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4

by 소인

곡성(谷城)④

역사의 질곡에서 여성의 삶이란 어떤 모습이었을까 자식의 생산과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로서의 여성의 존재가 희미한 위치였다. 유교적 전통의 가치관이란 남성 우위의 사회에서 여성은 부속물쯤으로 여겨졌다. 당연히 삶의 주체와는 거리가 멀었고 남성의 곁에서 묵묵히 순종하고 희생하는 삶을 살다가 떠났다. 그러나 이면에는 기존의 낡은 가치관을 거부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저항하는 삶을 산 여성들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 가계의 여성들도 거개의 여성들처럼 신산한 삶이었다.

큰고모
칠십 년대 종로 거리 푹푹 한여름 날씨 삽시간 먹장구름 휘덮다 한줄금 쏟아진다 콩 튀듯 달아나는 인파 사이 비닐우산 옆구리 찬 여자 우산 사요, 우산! 얼굴엔 빗줄기보다 굵은 삶의 주름 파였다 달려온 신사 여기 하나 주시오! 중절모 가린 젖은 머리칼 출렁였다 우산 건네던 여자와 눈 마주친 신사 우뚝 멈춘 표정 해방 전후 연해주 만주 떠돌며 유랑극단 여가수로 이름 날리던 여자 알아본 거였다 여자 시선 깔며 우산 내민다 오늘 못 볼 꼴 보았소 신사 우산 뭉치 한아름 들고 돌아선다 그녀 아비 또한 서양음악 전공한 음대 출신이었고 미군정 악단장 음악가였다 세찬 빗줄기 노드리듯 아스팔트 적시며 하수구로 빨려갔고 지폐 움켜쥔 여자의 등허리 망연히 때렸다

해방 후 돌아온 서울은 연옥의 아수라장이었다. 뒤이어 터진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인기 몰락한 악사 남편과 한물간 여가수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 녹번리 포수마을의 판잣집에서 아이 넷을 키웠다. 집 주변 고인 웅덩이에서 아이들 멱감고 문실문실 자랐는데 아비는 그때부터 기침을 달고 살았다. 가난과 병 동무처럼 찾아오는지 오십 넘기지 못한 서방 각다분한 빚 남기고 무심히 떠났다. 세상의 벽 마주하고 손톱 닳아 빠지도록 품 팔며 댕돌같이 아이들 키웠다. 몸서리치던 가난도 물릴 즈음 매지구름 차례차례 그녀를 덮쳤다.

장애 앓던 막내 시설에 맡기고 돌아오는 날 둘째 아들의 사망통지서 날아들었다. 전차부대 도하훈련 중 북녘 땅 장마로 푸른 목숨 휩쓸어갔다. 마른 울음에선 눈물 대신 목쉰 까마귀 소리가 났다. 물귀신에 동티 났나 큰아들 장가보내고 손주 안고 사는 재미 움틀 무렵 낚시 갔던 큰아들 물에 빠져 다신 돌아오지 않았다.

감탕 밭 같은 인생 반 미쳐 쏘다니는 동안 딸 출가하고 며느린 냄새나는 시어미에게 더 이상 손주 보여주지 않았다. 세월을 약으로 쓸 수 있나. 끌탕하던 속 다 썩어 시든 말년 딸의 위로도 헛헛해 곡절 많은 팔자 술 취해도 또렷한 기억 만주 벌판 어른거려 무대조명 나부끼는 휘장 박수소리만 요란했다. 여가수의 목소리 카나리아처럼 터지던 날 휜 허리 제대로 펴보지 못한 세상 소리 소문 없이 저물었다.

막내아들은 정신박약으로 두 아들은 물귀신에게 빼앗긴 큰고모의 곤고한 인생 구십 넘어서도 계속되었다. 부디 좋은 곳에서 형들과 평안하시길.

둘째 고모
카랑카랑한 세월 산골짝 개울 아래로 흘러갔다. 달력도 멈춘 말년 누군가 찾아오는 이 살피기 전 왈칵 눈물부터 씻는 노인들 흐린 기억 너머 얼굴 속 아버지 보이고 할머니도 나타났다. 그저 산다는 거 감사하고 서러워 또 본단 기약 없어도 잘 가라고 자꾸 고개 일으킨다. 흔해빠진 인생 억세게 운 나빴다고 치자 상처 주고받았던 시간 이제 무슨 소용일까. 늙은 나무처럼 기운 둘째 고모 나 이제 가요 잘 지내요 산 아랫동네 봄꽃 한창인데 요양원 앞 뜨락 배롱나무 꿈쩍 하지지 않는다.

막내 고모
혈압 올라 입원했다는 막내 고모 작년 이맘때 부친 봄나물 기다린단다 외동딸 사는 미국서 문 걸고 살다 돌아온 고모 작년 이맘때 부친 택배 문자 찾아내곤 이제나 저제나 산에 들에 캐던 꿈같은 나물 기다린다 육이오 사변 피난 갔던 조치원서 홀로 기차 타고 경기 여중 당당히 붙었다는 총명했던 막내 고모 그때 계집아이처럼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리는 꿈

주립대 수학교수로 정년퇴직하고 피붙이 대신 남의 나라 어린이를 위해 바쁜 막내 삼촌 여전히 청청한 정신 놓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미국서 결혼해 사는 딸 보러 다니기도 지쳐 성남 부자동네서 운동장 만한 집 지키며 사는 막내 고모가 집안의 역사를 꿰는 유일한 증인인데 남은 세월 노루꼬리처럼 짧은 게 아쉽다. 내 글에 대한 첨삭과 정오표를 달아줄 유일한 사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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