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1

by 소인

곡성(谷城)①

툭하면 가출했다. 소년은 한강 다리 건너 남도로 향했다. 목적지가 있어서 라기보다 훔쳐 탄 기차의 종착역이 목포였다. 논밭 지나고 도시 가운데를 거침없이 달린 기차는 남쪽의 찰방이는 백사장에 긴 몸을 풀었다. 달아오른 등허리에선 허연 김이 피어났고 옆구리에선 보퉁이 이고 진 사람들이 벌레처럼 기어 나왔다. 얼음 풀리기 시작한 남도 개울가엔 탁탁 벌어진 개버들 솜털만 한 봉오릴 치미느라 아우성이었고, 논바닥 갈아엎는 들노래 지천이다. 배고픈 소년은 동냥 밥 얻어먹으며 정처 없이 떠돌았다. 육 남매 북적이는 집으론 죽어도 가기 싫었다. 이대로 세상 구경으로 떠돌다 대가리 굵어지면 아무 데나 머물 자리 기어들면 그뿐이란 생각이었다. 무엇이 소년을 세상 밖으로 이끌었을까. 거기에 대해선 모른다. 역마 직성을 타고난 것인지 고정된 가난에 대한 반항인지 알 순 없었다. 이후로 소년의 가출은 습관이 되었다.

아, 곡성이란 마을엔 어떻게 찾아들었는지 기억이 없다. 어둠 깊은 밤 허기진 배를 쥐고 남의 집 헛간에서 깜박 잠들었는데 지나던 야경꾼의 눈에 뜨였다. 간첩이 출몰하던 시절 자경단을 조직한 마을 사람들은 소년을 동네 지서로 데려갔다. 소년은 오늘 이사 온 후 길을 잃었다고 천연스레 둘러댔고 굵은 안경테의 순경은 국밥을 시켜주며 날 밝으면 집 찾아주겠노라며 등 두드렸다. 배 부르니 잠이 찾아왔다. 한참 자던 소년은 새벽 동살 전 숙직실의 높다란 창을 빠져나와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누가 잡으러 오는 것도 아닌데 마을 밖을 향해 달렸다. 철길 지나고 공동묘지를 지났다. 초봄의 들판엔 서리가 하얗게 피어 솜뭉치가 일렁이는 듯했다. 두어 시간 달렸을까 먼동이 밝아오는 거였다. 돌아보니 떠나온 마을은 야트막한 산줄기에 묻혀 이미 사라졌다. 가장자리에 자박한 살얼음 낀 개울에 내려가 물을 떠먹었다. 손바닥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었다.

문득 집 생각이 났다. 봄방학 전 담임선생은 소년에게 글짓기 상장 내밀며 머리 쓰다듬었다. 체육만 빼곤 나머지 과목이 모두 수였다. 우수수 말 그대로 추풍낙엽 같이 거칠 것 없는 성적이었는데 체육이 우인 건 순전히 소년의 화상 입은 오른손 때문이었다. 손이 불편하니 체육은 못할 거란 지레짐작이었다. 미술은 물론이고 운동장 놀이에도 열성이었다. 뭔가 불공평하게 돌아간단 느낌이었다.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의 예편으로 서울로 전학 온 소년의 본적지는 종로통이었다. 살아본 적 없는 아버지의 고향 동네였다. 전과목 수를 받은 여학생이 일등이었고 시골서 올라온 감자바우 소년은 이등이었다. 삼 학년 마치고 봄방학 들어서자 소년은 가출을 시도한 거였다. 강원도 산골보다 남도의 끝없이 펼쳐진 풍경은 또 다른 별천지였다. 나설 만한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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