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by 소인

단상


간은 정치적인 존재이며 모든 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다.

과거는 현재로 이어져 미래로 가는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사물과 타인은 따로 떨어진 섬이 아니다. 다양한 주제로 지역의 문화를 만날 때 지식을 통한 삶의 성찰이 연결된다. 일테면 복합 공간에서의 다양한 주제는 삶을 문화의 측면에서 깊이 있게 톺아보는 계기가 된다. 어촌과 인물, 역사와 문화의 카테고리에서 문학, 예술, 생활 등의 소분류로 다양하고 깊이 있는 전시를 한다면 관람의 만족과 이해도는 배가할 것이고, 얻는 즐거움도 크리라 생각한다. 세태에 따라 오락성 엔터테인먼트를 늘리면 사람이 모이고 돈이 모일 테지만 관광의 일회성 소비는 모두에게 얕은 기억을 남겨준다. 이때 사진은 지나친 기억의 지점을 찍는다.


실을 말하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친 확증 편향은 인식의 확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역 출신의 이름난 인물이 있다. 자기 분야에서 노력하여 뛰어난 재능을 나타낸 인물은 공동체의 자산이다. 하지만 '탁월함'에 불구하고 인물에 대한 평가는 대중의 보편적인 기준에 의거한다. 그의 작품과 이념에 스민 인간에 대한 존중과 보편타당한 삶의 모습을 인민이 인정할 때 그의 업적과 삶은 존중될 것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로 실수와 착오는 생긴다. 실수에 대한 반성과 용기 있는 자기 고백이 수반되어야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진다. 까놓고 얘기하면 청마 유치환에 대한 친일 논란과 음악가 윤이상에 대한 빨갱이 논란이다. 유치환은 식민 시절 하얼빈으로 건너가 살았다. 그때 창작한 작품에서 독립운동가를 비난한 글에 대한 논란이고, 윤이상은 군사독재 시절 안기부에 의해 간첩 조작으로 옥고를 치른 이후 북한에 왕래한 사실을 두고 불거진 논란이다. 사실에 대한 해명과 조사는 양측의 논란으로 결말이 요원한 상태다. 일개 범인이라면 논란의 확장에까지 이르지 않겠지만 논란으로 분열된 모습은 진행형이다. 친일과 공산주의는 오늘까지도 사회의 트라우마로 작용해 한걸음도 진전된 면이 없다. 그건 친일과 반공으로 사회를 갈라놓으려는 자들이 얻는 이익 때문이다. 이천 년대 넘어 지자체 선거에서 음악가를 빨갱이로 매도하며 보수의 표를 모으려는 시도를 볼 때 슬픔과 분노의 감정이 꿈틀댄다. 이념을 넘어선 화해는 우리 사회에선 언제쯤 가능할까. 해방 이후 청산되지 못한 친일 협력자들, 강대국에 의해 분단된 현실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독립과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세력과 세력의 다툼으로 겉으로는 선진국 입네 자부심을 갖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미성숙한 배부름에 다름 아니다.


그가 친일 인사인지 공산주의자인지 사실 여부는 들떼 놓고라도 이데올로기는 유통기간이 있는 식품과 같다. 범박하게 말해서 사실에 대한 오해와 이해, 반성과 용서, 화해와 환대가 사회의 화두와 실천 덕목이 되어야 한다. 남의 고통엔 아랑곳없이 나와 내 가족만 잘살면 된다는 가족 공생 이기주의는 사회에 팽배하다. 무한 경쟁과 승자 독식의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에서는 당연한 가치일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건 자본 이기주의는 공동체를 공멸로 이끄는 사악한 이념이다. 과거 역사의 고비마다 청산하지 못한 이념과 갈등의 유산을 오늘까지 대물림한 상황에 이른 탓이다. 선거 때만 되면 미래를 여는 기회의 마당에서 아까운 열정을 소모하고, 진영의 논리로 무장한 얄팍한 지성은 상대에 대한 혐오와 가짜 뉴스 생산에 열을 올린다. 물어뜯는 자리에 남는 건 내일을 위한 열정도 가치도 사라지고 피 묻은 상처만 가득할 뿐이다. 그러는 동안 단단해지는 건 빈부의 양극화와 계층 간 불평등과 차별, 보편적 인간의 존엄성은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진다.


대다수 시민들은 이념의 문제가 수면 위에 떠오를 때는 맹렬하게 물어뜯다가 일상으로 돌아가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아간다. 그것은 집단의 힘이 뭉칠 때 발현되는 에너지인데, 그 동력은 역사적으로 내 편 네 편으로 적대적 감정을 부추긴 지도자나 언론의 영향이 크다. 개인으로선 관심이 없거나 한없이 무논리로 일관하다가도 문제만 터지면 감정적으로 변해 거품을 물고 달려드는 것이다. 우리에게 용서와 관용의 덕목은 머나먼 우주에서나 통하는 가치일까. 헌법에서 보장된 집회 결사,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는 명문에 불과한 개념인가. 집단의 습속은 때로 자유로운 개인을 질식시킨다. 집단에 속한 개인과 다수는 조직에서, 위에서 지시한 것을 여과 없이 그대로 따라 한다. 무비판 무지성이 자신을 보호한다는 단순한 믿음에 의존한다. 그러기에 내 편이 아닌 상대편의 주장과 논리는 억지고 반공동체적이라고 혐오한다.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가짜 뉴스를 생산하고 확산시킨다. 대립과 분열의 결과는 공동체의 발전 지체와 상흔으로 남을 뿐이다.


리는 무지했고 집단 지성보다는 상대를 고발하고 죽여야 살아남을 수 있는 비굴한 시대를 헤쳐왔다.

식인은 민족의 독립과 해방보다 일신의 안락을 위해 입을 닫거나 친일을 미화했다. 그것이 해방 후 정권에 의해 청산되지 않고 연장되었고, 군사독재는 통일과 화합으로 가는 길을 차단했던 것이다. 민주화 투쟁에서 가난 탈출로, 가난을 탈출하자 더 많은 권력과 부의 욕망으로 채찍질하며 달려온 셈이다. 겉으로의 질서와 도덕은 유지되는 것 같아도 내면의 이기심과 욕망은 양심을 무질러버렸다. 청년에게 현실은 지옥이며 낭만적 사랑은 그림처럼 공허한 꿈이다. 민주적 절차는 다수의 위험한 집단의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보편적 민주주의의 폭력은 상시적으로 자행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잣대로 보편적 가치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들(저항하는 시민 세력, 소수자)을 배제하고 자신들은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폭력과 지배를 정당화한다. 자기기만이고 자기모순이다. 개도 표를 물고 다니는 시대다. 현재의 상황을 낳은 시민은 적극적이거나 소극적이거나 방관자 거나 모두 공범자다. 나도 예외일 수 없다.


거가 다가온다.

정부에 질린 사람이나 야당의 행태에 신물 난 사람들은 정치 자체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투표를 거부한다. 거부도 표현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무효표와 무투표는 다른 의미다. 정치적이지 않은 존재는 없다. 바람에 날리는 거리의 휴지 쪼가리도 정치와 연관되어 있다. 쓰레기 줄이기와 처리 문제는 삶과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박빙의 상태인 대치 국면에서 누군가는 허탈하게도 지금 후보 대신 막대기를 꽂아놔도 박빙일 거란다. 비전을 얘기하는 정책은 없고 공약을 남발하는 후보에겐 진지한 고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철학의 부재, 사유의 실종은 양아치 수준의 패거리들의 밥그릇 싸움이 뻔하다. 겁박과 윽박지름을 무기로 칼춤 추는 후보에게 열광하는 무리는 이성도 열정도 사라진 집단 히스테리 환자를 방불케 한다. 불어난 노인 인구는 무시할 수 없는 정치 세력이 되었지만 합리적 정책 없는 편 가르기로 상대를 증오하는 집단에게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후대가 '그때 왜 그랬어요?'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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