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예술의 편식은 필경 미학적 자기모순 혹은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다.
자기 집 고양이와 개는 가족으로 사랑하면서 타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일상화한다면, 인류의 평화를 원한다면서 남과 북의 대치와 강대국의 전략적 행보를 고민하지 않는다면 개인적 이기주의다. 인권과 평화를 존중한다면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외면한다면 이는 인권의 폭넓은 이해와는 거리가 멀다. 또한 평화를 사랑한다면서 미국의 지지를 받는 이스라엘의 폭력을 두둔하고 팔레스타인의 저항을 비난한다면 이는 평화가 아니다. 인권과 평화를 말하기 전에 진정한 이해와 공감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알아야 하는데 '앎'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알고서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허깨비 지성에 불과하다. 죽은 지성은 어떠한 울림도 실천도 없다.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일본 기업의 한국 먹튀 방송을 보았다. 일본 기업이 한국에 진출했다가 일방적 폐업을 통보한 것이다.
매주 목요일 사이타마현의 산켄전기 본사 앞에서 항의 집회가 열린다.
“한국 노동자들을 희생시킨 먹튀 기업 산켄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산켄은 창피한 줄 알라!”
업계 세계 8위인 산켄전기는 1973년 마산 자유무역지역에 한국산연을 설립했고 2021년 1월 폐업했다. 폐업 소식이 전해지자 도쿄, 오사카, 나고야 등 일본 전역에서 산켄전기에 대한 항의행동이 시작되었다. 일본의 시민 노동자들이 한국산연의 사정을 알게 된 것은 2016년. 그때도 산켄전기는 한국산연 노동자 전원을 해고했다. 해고된 한국의 노동자들은 연고 없는 일본 땅을 무작정 찾았다. 이들의 처절한 외침에 일본의 양심 세력이 응답했다. 국경 없는 229일간의 현지 투쟁으로 해고자 전원은 복직했다. 그러나 4년 후, 또다시 폐업.
일절 상의 없이 회사 홈페이지에 폐업 공지를 올린 매정한 폐업이었고, 이미 한국 내 다른 공장을 사들여 생산을 빼돌린 용의주도한 작전이었고, 코로나19로 일본으로 항의행동에 나설 수 없는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일본에 올 수 없는 한국 노동자들을 대신해 일본 원정 때 인연을 맺었던 일본의 지원자들이 더 거세게 일어섰다. 얼어붙은 한일관계 속에서 뜨거운 한일 연대의 현장이다.
"김대중 구명운동, 김지하 구명운동,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 피해자 구원회 등, 군사정권 시절 일본 양심 세력의 눈부신 활약은 이어졌다. 일본 극우단체가 혐한을 외치는 거리에서 대다수 일본 시민들은 그냥 지나친다. 무언의 동조다. 그러나 어느 사회나 뜻있는 양심 세력은 존재한다. 인권을 위한 연대는 국경도 인종도 구분하지 않는다. 식민지 시대에 일본 내에서는 군국주의 정권에 대항한 반전 세력이 있었다. 투옥과 고문, 처형을 당하면서 인간의 양심을 버리지 않고 조선, 중국, 대만, 유럽의 국가 등의 운동가들이 단합했다. 사상과 이념은 차별을 배제한다. 공산주의든 사회주의든 그것이 인류의 미래를 위해 합당하다면 수단으로 택했다. 암울한 시기의 저항인들은 톨스토이의 인간주의와 무정부주의자 P.A. 크로폿킨의 상호부조론에 열광했다. 당시에는 제국주의적 침략에 맞서 대항하는 목마른 사상적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일본인 중에는 식민지 시절 조선에서 독립운동가와 연대 투쟁한 이가 있었다. 끝까지 전향서를 쓰지 않고 9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감옥에 있다가 만기 출소한 일본인이 있다. 그가 바로 이소가야 스에지(磯谷季次)다. 치안유지법(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된 재조선 일본인 중 '최장' 수감기록이다. 연변 소설가 김학철은 1929년 일어났던 원산총파업에서 일본인 선원들이 뱃고동을 울리며 조선인 노동자들을 응원하는 모습을 보고 일본인일지라도 대자본에 대항하는 같은 노동자라는 인식을 처음 가졌다고 한다. 일본 변호사 후세 다쓰지(布施辰治)는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했다.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와 소설가 메도루마 슌(目取眞俊)은 군사 재무장을 위한 정권의 평화헌법 개정에 저항하고, 오키나와 미군 기지의 철수에 몸을 던져 싸우고 있다. 반전 평화의 깃발이다.
텔레비전 보다 우연히 마주친 장면은 국가와 민족을 넘어선 시민의 연대 의식이었다. 내가 텔레비전을 보면서 안타깝게 여기는 건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인권과 평화에 대한 성숙한 연대 의식이 모자라다는 것이었다. 가짜 뉴스에 휘둘려 믿고 싶은 뉴스만 보고 올바른 판단을 회피하는 것 말이다. 새로운 변화를 두려워하고 과거에 머물려는 습성은 결국 공동체를 불행의 늪에 가두는 꼴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이미 일상을 강타한 현실이다. 우리는 보고도 사실을 믿지 않으면 인권과 평화는 나비의 꿈이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