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2

by 소인

곡성(谷城)②

글로써 생각이나 심상의 이미지를 표현할 땐 사물의 객관화가 요체다. 주관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글은 편협한 단면을 나타낼 뿐 보는 이에겐 별무 감동이다. 이런 말 주워섬기는 건 나의 마음 깊은 곳 상처로 남아 있는 개인사 때문이다. 시나 다른 언술로도 난 나의 개인사를 활짝 열어 놓질 못했다. 다른 이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그건 상처로부터 자신을 객관화하지 못했거나 그래서 아직도 그것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뜻하기 때문일 거다.

아버지의 아버지, 나의 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서양음악을 공부했다. 도쿄 유학을 거쳐 모스크바 국립음대를 나왔다. 전공은 바이올린이었다. 해방 후 서양음악을 전공한 이에게 마땅한 밥벌이는 미군정의 악사였다. 트로트와 팝송 마구 버무려 미군부대 클럽 전전하던 당시의 가수들에게도 내일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현실은 새장의 카나리아와 다를 바 없었다. 종로 3가의 적산가옥 이층에선 사흘돌이로 젓가락 장단 맞춘 새들의 노래 구성지게 새어 나왔다. 황금심, 신카나리아, 나애심의 구성진 노래 흘러나오면 지나던 사람들 모여 밤늦도록 창 아래 귀담곤 했다. 불우한 세상과 불행한 음악에의 열정을 비관하던 할아버지는 술 취하면 종로 바닥에 지폐 뿌리며 소리쳤다. '이 쓰레기 같은 세상, 하루빨리 사라지라!'라고 행인들 우르르 달려와 주워갔다

궁에서 쫓겨나 만주의 부호와 재혼한 누이가 월남했다. 할아버지의 누이는 신교육을 받은 여성이었다. 경성 보육학교를 나와 파마머리와 뾰족구두를 신은 보험회사 직원이었다. 덕혜옹주를 위해 궁중에 세운 보육원에 취직했다가 의친왕의 눈에 들어 궁에 눌러앉았다. 아명이 길상인 이해경을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의친왕에게 대들었다가 출궁 당했는데 그때 의친왕은 그녀에게 재혼 허가서를 써주었다. 재혼한 남편이 병사하자 그녀는 가솔 이끌고 서울로 돌아온 것이다. 해방 후 여군 창설과 정치에도 발 디뎠는데 두 차례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지기도 했다. 선거 운동 때는 말을 타고 다녔다. 궁에서 내준 대전의 아흔아홉 칸 한옥을 개조해 당시로서는 큰 규모의 성남 장 여관을 운영했다. 말 타고 장터 오가며 선거운동 하자 동네 노인들은 끌끌 혀 차며 욕하기도 했는데 그녀는 내가 지금 이렇게 나서야 후대에 여자들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고 외친 페미니스트였다. 육이오 전쟁 중 서울에서 도망쳐 온 이승만이 미리 녹음된 방송으로 서울 시민들에게 '난 아직 서울을 지키고 있으니 서울 시민 여러분도 동요하지 말고 안심하라'라고 하고 다시 남쪽으로 피난하려 하자 지프차 앞을 가로막고 서서 '나라님이 자꾸 내빼기만 하면 되겠소!'라고 외치던 여걸이었다.

생모 김금덕 여사는 신여성이었다. 경성 보육학교를 나와 신식 파마머리와 뾰족구두를 신은 보험회사 직원으로 의친왕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그 후 의친왕의 배려로 궁 안의 보육교사로 취직했다가 *이해경을 낳았다. 의친왕에게 대들다 쫓겨났지만, 재혼해 왕성한 사회활동을 했다 특히 여성으로 1,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말을 타고 장터를 돌며 선거운동을 하다 동네 노인들에게 욕을 먹기도 했지만, "내가 지금 이렇게 해야 나중에 여성들이 정계에 진출할 수 있다"라고 했던 페미니스트였다. 선거는 모두 낙방했다.

악단장 하던 할아버지가 술병으로 레슨을 못하는 날엔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집으로 찾아온 학생들에게 기타를 가르치곤 했다. 경기고를 나온 큰아버지가 미 태평양함대의 통역장교로 복무하게 되자 아버지는 경기중을 다니며 집안 돌보았다. 물자가 턱없이 부족하던 시절 동무들을 데리고 서울역에 들어온 석탄 차에 올라가 조개탄을 훔쳐 내기도 했다. 전쟁이 터지자 아버지는 경기고를 다니다 학도병으로 참전했고 전시 중에 갑종간부시험을 치러 장교로 임관했다. 여러 전투에 참전했는데 다리에 총상을 입어 후유증으로 예편 후 한동안 지팡이 신세를 지기도 했다. 할아버지에게 시집와 여고를 나온 할머니는 강원도 횡성의 갑부인 탁 씨 집안의 딸이었다. 영어시험에서 백점 받아 할아버지에게 칭찬받았다는 할머닌 돌아가실 무렵 영어 단어를 모조리 까먹었다고 하셨다. 그녀의 고단한 살림살이가 예전의 기억을 깡그리 먹어치웠나 보았다. 할머니가 입원했던 서울대학병원에서 박통이 총 맞아 죽었단 소식 듣고 사촌 형이랑 국산양주에 대취한 다음날 경호실장 차가 놈의 운구차가 들오는 걸 멀거니 바라보기도 했다.

금강산으로 도 닦으러 들어간 신랑 찾아간 만삭의 새댁이 거기서 몸 풀었으니 부잣집에서 서울의 가난한 집으로 시집와 신산한 초년살이가 자심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 형제의 가운뎃자가 해금강의 바다 해를 따서 지었다고 한다. 할머닌 식구들 이끌고 피난 가며 형제 여럿을 잃기도 했다. 피난지 조치원에서 홀로 기차 타고 경기 여중 시험을 친 막내 고모는 총명한 여자아이였다. 당시에도 손으로 쓴 합격 현수막이 조치원 읍내에 떡하니 걸렸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피난지 대전에서 짧은 삶을 마감했다. 아마도 누이, 그러니까 나의 고모할머니의 거처에서 비관과 울분의 생을 마친 것 같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곡성 1