 들어갔으니 세컨드에 다름 아니었을 거였다. 엄 노인은 수년 전에 상처한 뒤로 당뇨를 앓고 있었는데 수중에는 상당한 재산도 지니고 있었다. 남을 지독하게 의심하는 성격 때문에 재취를 마다하고 살다가 큰아들의 딸 뻘인 은혜를 병간호를 구실로 양딸로 들였다는 거였다. 그때까지 친척집을 전전하며 온갖 구박과 설움 덩어리로 살아왔을 은혜가 양아버지인 엄 노인에게 가서 보니 지금까지는 보지도 못한 살림살이에 부티가 줄줄 흐르는 풍요로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아들 셋은 독립해 나가 살고 넓은 고대광실에 엄 노인과 단 둘이 살면서 그의 비윗살을 맞추며 병간호를 하니 천성이 부지런하고 간 살쩍은 데가 있는 그녀에게 엄 노인이 홀딱 반해 버렸다는 거였다. 양딸은 구실이요, 얼마 후부터는 아예 한 이불 잠을 자더라는 거였다. 그녀로서도 평생에 받아보지 못했을 아버지 같은 인자함과 지아비 같은 든든한 마음에 엄 노인을 정성으로 간호하며 살았다는 거였다. 어쩌면 꽃다운 나이의 은혜를 만나 한동안 엄 노인은 기력을 되찾았는지도 몰랐다. 병색이 가시고 회춘하는지 먹성도 좋아지고 바깥나들이도 그녀의 손을 잡고 다닐 정도였다. 둘은 부녀지간인지 부부지간인지의 금실을 자랑하곤 했더란다. 그러던 것이 말에 의하면 은혜에게 양기를 몽땅 빼앗겨선지 모르게 그녀가 들어간 지 삼 년 만에 엄 노인은 세상을 떴다. 하늘이 무너지는 황당함 속에서도 그녀는 엄 노인의 생전에 받아두었던 유언대로 그녀 분량의 상속을 챙겼다. 그러나 세 아들은 그녀의 계산을 미리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그녀의 상속권을 간단히 밀어내고 말았다. 졸지에 알거지가 된 그녀의 처지를 생각해선지 그래도 모텔 지하의 노래방 하나를 떼주었다. 남자의 품을 알아서일까. 그녀는 노래방을 하면서도 곧잘 사내들과 어울렸다. 천성이 활달한지라 쉽게 어울리고 쉽게 몸을 허락했는데, 그것이 어쩌면 그녀의 타고난 끼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여태껏 결혼도 안 하고 살면서 지냈는데 활달한 반면에 심성이 약해 이름난 건달들에게 당해 뜯긴 적이 한두 번 아니라는 거였다. 요즘은 용돈이 궁해지면 노래방 문을 열었다가 외지서 놀러 온 사내와 온천 한 바퀴 돌고 돈 떨어지면 또 며칠 영업을 하는 것이 그녀의 생활이었다. 어제는 새벽에 한 남자랑 들어와 한참을 울고불고 싸우더니 날이 희번해서야 잠잠해졌었다. 동민도 잠결에 그녀의 악다구니를 듣고서 새벽잠을 설쳤었다.

"오늘 새벽에는 누구랑 싸웠드노? 이 가시나야."

병출 씨가 수박을 베물고 곁눈을 흘겼다.
그녀는 수박을 자르다 말고 다소곳이 눈을 깐 채,

"그래서 지가 수박을 안냅니꺼, 미안해서요."

"또 한 놈 물었드나?"

김 반장이 비실거리는 웃음기를 띠고 물었다.

"무슨 소리라예, 남 부끄럽구로......"

그녀는 동민 쪽으로 시선을 깐 채로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동민은 그녀의 목덜미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보자 아랫도리에 불끈 힘줄 솟는 걸 느꼈다. 모두들 그녀 탓에 잠은 설쳤지만 그녀가 부리는 교태가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석봉 씨가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끄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야, 이 아-가 수박 한 덩이로 때울라카나, 빨리 내려가 노래방 돌려라. 조디가 심심해 미치것다."

"어허, 은혜가 한 방 솔라나......"

학기 씨가 넌지시 그녀를 부추겼다.

"쏘라면 몬 쏠 것도 없지요."

그녀가 쟁반에 수박 껍질을 쓸어 담으며 김반장을 쳐다보았다.

"나는 와 쳐다 보노? 니가 알아서 하재. 대신 내일 일 지장 없도록만 해라."

모두들 반장 눈치를 기다리다가 일제히 방을 빠져나갔다. 동민은 선뜻 내키지 않아 방으로 돌아갈까 하는데,

" 김 씨, 같이 내려가세. 내 오늘 김 씨 노래 한 번 들어 봐야지."

병출 씨가 복도로 나서는 동민의 팔을 잡아끌었다. 동민은 잠시만 앉아 있기로 작정하고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동민이 들어서자 벌써 룸에서는 쿵쾅거리며 반주가 돌아갔다. 명철이 초저녁 잠에서 완전히 깼는지 마이크를 꼬나 잡고 꽃을 든 남자로 목청 돋우고 있었다. 은혜는 쟁반에 병맥주를 날라 오고 몇 이는 박수를 치고 다음 차례 곡목 찾기에 열중이었다. 낮 동안의 작업에 지쳤을 텐데도 마이크 앞에서는 서로가 먼저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엉덩이를 한편으로 꼰 채 남 씨가 남행열차를 열창하자 병출 씨가 동민을 가리켰다.

"다음! 김 씨 차례!"

동민은 배호의 누가 울어를 불렀다. 잠깐 동안 서먹한 공기가 감돌더니 석봉 씨가 은혜를 껴안고 부르스를 추자 모두들 나와한 판씩 그녀를 빼앗듯이 낚아채고 돌기 시작했다. 동민에게는 내려온 지 처음 와 보는 노래방이었다. 집에서는 가끔씩 아이들과 컴퓨터 노래방으로 불러 보긴 했는데 맥주 몇 잔으로 흥청거리는 분위기에 들어서고 보니 피로도 풀리는 느낌이었다. 차례차례 노래 돌아가고 은혜는 몇 번인가 맥주를 더 날랐다. 동민은 내일 일 염려해 주량을 줄이고 싶었지만 병출 씨가 자꾸 권하는 통에 술기가 조금씩 오르고 있었다. 명철이가 다가앉으며 술을 따랐다.

"형님요, 고생스럽지요. 그렇더라도 조금만 참으이소. 언젠가는 좋은 날 있지 않겠십니꺼."

동민은 평소에도 명철이의 은근한 배려에 고마움 느끼고 있던 터라 그의 주는 잔을 단숨에 비우고 잔을 내밀었다. 좁은 룸 안에 조명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비 온 뒤 안개 깔리 듯 담배연기가 천장에 자욱이 깔려 내려왔다. 병출 씨가 한 곡을 신나게 부르더니 밖으로 나갔다. 동민도 화장실이 급해 노래방을 나왔다. 복도에 나오니 시원한 냉기가 목줄기를 훑는다. 어두컴한 화장실에 불을 켜니 병출 씨는 없었다. 어디에 간 걸까. 동민의 걸음이 약간 흐트러졌다. 많이 마신 것도 아닌데 요즘 작업으로 땀을 많이 쏟아 몸이 허해진 탓이려니 생각했다. 아래층 노래방에서는 누군가 마이크를 씹어 삼킬 듯이 악을 쓰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마치 무덤 속에서부터 울려 나오는 사자(死者)의 울부짖음처럼. 동민은 모텔 현관을 나왔다. 텅 빈 주차장에 외등 빛이 어슴프레 빛났다. 계단을 내려서는데 밑에서 허연 물체가 풀쩍 움직였다. 개였다. 모텔 카운터에 있는 중 늙은 아줌마가 기르는 발발이였다. 동민은 입짓으로 개를 불렀다. 발발이는 아까보다 빠른 걸음으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외등 주위로 날벌레가 하얗게 몰려들었다. 동민은 외등 그늘에 들어가 담배를 물었다. 식구들 생각이 왈칵 치밀었다. 지금쯤 잠자리에 들었을까. 매일 일을 마치고 전화를 해 주었는데 오늘은 놓친 것이 생각났다. 노래방도 어지간하면 끝날 터라 동민은 방에 올라가 잘 맘으로 이층 계단을 밟았다. 복도엔 등이 꺼져 어두웠다. 호실을 찾아 방 번호를 확인하려는데 안에서 사람 소리가 들렸다.

(모두들 노래방에 있을 텐데, 다른 방인가.)

동민은 고개를 빼고 다시 확인했으나 틀림없이 그가 묵는 방이었다. 술기가 조금 가시는 느낌이었다. 조심스레 문 미는데 불 꺼진 방 안에서 남녀의 소곤거림이 들려왔다.

(아이, 아재 이러지 마세......)

(어허, 가만 있으라는데두!)

아차 하고 방문을 닫으려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물체를 보고 말았다. 남녀가 위아래로 엉켜 움직이는데 분명 남자는 병출 씨였다. 여자는 은혜였다. 남자는 바지를 반쯤 내린 채로 여자의 다리 사이로 손을 넣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실루엣이 술기 밴 동민의 눈으로도 선명히 드러났다.

(씨팔! 하필 우리가 자는 방에서......)

의외의 광경에 일부러 문을 세게 닫고 나가고 싶었으나 일견 야릇한 호기심에 문 앞에 주저앉은 채 담배를 붙였다. 병출 씨가 은혜와 그 짓을 하다니. 동민으로선 의외였다. 허청한 웃음이 그의 입가에서 새어 나왔다. 집에 전화를 해야 할 텐데. 지금쯤 잠자리에 들었을까. 동민은 반쯤 남은 담배를 손으로 비벼 껐다. 방안에선 한참 열이 오르는 모양이었다.
낮은, 그러나 단호한 속삭임이 일순 오갔다. 동민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도 최소한 내 앞에서 단호했어야 했는데 말이야. 동민은 일어섰다. 서슬에 슬리퍼가 끌렸는지 문에 툭 하고 부딪혔다.

(누가 왔나 봐.)

(가만! 가만......)

모든 게 끝난 상황인 모양이었다. 동민은 바깥문을 세게 닫으며 계단을 내려왔다. 주차장 밤하늘엔 검은 구름이 아까보다 더 진하게 몰려오고 있었다. 장마가 필시 오려나 보았다. 주차장 한가운데에 그가 섰다. 아까 달아났던 개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오더니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았다.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질 것 같은 하늘에선 물기 머금은 검은 바람이 훅훅 불어 재꼈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동민의 주위로 하얀 개가 돌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 마리가 돌더니 하나둘씩 늘어 셀 수도 없이 많은 개들이 동민의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거였다. 그도 따라 돌아보았다. 그러자 개들이 컹컹 짖으며 돌았다. 동민도 짖었다. 검은 하늘에선 물 바람이 그들을 따라 빙빙 맴돌았다. 동민의 눈가에선 전화기가 도는 것이 보였다.

(아, 지금쯤 잠자리에 들었을까.)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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