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人暮らし(41)
선거 다음날 오백 미터 수영을 했다.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대신 몸의 변화를 느낀 건 소득이었다.
에세이스트 보니 추이(Bonnie Tsui)는 「수영의 이유 Why we swim」에서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의 다양한 수영 편력과 수영인들의 인터뷰를 흥미진진한 필체로 얘기한다. 그녀는 물과 인간이 만나는 두려움과 황홀경의 상태를 원시적 감각으로 써나간다. 물속에서 팔다리를 휘저어 앞으로 나아가며 고개를 내밀고 숨을 들이마시는 행위는 죽음에 저항하는 최소한의 동작이며, 몰아의 상황을 경험하는 종교의식이라고까지 말하는 그녀의 수영 예찬은 깊고 넓다. 그녀에 비하면 나이 들어 본격적인 수영을 하기 시작한 나로서는 언뜻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조금은 알 것 같다. 왜냐하면 나도 살아오면서 물과 함께 지낸 시간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영장 가는 길에 시간이 남아 조각 공원 산책로를 돌아 장승포로 내려가기로 했다.
겨우내 찬바람에 뜸 들이던 동백꽃이 튀밥처럼 붉은 꽃을 연신 터뜨린다. 한 나무에 무수한 꽃송이를 달고 나무 아래에 또한 무수히 꽃을 떨군다. 내륙 촌놈이 섬에 내려와 때아닌 꽃의 만개에 정신을 잃는다. 가다 멈추어 사진을 담고 오른편 아래의 바다를 살핀다. 해송 숲의 발목은 하얀 바위들이 띠처럼 둘렀는데 튀어나온 바위에는 어김없이 낚시꾼이 캐스팅을 한다. 움푹 들어간 곳에 닻을 내리고 선상 낚시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산책로엔 종일 오가는 산책인이 끊일 새가 없다. 개를 데리고 친구와 더불어 라디오를 들으며 걷는다. 머리 위에 붉은 꽃잎이 노란 수술을 벌리고 짭조름한 바람을 마신다.
날 흐리다.
테트라포드 너머로 바다가 허연 색깔이다. 잘게 부서진 구름 사이 해가 잿빛 하늘을 밀어내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다. 간밤 그물을 놓고 물고기를 기다리던 고깃배가 포구에 들어와 몸을 푼다. 자러 갔는지 밤새 배 주위에서 물고기를 노리던 갈매기는 보이지 않는다. 방파제 안으로 항아리 모양으로 생긴 포구에 배들이 밀어낸 잔물결이 수변 공원 벽에 이따금 부딪친다.
생선 창고 골목에서 청년 셋이 만난다. 검은색 나이키 후드티를 입은 청년은 조금 전 배에서 봉지 하나를 들고 내렸다. 알아듣진 못해도 베트남어 억양이다. 그가 다른 청년에게 봉지를 건넨다. 생선이 든 것 같은 봉지가 무쭐하다. 그는 타국에서 그물을 올려 고기를 잡으며 돈을 버는 중이다. 바람 부는 밤바다에서 추위를 견디고 고독을 견뎠을 거다. 멀리 반짝이는 고깃배의 불빛, 밤바다를 적시는 차가운 달빛을 보며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떠나온 고향 마을의 나무 그늘과 그리운 얼굴들. 간단한 말로 작업 지시와 의사를 나누는 타국의 사람과는 마음의 얘기를 터놓기엔 서로의 언어가 짧다. 정한 계약기간을 채우고 큰돈을 쥐고 돌아가는 꿈을 꾸는 것일까. 가난을 벗겨내기엔 하루하루를 견디는 고통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막막하다. 음식이 입에 맞고 안 맞고가 아니다. 잠자리가 불편하고 말고 가 아니다. 태어나서 자란 마을에서 평범한 꿈을 키우며 살기에 빠듯한 현실에 쫓겨 머나먼 코리아로 흘러든 자신의 운명을 불안스레 점쳐 본다.
남과 북으로 갈린 이 나라는 오래전 큰 전쟁을 겪었다. 이 나라의 군인들은 우리나라가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으로 갈려 전쟁을 벌일 때 미군과 함께 용병으로 들어왔다. 베트남의 독립전쟁 역사는 백 년을 뛰어넘는다. 외침과 식민지에 저항하는 역사를 코리아도 겪지 않았는가. 용감한 따이한 군인들은 베트콩 섬멸 작전에 미군보다 먼저 투입되었다. 커다란 바나나 나무 잎에 몸을 숨긴 베트콩 저격병에게 전우를 잃은 따이한은 눈이 뒤집혔다. 베트콩 마을에 들어가 아이 노인 여자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여버렸다. 콩 볶듯 무차별 난사 터지는 수류탄! 화염방사기의 불길! 겁에 질린 아이의 팔다리를 두 명의 병사가 근육질의 팔로 잡아당겨 찢어버렸다. 초토화된 마을을 시체와 함께 불도저로 밀어버렸다. 그러면서 마을을 재건하고 학교를 짓고 병원을 세웠다. 고국의 신문에는 아이와 함께 환하게 웃는 파월 장병의 사진이 실린다. 베트남 전역에는 따이한의 전쟁 범죄를 잊지 말자는 증오비[憎韓碑]가 수두룩하다. 세계 최강 미국의 군대를 쫓아낸 건 베트남 민중의 의지와 남베트남의 부패였다. 베트남 전쟁으로 한국의 피 끓는 청년 오천여 명이 죽고 삼만여 명이 부상하거나 고엽제 후유증으로 대를 이어 고통 중이다. 사회주의 국가 베트남은 한국 전쟁의 폐허에서 부를 거머쥔 코리아와 손잡고 경제 발전에 힘쓰고 있다. 청년은 해외 연수란 명목으로 비행기를 타고 와서 코리아의 남도에서 배를 탔다.
선거 이후 뉴스를 끊었다.
승리에 도취한 사람들의 오만한 권력의 운용을 미루어 짐작하기 때문이다. NHK에서는 2011년 3•11 쓰나미 사태를 추념하며 연신 기획 프로그램을 쏟아낸다. 용융된 원전의 폭발로 인한 피해 복구와 태평양 건너 해안의 세슘 회복 등을 과학자가 나와 브리핑한다. 주민들은 쓰나미의 악몽을 더듬으며 후손의 평화를 빈다. 그런데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예측 가능한 공포에 대해선 하나같이 입을 닫는다. 우연히 일어난 강력한 지진에 의해 또한 우연히 원자력 발전소에 여파가 미쳐 발생한 '우연한' 재난에 초점을 맞춘다. 순전히 막을 수 있었던 피해임에도 우연한 개입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는 거다. 당해도 싸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지만 아무도 바라지 않았던 대동아 공영을 외치며 침략 전쟁을 미화했던 선대가 히로시마와 나카사키 원폭 투하의 '피해'를 운운하는 아이러니가 오버랩된다.
과거의 종자 개량은 돌연변이에 의한 것이 많았다. 우수한 돌연변이 형질을 유전체로 삼아 퍼뜨린 종자는 인간의 식량에 획기적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돌연변이조차 '어느 날 갑자기'는 아니다. 유전체의 변이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생명의 변화다. 인간의 과학으로 발달한 문명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재앙의 주기를 상시적인 상황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럼에도 '뜻하지 않은' 재난은 불가항력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는 데 내면화되었다. 화석연료의 사용과 숲의 절멸로 인한 기후변화는 날씨에 의한 피해 주기를 항상적으로 조율해 놓았다는 얘기다. 기후 과학자나 미래를 예측하는 예술가, 환경단체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자본의 제국주의에 무력한 시민은 현재의 삶의 양식을 바꿀 생각도 능력도 상실했다. 서서히 무너지는 지구 생태계를 목도하는 게 아니라 '우연히' '어느 날 갑자기' '별안간'의 돌발 사태는 언제나 그림자처럼 우리의 앞뒤로 나타난다.
인도의 사회인류학자 아미타브 고시(Amitav Ghosh)는 인류세에 일반적으로 기후 문제를 둘러싼 담론이 여전히 대개 유럽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걸 지적하며, 아시아가 기후 위기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아시아가 지구 온난화에서 중심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곳에 거주하는 인구수 때문이다. 이의 중요성은 아마도 미래와 관련해 생각해 볼 때, 그리고 지금 지구 전역에서 진행 중인 변화로부터 가장 크게 위협받을 이들이 살아가는 장소를 생각해 볼 때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기후변화의 잠재적 피해자 대다수는 아시아에 있다'라고 말한다. 올봄 대규모로 발생한 동해안 산불은 과연 분노한 노인의 일탈 때문일까. 영동과 영서에 걸친 건조한 푀엔풍과 전례 없는 겨울의 가뭄이 협력한(?) 탓이 크다. 그렇다면 '전례 없는' 가뭄과 홍수를 우리는 해마다 겪고 있지 않은가. 폭염과 가뭄, 홍수와 삼한사온이 깨진 혹한의 추위를 보도하는 걸 보면 '기상 관측 이래'라는 관용어가 심심찮케 등장하는 것도 거대한 기후변화가 코앞의 현실이 되었다는 말이다.
전국에는 청년 마을 공동체가 여럿 있다.
무한 경쟁의 살벌한 도시의 삶을 떠나 자연과 생태에 귀의하는 삶의 양식을 더불어 실천하는 공동체다. 흙의 소중함과 생명과 노동의 의미를 깨달으며 스스로의 삶을 꾸미는 아름다운 청년 공동체들이다. 산청의 민들레 농장, 해남의 미세 마을, 괴산의 문화학교 숲, 제천의 농촌공동체연구소, 남원 지리산의 작은 자유 등에서 삶을 실험하며 개척한다. 그들의 글을 읽다가 노인공동체를 검색했다. 치매노인 공동체나 노인 셰어하우스는 있어도 노인들이 모여 농사짓고 나누는 공동체는 보이지 않는다. 죽음과 가까운 나이라서 미래를 보장할 수 없어서일까. 6,70대의 초령 노인이면 얼마든지 노동과 나눔을 실천할 수 있겠지만 고령으로 갈수록 질병과 노화는 신체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수소문하여 공동체 옆자리의 오두막을 구해 사는 건 꿈일 거다.
007로 유명한 배우 숀 코네리와 미모의 여우 캐서린 제타 존스가 주연한 영화 '엔트랩먼트(entrapment)'가 있다. 함정 수사'란 말 그대로 반전을 거듭하는 영화다. 영화의 중간에 나이든 숀 코네리와 젊은 캐서린과 아찔한 정사 신이 연출될 뻔한 대목이 있다. 여자의 뜨거운 눈빛을 본 남자가 말한다.
'나에겐 말 못할 복잡한 사정이 있어, 미안해...'
여자는 알아듣는 듯 흥분을 누르고 그의 품에 기댄다.
이어 남자가 말한다.
'당신은 젊지만 나에겐 미래가 없어'
여자가 말한다.
'내가 있잖아요'
나도 그러하다. 과거와 현재는 지난하고 미래는 짧다. 불가에선 인생을 고해라 해석하는데 나름 이유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구를 구하는 거시적 과제보다 작은 것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소확행(小確幸)을 실천하기로 했다. 이건 생존의 사냥터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방어 기제이기도 하다. 연애와 결혼을 포기하고 애완동물이나 피규어에 몰입해 사는 쪽이 노예처럼 사는 것보다 낫다는 결론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생각 없는 인공물로 변화시켰다.
시골에는 고령화로 인한 빈집이 늘어난다. 차츰 없어지는 마을도 생겨날 거다. 하지만 연고 없이 빈집을 싸게 빌리거나 무상임대를 구하는 건 힘들 것 같다. 발품을 팔아 돌아다녀도 마음에 드는 입지는 쉽게 나타나지 않을 것 같다. 잘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나이 든 이방인을 선뜻 반기는 곳은 없을 거다. 도서관과 수영장(아니면 강이나 바다)이 가까운 산촌의 오두막집, 겨울엔 장작 스토브에 불을 지피고 눈을 걷어내 파릇한 나물을 캘 수 있는 텃밭은 영원히 꿈으로만 남을까.
이것저것 생각이 많은 아침이다.
이달 안에 1km 수영이 가능하게 되면 사월부터 바다수영 동회회를 따라나설 생각이다. 허리에 다는 부표와 전신 슈트도 장만해야 한다. 포구를 돌아서라 은빛 생선의 배처럼 날카롭게 빛나는 수영장 지붕이 느닷없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