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人暮らし(33)
오전
섬에서 T시까지 거리는 B군에서 A시 정도의 거리.
아침 먹고 느지막히 열 시에 집을 나섰다. 떨어진 기온은 좀체 오르지 않았고 바다 쪽에서 부는 바람에 물기가 섞였다. 새벽이 되어서 잠들었는데 몸이 가볍다. T시 여행에 설레는 탓일까. 가는 길에 문화원에 들렀다. 주차하기 불편한 문화원 인도를 넘어 정문에 차를 세웠다. 잠깐 머물 생각이니. 사무국장은 다음주에는 문화교실 프로그램이 나오겠지만 삼 월초부터 강습이 시작될진 모르겠다고 했다. 지금처럼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늘어나면 일정은 불투명해지 거나 아예 중지될 수도 있는 거다. 펜데믹 상황에 장담할 수 있는 게 있겠나. 책상 앞으로 오종종하게 다육식물 화분을 올려놓았다. 가습기에서 불안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었다.
윤이상 기념관에 들렀다.
사 년 전 자전거 여행 때 밤에 들르고 두 번째다. 주차장 안쪽에 독일 풍의 집이 있다. 윤이상 선생의 베를린 풍경을 옮겨 놓은 모양이다. 전시실로 들어가기 전에 기념관 주변을 걸었다. 처음에 와서 자전거를 세웠던 회색 벽돌 구조물 앞의 연못은 메우고 잔디밭을 만들었다. 시에서 무료 기념관을 운영하는 게 좋아 보인다. 지역의 인물은 많이 알릴수록 좋다. 특히 그가 남긴 발자취가 공동체에 좋은 역할을 했다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한국의 근현대사의 이념 논쟁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1967년 안기부에서 부정 선거 여론 무마용으로 조작한 '동백림 간첩단 사건'을 조작했다. 독일과 프랑스 정부의 항의에 윤이상 선생은 무기에서 이 년을 복역하고 1969년 이응로 화백, 천상병 시인 등과 함께 특별 사면되었다. 과거사 진상규명 위원회의 활동으로 재심 결과, 모두 무죄로 판결이 나왔다. 그러나 2014년 시장 선거에 나온 후보는 윤이상 선생을 '간첩'이라고 부르며 보수의 표를 구걸했다. 빨갱이 트라우마는 여전히 시대의 바닥을 흐르고 있다. 대한민국을 분단된 조국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거장은 이승을 떠나 조국에 돌아와서도 분열된 시선을 견디는 중이었다. 재일 작가 서경식은 칠십 년대에 일본에서 한국으로 유학 온 두 형의 간첩단 사건을 경험하며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디아스포라의 관점에서 일본의 전쟁에 대한 무반성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반공 이데올로기에 인권과 평화의 전도된 가치가 일본에서 국외자로 살아가는 그의 몸과 정신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혐한의 식민 지배의 폭력 기류가 오늘날 양국에서 진행형이란 사실을 통렬하게 말한다. 그는 이탈리아로 건너가 나치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프리모 레비의 묘지를 찾아가고 그의 아내를 만나기도 한다. 그의 저작과 행보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책임과 의무에서 소홀함이 없다.
일본의 철학 교수 다카하시 데쓰야(高橋哲哉)는 서경식과의 공저인 「책임에 대하여」서문에서 '아베 신조를 수반으로 한 정권은 전후 일본에서도 가장 오른쪽으로 치우친 매파(강경파)적 정권이며, 그 중심에는 근대 일본의 제국주의(해외 침략과 식민 지배) 역사를 정당화하려는 욕망이 꿈틀대고 있다. 그런 정권이 지금까지 6년 반이나 계속되었고, 올해(2019년) 8월에는 전후 최장기 정권이 될 상황 속에서 한일 관계가 행복할 리 없다. 문제는 그런 아베 정권을 선거에서 이기게 하고 계속 지지해 온 사람들이 일본의 국민이며 유권자라는 점이다. 아베 정권은 일본 국민 다수의 의사에 반해서 독재 강권 정치를 펴는 게 아니라, 일본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아 "민주적"으로 존속하고 있다.'고 날카롭게 꼬집는다. 그렇다. 바로 "민주적(절차)"라는 게 문제다. 언론과 방송의 편향성과 일본 국민의 상황은 현재의 한국의 여론을 형성하는 기류와도 닮아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있는가.
서경식의 말처럼 나도 서양 음악은 부유층이나 즐기는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술은 누가 향유하든 예술 자체를 해석하는 건 작품을 마주하는 사람의 몫이다. 예술을 인문학의 교양 치레처럼 악세서리로 삼는 부류와는 별개로 정신의 고양에 둔다면 예술은 예술을 통해 삶을 궁구하는 사람의 몫이다.
윤이상 선생의 음(音)에 관한 성찰은 동양적 사유의 깊이를 보여준다. 선생은 '음은 이미 하나의 완전한 우주'라고 하며, '유럽의 음(音:tone)과 아시아의 음은 전혀 다릅니다. 서양의 음은 마치 연필로 그어진 직선처럼 들리지만, 아시아의 음은 붓글씨의 획과 같아서 굵기도 하고 가늘기도 하면서 직선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시아의 음은 그 자체에 유연한 해석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단일음은 아직 음악이 아닙니다. 유럽의 음악에서 음들은 수평, 수직으로 연결되어야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 냅니다. (...) 이와 반대로, 아시아의 음악에서는 하나의 음이 무뚝뚝하지 않고, 그 자체로 음악적인 조형이 가능하기도 합니다. (...) 하나의 음이 울리기 시작하여 사라질 때까지 유연하게 움직이고, 울릴 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그 음은 자체로 이미 하나의 완전한 우주입니다. 라고 말한다. 선생은 음악을 도교의 관점에서 이해했고, 우주에는 항상 흘러 다니는 음이 존재하며 우주 공간이 음향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석한다. 말하자면, 음악은 작곡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낳는 것이며 이 우주의 음악 중 아주 작은 부분만이 음악가를 통해 출산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선생은 철저히 아시아인이었으며, 한국인이었다.
기념관 외벽에는 선생의 일대기가 흑백사진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해방 전후, 한국 전쟁 후 부산에서의 교사 시절, 문화단체의 동료들, 베를린에서의 모습이 시대별로 선생의 삶을 보여주었다. 독일의 작가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집 「상처 입은 용」을 G시 도서관에서 검색했지만 소장 도서가 아니어서 아쉬웠다. 상처 입은 용은 선생의 어머니가 꾼 태몽이다. 피를 흘리며 승천하지 못한 용은 선생의 지난한 인생 행로를 예고한 것일지 모른다. 주차장에서 본 독일풍의 주택으로 갔다. 선생의 서재와 거실을 재현해놓은 공간이었다. 일층의 서가에 꽂힌 책을 보고 싶었지만 코로나 방역 관계로 일층은 출입금지란다. 이층으로 올라갔다. 음악가의 아늑한 공간이 빈티지한 가구와 함께 배치되었다. 철제 장식과 경첩이 달린 가구는 한국에서 가져간 물건이다. 선생은 침실에 오십 년대 T항의 사진을 걸어두고 평생 고향을 그리워했다. 선생의 약력 중 출생지는 산청, 출신지는 통영이다. 통영이 고향이다. 출생지를 산청으로 표기하지 않은 것에 아쉬움이 남는다. 사실은 객관적으로 기술해야 한다. 기념관을 에워싸듯 늘어선 후박나무와 벚나무가 따스한 겨울볕을 받아 부드러운 표정이다. 기념관에서 오던 길로 되돌아 사백 미터 거리에 있는 시립박물관으로 갔다.
오후
박물관은 사방에 타일을 붙인 고딕 풍의 기다란 직사각형의 이층 건물이었다.
처음부터 박물관 건물은 아니었고 새로 지은 시청사가 이사 가고, 박물관이 물려받은 것 같았다. 마치 언니의 옷을 물려 입은 동생처럼 외관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박물관 냄새가 나지 않는다. 현관에 들어서면서 내 생각은 점점 뚜렷해졌지만 혼자 안내 부스를 지키는 직원에게 물어보진 않았다. 일층의 기획 전시실은 비었고 이층에 올라가 관람하란다. 구석의 캔버스에서 관광지도를 챙겼다. 창문이 없는 어두운 이층은 전시물에만 조명을 비춰 무덤 속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이층 전체를 양분하고 다시 앞뒤로 나눠 민속 공예, 역사 전시 등으로 배치했는데 시립 박물관치고는 전시물과 공간 구분이 작고 단순해 보였다. 지역을 거쳐간 수군 통제사의 영정과 고서, 활과 검 등이 있었는데 관심을 끈 건 선사시대 유물이었다.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빗살무늬 토기와 돌 도끼, 돌 화살촉 등은 많이 보았는데 당시의 인골이 전시된 건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해안가 패총에서 나왔을 인골에서 확인된 잠수병의 흔적이었다. 발굴된 인골은 특이하게 귀 부분이 볼록 튀어나온 현상이 관찰되는데, 이는 '외이도 골종(外耳道 骨腫)'이라는 병징으로 골화이상ㆍ염증ㆍ잠수ㆍ골특수질환 등에 의해 유발되어 생기는 것이란다. 특히 오랜 시간 잠수를 하는 잠수부와 해녀들에게 발생하는 일종의 직업병이다. 연대도 조개무지(貝塚)에서는 전복과 소라 등 수심 10~25m의 깊은 바위틈에 서식하는 조개류가 다량 출토되었다. 당시 살았던 신석기인들이 바다를 터전으로 삼고, 지속적으로 바다 속 깊이 잠수했음을 알 수 있는 증거 자료였다. 지난번 섬의 민속박물관에 갔을 때 선대의 수많은 손길로 매만졌을 생활 도구를 보았는데 여기에서 석기시대의 물건을 만나는 느낌이 과거와 다르게 예사롭지 않다. 인류의 역사와 문명은 토기에서 비롯되어 지금은 걸어가면서 통화하고 영상을 보고 정보를 수집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때와 비교해 본다면 인간의 행복의 무게는 어느 쪽으로 기울까.
미륵도의 등대낚시공원은 한산도와 마주보고 있었다. 하긴 다도해의 섬들이 어깨가 닿을 듯한 지척이라 T시의 동쪽 해안 어느 쪽에서나 한산도가 나타난다. 선착장에 띄운 작업선에서 아지매들이 멍게를 다듬는다. 남자들은 세척한 멍게를 콘베이어 벨트에서 트럭의 수조에 담는다. 이순신 공원 가는길에 돼지국밥 집에 들렀다. 사 년 전에 자전거를 타고 와서 찜질방에서 자기 전 돼지국밥을 먹었다. 굴 돼지국밥이 있어 그걸로 시켰다. 혼자 들어온 남자가 주인과 올림픽 얘기를 나눈다. 컬링 팀이 4강에 올라갔다고 하니 주인은 모르는 눈치다. 내가 역전승했다고 하자 '아, 그랬군요'하며 식판에 반찬을 올린다. 난 암만 봐도 경기 규칙을 모르겠다고 했다. 작업 인부 두 사람이 들어와 국밥을 시킨다. 나와 대각선으로 앉은 사내가 물수건으로 콧구멍을 닦는다. 식욕이 떨어졌다. 그는 동료에게 숏트랙에서 금메달 딴 선수의 연금을 가늠하며 무탈한 장래를 점친다. CF 제의도 한두 건은 들어올 거란다. 광고회사 시절 생각이 났다. AE와 제작팀에선 유명한 모델을 심심찮케 보았다. 내가 담당한 미디어팀에서는 광고 시간을 따느라 비굴한 영업을 계속했다. 36부작 '모래시계'의 광고를 따내고 정작 본 프로그램은 보지 않았다. 지겹고 더러운 생각이 들어서였다. 전국이 모래시계에 열광할 때도 보지 않았다. 마지막 방송분만 보았다. 인부는 지인이 이탈리아에서 태권도 감독을 십오 년 하고 들어왔다고 했다. 가족은 두고 온 은퇴 감독은 백수로 지내다 대학의 교수 자리를 제의받아 안착했다고 했다. 지척이라 국밥을 뜨면서도 사내의 얘기가 귀에 쏙쏙 들어왔다. 국물은 설거지 물로 끓인 것 같이 슴슴한 맛이었는데 반찬은 구색마다 정갈했다. 송송 썰어놓은 청양고추는 손도 대지 않고 양파를 된장에 찍었고, 배추 겉절이를 아삭아삭 씹었다. 살 오른 양식 굴을 찾느라 자꾸 숟가락으로 뚝배기 바닥을 긁었다.
공원 주차장에서 세콰이어 가로수가 줄지어 선 오르막길을 오르니 이순신 장군 동상이 높이 서서 T시 앞바다와 한산도를 내려다본다. 이순신 장군은 충남 아산군 염치면 백암리 출신이다.
초등학교 때 외운 장군의 출생지를 여적지 기억하는 게 신기하다. 아마 치매에 걸려도 이건 기억해낼지 모르겠다. 장군은 어릴 때 서울에 올라와 유성룡과 한 동네서 자랐다. 서애가 동네 형인 셈이다. 세 살 위인 서애는 이순신의 성품을 잘 알았다. 서울 건천동에서 이순신과 공부하며 우정을 쌓은 그는 이순신이 어려울 때 많이 도와준다. 32전 32승의 세계 해전사 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 장군 앞에 하얀 물거품을 끌고 오가는 고깃배와 풍어를 비는 단골의 징 소리가 잔잔한 물살로 퍼진다. 잎 끝이 낮술 취한 것처럼 붉게 물든 홍가시나무가 부드러운 바람에 흔들렸다. 어려서부터 길눈이 좋아 낯선 길도 금세 익혔다. 섬의 사방으로 난 길의 감각이 이제는 눈에 익었다. 네비를 켜는 일이 줄었다. 섬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로질러 가는 길에 벌써 봄이 온 것처럼 눈부신 햇살이 출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