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륙 같으면 한겨울에 푸릇 싱싱한 빛깔을 띠는 건 마트의 푸성귀뿐이다. 중부 내륙과 십 도 이상 기온 차가 나지만 여기도 한파주의보가 내리면 영하로 떨어진다. 눈발이 비듬처럼 날려 땅에 떨어지는 건 쌓여 눈꽃이 되지 못하고 물로 변해 지워진다. 눈 대신 비가 온다. 상록활엽수라도 겨울엔 생장을 멈춘다. 온대지방 식물의 생육 온도는 18~25℃다. 그 이상과 이하에서 식물은 잠을 자거나 긴장한 채 버틴다. 나무도 춥거나 더운 날에 열상과 동상을 입는다. 중부지방에서 수피가 길게 갈라진 나무는 동상이나 화상의 흔적이다. 식물도 외과 수술을 받는다. 금방 벗겨진 형성층의 세포는 피부 이식하면 재생되기도 한다. 식물은 지구에 생명을 살게 한 일차 토대다.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산소를 내보내는 광합성이 없었다면 지구의 대기는 존재하지 않았을 거다.
후박나무 가로수가 짙푸른 빛으로 겨울을 난다. 황금색 단풍을 단 먼나무는 겨울에도 구슬 같은 빨간 열매를 달고 있다. 생울타리 홍가시나무 위로 동백나무가 봉오리를 수백 개 달고 있다. 성질 급한 꽃은 피었거나 낙화하여 흙바닥을 핥는다. 돈나무, 종려나무, 산야의 팔손이나무, 감태나무 등은 꽃 피고 열매를 맺으면서 한겨울에도 푸른 잎을 달고 세대를 이어간다. 도서관에서 수목도감을 찾아보니 남부의 식생은 교목, 관목을 비롯해 구십여 가지인데 내가 눈에 익힌 건 일고여덟 가지다. 그만큼 남도의 식생은 중부의 식생과 다르고 다양하다. 바다 산책로에서 절벽 아래 솔숲을 내려다보면 해송이(곰솔) 구 할을 차지한다. 내륙의 조선 소나무는 손에 꼽을 정도다. 중부의 산에서 나무를 베고 솔숲을 관리했지만 한반도의 숲은 마을 가까이서, 깊은 산중에서도 무너지는 현상을 쉽게 눈치챈다. 소나무 에이즈로 불리는 재선충병은 남부를 강타하고 북상 중이다. 몇 해 전 제주도에 갔을 때 모슬포에서 삼방산 기슭을 바라보니 군데군데 소나무 무덤이 눈에 뜨였다. 기차 타고 안동을 지날 때도 파란 방수포에 싸인 재선충 감염목이 산자락에 즐비한 걸 보았다. 소나무의 공동묘지다. 대학 교수가 치료약과 예방약을 개발했지만 전국의 소나무에 주사를 높기엔 비용이 천문학적이다. 또한 날아다니는 재선충병 매개충인 솔수염 하늘소의 통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딱정벌레목 하늘소과에 속하는 곤충의 선처를 바랄 뿐이다.
지리산의 고지대에 사는 구상나무와 가문비나무가 떼죽음을 했다는 보도가 나온다. 기후 변화로 침엽수의 고사가 현실이 되는 것이다. 삼백 년 후 한반도에서 소나무를 보지 못하게 될 거란 보고도 있다. 인류는 산업 혁명 이래 화석 연료인 석탄과 석유를 엄청나게 태웠다. 극지대의 빙하가 녹고 해수면이 상승한다. 북태평양에는 한반도의 일곱 배가 넘는 면적의 플라스틱 쓰레기 섬이 있다. 각국은 친환경 재생 에너지의 개발과 확산으로 탄소 줄이기에 나서고 있지만 지금의 문명 양식을 혁명적으로 바꾸기엔 생색 수준이다. 「우리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에서 과학 교사인 호프 자런은 자신이 태어난 1960년대 이후 지구의 변화를 통계를 들어 확인시킨다. 지속 가능한 인류의 생존을 위해 정부의 정책과 각자의 노력을 강조하지만 전망은 암울하다. 우리는 행복했지만 다음 세대에게 불행을 송두리째 넘겨주는 세대로 기억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아름답다.
인간은 오염되지 않은 생태만 보아도 몸과 정신이 치유되는 감각을 느낀다. 그러나 인간의 양식은 모든 걸 자신의 영역에 가두고 소비하는 쪽으로 진화했다. 자본은 탐욕을 선한 욕망으로 부추겼고 세뇌시켰는데 악순환이 선순환되는 구조로는 병든 생태를 되살릴 수 없다. 우리가 즐기는 자연과 문명의 도락은 돌이킬 수 없는 자가당착에 빠졌다. 깨끗한 숲과 바다에서 즐기는 휴식과 여행은 몇 세대 후면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후손에겐 먼 일 전의 기억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오후 산책이 습관이 된 요즘 산책길 주변의 식생을 살핀다.
처음 보는 식물의 이름을 몰라 답답했는데 지인이 검색법을 알려주어 답답증이 풀렸다. 가끔 겹치는 영상에 엉뚱한 답이 나오긴 해도 자꾸 파고들면 답을 찾게 된다. 내가 찾은 나무의 사진과 정보를 파일에 저장하는 즐거움이 생겼다. 겨울의 식물은 토라진 연인처럼 쌀쌀맞다. 물관을 닫은 채 갈증과 허기를 견딘다. 곰솔 밭 아래의 바위에선 낚싯꾼이 미끼를 던지고 있다. 파도는 을씨년스러운 이빨을 드러내고 끊임없이 뭍을 삼키려 든다. 먼바다에 떠 있는 화물선 갑판 위에 개미만 한 사람들이 소리치며 오가는 모습이 보인다. 생산과 유통, 소비는 전 지구적 대세가 되었다. 단계가 무너지면 톱니바퀴가 빠지고 컨베이어 벨트는 멈춘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처럼 인간이 부품이 되어 세계의 공장은 돌아간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성한 징후는 보이지 않는 불편한 산책이지만 나는 마지막 지구의 공기를 마시는 심정으로 가슴을 열고 걷는다. 핼쑥한 남도의 수목이 내려다본다. 피기 시작한 동백나무의 허리가 매끈하다. 땅에는 떨어진 동백꽃이 흙으로 돌아간다. 바다 쪽으로 더 내려간다. 바람이 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