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일본 드라마 중에 2003년 일본 TBS에서 방영한 '사탕수수밭의 노래(さとうきび畑の唄)'가 있다.
이차 세계대전 막바지의 오키나와(沖縄) 한 가정의 비극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오키나와는 홋카이도와 함께 일본 본토에서 최북단과 최남단에 떨어진 섬이다. 섬이라는 지형적 특수성은 본토와는 다른 인종과 문화, 역사로 이어졌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변방의 차별을 당하는 상황이다. 일본 본토에 편입되기 전에는 본토로부터 침략과 수탈을 지속적으로 당해왔던 섬이었다. 그러나 이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전쟁에 휘말린 오키나와 섬의 오키나와인들은 본토에서 온 일본군과 섞이면서도 오키나와 출신이라는 이유로 멸시와 차별을 당한다. 출병을 강요당하고 민간인을 징발해 군역을 시켰다. 주인공의 가족은 사진사인 아버지부터 장남과 차남, 장녀까지 전쟁에 몰려 참전하게 된다. 천황폐하의 은덕은커녕 학대받던 오키나와인들은 마지막에는 자결이라는 옥쇄(玉碎)까지 강요당한다. 차남은 천황을 위해 폭약을 안고 영광스럽게 산화(散華)한다. 전쟁으로 인해 한 가족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비극을 얘기한 '사탕수수밭의 노래'는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도 가족애와 인간의 사랑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드라마로 호평한다. 물론 전장의 비극을 객관적으로 보여준 후쿠자와 카츠오 연출가의 내밀한 의도를 읽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의문이 드는 건 시청한 일본인의 마음에는 단순히 전쟁의 비극에서 싹튼 가족애의 감동만이 전부였을까. 멸시하는 오키나와인, 자신들의 나라가 일으켰던 전쟁의 죄과에 대해던 반성의 심정은 없었을까. 가족애만을 드러낸다면 혹시 억울하게 전쟁에서 희생된 야스쿠니의 망령들을 마음속으로부터 기리는 심정은 아니었을까 의심이 간다. 그러나 이런 나의 의심은 멀리 갈 것도 없이 최근에 벌어지는 상황을 읽어도 쉽사리 이해하고 남는다. 독도를 자기 네 땅이라고 우기며 혐한(嫌韓)을 일삼는 일본의 시민들, 패전 후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만든 「평화헌법」 9조를 개정하여 군대를 일으키겠다는 정치인과 시민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전쟁을 일으킨 조상을 불러내 미화 찬양하는 풍토는 저들이 과연 평화와 인류를 사랑하는 국가의 시민들인가 의심이 간다.
오키나와에도 우리처럼 미군 기지가 있다. 일본 본토를 포함해 월등히 많은 70%가 오키나와에 집중해 있는데, 주한 미군과 마찬가지로 미군에 의한 성폭행, 기지 밖으로의 오염수 방출, 비행기 소음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시민단체, 작가, 학생 등은 해마다 미군 기지 앞에서 시위를 벌이며 전쟁 반대, 미군 철수를 외친다. 선두에 선 사람 중에는 「어군기(魚群記)」,「물방울(水滴)」을 쓴 오키나와 출신 작가 메도루마 슌(目取眞俊)이 있다. 작가도 소설 중에 이차 대전 중 끌려와 희생당한 외부인(대만인)을 묘사했다. 적극적인 반전과 평화를 외치는 그의 분투 이면에는 또 다른 전쟁의 희생자가 있음을 지나쳐선 안된다.
오키나와 대학의 오세종 교수는 「오키나와와 조선의 틈새에서」를 통해 전쟁 중에 희생된 사람 중에 오키나와에 있었던 조선인을 소환한다. 불가시적 존재였던 그들은 한반도에서 끌려온 민간인 군부(軍夫)와 강제로 잡혀온 조선인 위안부들이었다. 희생자들의 정확한 숫자와 출신지는 일본 정부의 자료 폐기로 제대로 파악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비통의 섬인 오키나와 전역과 부근 섬에는 모두 십여 개의 조선인 관련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그중 '한의 비(恨의 碑)'는 똑같은 비가 경북 영양읍의 호국 공원에도 세워져 있다. 비문에는 당시 경북 지역에서 끌려갔던 사람들의 이름이 출신지와 함께 새겨져 있는데, 반 이상은 창씨개명한 이름 그대로인 상태였다. 호국 공원의 '한의 비는' 찾기 어렵게 공원 외딴곳에 있고 주변에는 채소밭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역사는 그때 사람들의 뜨거운 입김과 고통으로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자꾸 잊히는 게 안타깝다.
드라마 '사탕수수밭의 노래'로 돌아가서 일본과 일본인을 생각한다.
개인의 심리와 인간의 사랑과 정을 털끝 다루듯 치밀하게 다루는 일본의 소설과 영화, 드라마를 보면서 과연 이런 민족성을 가지고 대동아 공영이라는 전쟁(예전 노인들은 일본식으로 이차 세계대전을 '태평양 전쟁'으로 말했다) 찬가를 부르며 아시아 각국을 침략해 살인, 강간, 방화를 저질렀나 생각하면 도무지 이해 불가한 상황까지 도달하고 만다. 물론 일본에서도 전쟁 반대와 이웃 나라와의 화해, 평화를 열렬히 지지하는 뜻있는 시민들이 많음을 알고 있다. 일본 정부와 우파의 착종된 평화 인식과 현실 인식은 시선을 돌리면 우리 내부에도 있음을 알게 되는 건 슬픈 현실이기도 하다. 식민 시절을 미화 내지 두둔하는 학자, 정치가, 작가들. 그리고 친일한 선대의 재산을 대대로 물려받아 부패 독재정권에 빌붙어 권력과 금력을 불려 간 사특한 가짜 애국자들. 한 편의 드라마를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떠오르며 머리가 복잡해지는 건 불쾌한 일이다. 우리는 누가 만들었 건 드라마 한 편도 편하게 보지 못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통한의 더러운 역사는 아직도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