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꺼 일기

by 소인

一人暮らし(40)


백 미터 수영을 했다.

오리발을 끼고 나아갔다. 오리발을 낀 발차기는 투 비트 킥이라기보다 간간이 차주는 정도다. 역시 제일 중요한 건 호흡이었다. 물속에서 숨을 뱉는 동작을 조절하며 숨이 가빠지는 순간을 캐치하면서 호흡을 제 몸에 맞게 조절하며 수영하는 게 포인트였다. 꾸준한 연습이 필요하다. 수영 고수 K는 일 년 만에 호흡을 텄다고 했다. 호흡만 되면 300, 500m 수영은 힘이 부치지 않는 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십오 미터 레인을 오백 미터 수영하려면 왕복 열 바퀴다.


백 미터 수영이 되면 계속 페이스를 유지하며 한 번 수영장에 갔을 때 2km 수영하는 연습을 계속할 계획이다. 일 키로, 이 키로 수영하는 것은 얼마 남지 않았다. 수영을 시작한 지 석 달만의 변화다. 처음에는 자유형 동작만을 익히는 걸 목표로 했다. 수영은 물에 가라앉는 몸의 중력을 손발을 저어 부력으로 바꾸어 앞으로 나아가는 행위다. 인류는 헤엄을 쳐서 새로운 세계로 건너가거나 족쇄의 현실을 탈출했다.

원주민 프라이데이는 헤엄 쳐서 로빈슨 크루소가 있던 섬으로 건너가서 새로운 세계와 조우한다. 에드몬 단테스는 암굴의 절벽에서 뛰어내려 육지로 헤엄 친다. 뭍으로 건너간 몬테 크리스토 백작은 복수를 실현한다.


면서 물과 만난 경험이 많았다. 낚시를 오래 했고 중선배를 타고 동지나해 가서 고기잡이를 했다. 강원도 살 때 동해에서 십여 년 스노클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영으로 물을 헤친 건 팔당 댐 아래 한강과 한탄강을 건넌 게 유일한 정도다. 체중 조절과 운동 면에서 수영은 뛰어난 운동이지만 뒤늦게 수영에 몰두한 건 몸의 하자(瑕疵)가 민 탓이 크다. 돌 전에 생긴 오른손의 장애는 살아오면서 내면의 낙인으로 굳어졌다. 남들은 눈치채기도 하고 알아도 모른 체 지나갔지만, 신체의 장애는 번번이 길을 막았다. 운명 비슷하게 여기며 살았는데 문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내면을 삭히는 게 고통이었다. 그것은 때로 타자에 대한 울화로 터져 나왔다. 실은 내가 지고 가야 할 짐이었는데 애먼 타자에게 불똥이 튄 거였다. 실수와 회오로 범벅된 부끄럽고 한심한 삶이었다.


통과 슬픔은 겪는 사람의 몫이다.

에서 공감을 한다고 해도 집으로 돌아가 서늘한 밤을 보내는 건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의 일인 거다. 사람들은 고통은 피하거나 건너뛰는 감정으로 여기지만 고통을 통과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진실에는 무게가 실리지 않는다. 아무리 되풀이해도 익숙한 고통은 없으며 고통은 철저히 개인적이다. 자기 앞일도 구만리인데 타인의 고통을 헤아려 자기 몫을 덜어낼 사람은 드물다. 아무리 수사적 언설로 사회를 따듯하게 포장한다고 해도 고통은 철저히 당사자의 몫인 거다. 고통의 반대어가 '좋은' 상태라면 세상은 무수한 '좋아요'의 홍수에 익사하는 중이다. 다르거나 차이 나는 캐릭터는 불안과 공포를 가중하는 가치로 바뀌었다. 닮거나 동의해야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그만큼 현실은 엄혹한 사냥터로 변했다. 고통에 대해 깊고 오랜 사유를 외면하고 쾌락에 안도하는 삶이라면 한 번뿐인 삶은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로나19 바이러스는 연일 최고치를 갈아치운다.

구 반대편에서는 전쟁의 공포가 눈앞의 현실이 되었고 불타는 건물, 끝없는 피난민의 행렬을 실시간으로 방송한다. 그런가 하면 대선 경쟁은 막바지의 절규로 도배하는데 느닷없이 일어난 산불의 화염이 혀를 날름 대며 숲과 집을 삼키며 타오른다. 건조한 대지와 거센 바람 앞에 소방 헬기는 연기를 뚫고 물을 쏟지만 역부족이다. 고통은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사람들은 안타까움과 호기심을 섞어 뉴스에 촉각을 세우는 한편 자신의 일상에 안도한다. 전쟁과 범죄, 가난과 질병이 도처에 수두룩한 일상의 하루를 건너는 일은 90%의 지난한 숙제가 되었다.


이프타운 대학교의 철학 교수 데이비드 베너타(David Benatar)는

'존재하게 되는 것이 항상 심각한 해악'이라고 논한다. '비록 사람의 삶에 있는 좋은 것들이 그런 것들이 없을 경우보다는 삶이 더 잘 진행되게 하기는 하지만, 만일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좋은 것들이 없다고 해서 박탈을 겪을 수 없다. 존재한 적이 없는 사람은 박탈을 겪을 수 없다. 반면 존재하게 됨으로써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면 입지 않았을 상당히 심각한 해를 입는다'라고 논거를 들어 주장한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는 반출생주의는 인류가 멸종하게 되는 것이 더 낫다는 결론을 함의하므로 많은 이들에게는 반직관적으로 보이고 논란을 부른다.


왜 우리는 역사적 진실을 캐려고도 하지 않으며 상대를 물어뜯는 데만 골몰할까.

아우슈비츠의 참혹함을 증언한 이탈리아의 유대인 프리모 레비는 왜 말년에 자살로 삶을 끝냈을까. 이차대전 이후 지구 각지에서 벌어진 전쟁과 학살은 조금도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걸까. 나치에게 피해 입은 이스라엘인들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끝없는 증오의 폭력을 휘두를까.

전쟁을 찬양하며 아시아인을 살인과 강간, 방화로 약탈한 할아버지의 역사를 그리워하며 일본의 후손들은 전쟁을 부추기는 걸까. 폭력을 휘두른 사람들은 어째서 반성하지 않는 걸까. 왜 맨날 대중들은 선거를 치르고 후회하면서 반평화, 반생명의 후보에 열광하는 걸까. 반성이 없는 인간은 메두사의 손가락을 지녔단 말인가. 무능한 인간이 활개 치는 것만큼 재앙은 없다


인 김수영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派兵)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중략)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고 했듯이 우리에게 거시적 평화는 멀고 미시적 이득에 기울기 마련이다. 하지만 자잘한 일상의 평온과 거시적 평화는 사유하는 나로부터 시작한다. 조금 '주의를 기울이면' 거시적인 평화는 온전히 모두의 몫이고 역할이란 생각이 든다.


으로 내려갔을 때, 또는 섬으로 내려갈 계획이라고 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했다.

원하는 쪽은 용기가 있다 거나 부럽다고 했다. 더러는 '어쩌자고 한가롭게 섬에 간단 말이노, 가정이 있는 사람이...'

는'집 나가면 개고생이에요, 뭐니 해도 마지막 기댈 데는 가족이잖아요'

렇다. 그들의 말 대로 난 집을 떠나 살기에 이른 것이다. 바이러스가 점령한 일상에서 할 수 있는 건 제한적이다. 어떤 행위가 평화나 비폭력에 맞는 것인지는 애매하다. 그냥 태어난 것처럼 서늘한 삶에 저항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동백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